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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린 같은 버스에 올랐을 것이다
‘쌤엔파커스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고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k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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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자유로를 달려 파주 출판단지로 출근한다. 합정역에서 출발하는 셔틀버스에는 젖은 머리를 말리지 못한 채 올라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우리의 아침은 조금 축축하고 또 한편 건조하다. 우리는 한 버스를 타고 한 곳으로 이동하지만 서로 아는 체하거나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다. 습관처럼 시선이 머물면, 저 사람도 나처럼 책 만드는 일을 하겠구나 짐작할 따름이다.

 

깊은 밤, SNS 타임라인에서 ‘모 출판사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을 접했다. 그 순간, 마치 자유로에서 급정거한 것처럼 심장이 덜컹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 나는 몰랐구나.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런 상황에서 침묵하지 않고 고소를 하다니. 공개적인 싸움을 시작하다니. 정말 대단하다. 근데 앞으로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다들 나같이 속만 끓이면 어쩌지. 피해 당사자가 이렇게 큰 용기를 냈는데 그의 목소리가 늪지에 가라앉듯, 모래에 파묻히듯 스르르르 사라지면 어쩌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만 애가 탔다. 피해 당사자의 SNS 계정을 팔로잉하고 그의 블로그에 들어갔다. 그가 겪은 일들을 바라보면서, 혹시 이것이 관음적인 관심은 아닐까 내내 조심스러웠다. 그 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말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부디 그가 혼자가 아니길 바랐다. 그것 말곤 별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미안했고 마음이 고단했다. 그 밤, 그런 마음을 품은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파주 출판단지, 매일 아침 지나치는 그 회사

 

다음 날인 9월 25일, 피해자의 인터뷰 기사(경향신문)가 포털 사이트에 올랐다. 가해자가 소속된 회사 이름이 공개됐고, 사건의 전말은 물론 피해자의 근황도 공개됐다.

 

그가 정규직 계약을 앞두고 막강한 인사권을 가진 자(상무)로부터 성추행 당한 정황은 참혹했다. 그는 가해자를 고소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리됐다. “(상사가) 옷을 벗으라고 요구하고 키스를 한 점은 인정”되지만 “(피해자가) 저항이 없었다”는 게 이유였다. 이보세요, 검찰 나으리. 무려 17개월 동안 수습사원으로 일했고 정규직 전환이 눈앞에 있는 ‘정황’은 안보이십니까. 댁 같으면 그 자리에서 인사권자를 확 밀치고 욕을 하며 궁둥짝을 걷어찰 수 있겠습니까?

 

피해 당사자가 겪은 성폭력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 회사를 다니는 동안, 저자 접대를 빌미로 야심한 시각 불려나가 노래방에서 ‘분위기’를 띄워야 했고, 송년회에는 여직원들이 드레스를 입고 테이블마다 접대를 했다고 한다. 매일 아침 지나치는 그 회사가 전혀 다르게 보였다. 유명세의 장막이 벗겨지고 권위와 폭력이 난무하는 실상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런 폭력 속에서도 그가 “꼭 살아남아야겠다” 다짐하는 동안, 우리는 셔틀버스에 나란히 앉아 출근했을지도 모르겠다. 같은 곳에서 내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젖은 뒤통수를 공유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근성’을 가지고 버텨야 사회인이 되는 거라고 믿으며 마음을 쥐어짜던 그 순간, 아마도 우리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을 거다.

 

그는 ‘재수가 없어서’ ‘그럴만한 여지를 보여서’ 폭력을 겪은 것이 아니다. 그건 그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쌤앤파커스 성폭력 사건은 가해자가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함부로 휘두른 명백한 ‘폭력’ 상황이다. 그리고 피해자는 자신을 아프게 하고 멋대로 흔든 이들과 맞서는 길을 선택했다. 더 이상 ‘아프지’ 않기 위해, ‘천 번이 흔들리지’ 않아도 어른이 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언어를 포기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말’하고 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소름 끼치니까”

 

출판계에 일하는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한’ 경우가 많다. 이건 출판사용 자기 소개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식상한 말이지만, 가식적인 관용구라기보단 워낙 그런 사람이 많기 때문에 특별할 게 없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런데 슬프게도 책을 읽는 것과 책을 만드는 것은 굉장히 다른 활동이다. 책으로 만나면 더없이 훌륭한 사람이 실제로 만나보면 작품과 완전 다른 경우들도 적지 않다. 조직 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출판사에 다니면 뭔가 남다른 조직 문화를 경험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상당하다.

 

나의 첫 직장은 비교적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공간이었는데, 그곳에서도 권위와 패거리 문화가 없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선택’이라고 했지만 회식 자리에 빠지면 눈치가 보였고, 회식 자리에서 술을 적게 먹거나 신입답게 분위기를 띄우지 않으면 또 눈치가 보였다.

 

가장 큰 문제는 술을 많이 먹는 상사였다. 그는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맨 정신에 업무 처리를 할 때는 OO씨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어깨에 손을 두르거나, 안마를 해주겠다며 어깨를 주무르거나, 손을 잡고 한참을 놓아주지 않았다. 웃기는 건,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해 있던(!) 사람이 내가 경직되거나 불쾌한 기색을 드러낼라치면 귀신 같이 몸을 가누었다는 사실이다. 그러고는 지분대는 취객에서 인생 선배로 돌변해 어깨나 손을 ‘담백하게’ 툭툭 두드렸다. 그도 알고 나도 아는 질척함이 일순 동료애로 둔갑했다. 싸구려 연기, 저질 포장, 비겁한 마침표.

 

성폭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수많은 책에서 읽은 수많은 문장들, 이를테면 성적 수치심, 성적 자기결정권 같은 표현들이 출구를 찾으려는 듯 내 안에서 펄떡였다. 아는데, 다 알면서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나는 내 자신이 ‘여긴 직장이고 나는 직장인이야.’ ‘늦게 시작한 사회생활이니 적응해야지.’ ‘괜히 문제 일으키고 싶지 않아’ 라는 생각을 할 줄은 추호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또 하나의 충격이었다.

 

현실과 이상이 다른 것처럼, 책과 삶은 달랐다. 하루는 포기를, 하루는 희망을 번갈아 품는 동안 시간이 흘렀고 연차가 쌓였다. 어엿한 직장인이 되면 뿌듯할 줄 알았는데 자부심은커녕 자괴감이 늘어갈 뿐이었다. 어설프게 선배인 척하려는 그를 지금 다시 만난다면,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에일리가 부릅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소름 끼치니까.”

 

책 만드는 사람들, 우리 안에 꿈틀대는 문장들

 

이런 소름 끼치는 경험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출판 전문 팟캐스트 ‘뫼비우스의 띠지’에서는 쌤앤파커스 성폭력 사건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자신이 겪은 성폭력’을 설문으로 받았다. 우리가 겪은 폭력들은 서로 닮아 있었다. 원치 않는 신체접촉, 성폭력 발언은 물론, 직접적으로 성관계를 요구하는 행위까지 권위를 가진 자가 그 힘을 남용하는 사례들은 넘치고 넘쳤다. (차마 방송에서 밝힐 수 없는 사연들도 많다고 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신이 직접 성폭력을 겪지는 않았지만, 후배가 성폭력에 노출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적절한 도움을 주지 못해 후회스럽고 미안하다는 사연이었다. 내가 상사의 불쾌한 발언이나 신체접촉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을 때 ‘저 선배 원래 좋은 사람인데 술만 먹으면 저런다’거나 ‘그래도 알아두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던 여자선배들이 떠올랐다. 그 선배들을 좋아했고 존경했다. 그래서 선배들의 반응은 나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믿을만한 선배들’이고 다들 그냥 넘기는데, 나만 ‘유난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 싫었던 거다. 이렇게 쉬쉬하는 동안, 누군가의 마음이 곪아가고 인생이 일그러지기도 했을 것이다.

 

조직 내에서 폭력적 상황을 겪을 때, 모두가 용기 있게 “No”를 외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절대 회사를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라서, 누군가는 결심이 확고하지 않아서, 누군가는 또 다른 이유로 피해를 감내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건 진짜 아니다’, ‘나는 이 길을 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싸움을 시작한다면, 그가 걷는 길에 여린 꽃잎 같은 마음이라도 기꺼이 보탤 수밖에.

 

현실과 이상이 다르다 해도 우리가 읽어온 문장들이, 우리가 사랑하고 기대고 믿어온 문장들이 여전히 우리 안에서 꿈틀대고 있으니까. 그것이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한’ 우리가 앞으로도 책을 좋아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일 테니까.

 

문인들의 응원과 연대의 메시지 이어져

 

SNS를 통해 이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피해자의 목소리가 외롭게 떠다니다 사라질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기우였다. 많은 이들이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곁에 섰다. 언론노조 출판노조협의회는 성폭력 사건과 잘못된 조직 문화에 대한 대표 측의 입장 표명, 제대로 된 사과와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트위터에는 ‘쌤앤파커스 성폭력 사건에 분노한다’(@antisamnparkers) 계정이 생겼다. 이곳에 많은 문인들이 ‘고맙다’, ‘함께하겠다’는 마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  페이스북 ‘쌤앤파커스 성폭력 사건에 저항한다’ 페이지에 올라온 문인들의 응원과 지지의 메시지.

당신의 뒤가 아니라 곁에 서겠습니다. 멀리 떨어진 남의 아픔이 아니라, 타인의 ‘기특한 용기’가 아니라, 제가 직면한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결단으로 당신의 깃발을 이어받겠습니다. (문학평론가 이강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고, 잊어버려야 하는 일이 아니라고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많이 외롭고 두려웠을 당신을 지지합니다. 응원합니다. (김선재 시인, 소설가)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소설가 김혜나)

 

하지만 가해자와, 가해자가 소속된 회사는 변명에 변명을 늘어놓기에 바쁘다. 회사의 대표는 ‘참담하다’면서 설익은 자기 고백을 할 뿐이고, 가해자는 ‘모든 게 날조됐다’고 발뺌하고 있다. 가해자는 고소를 당한 뒤 회사를 떠났다가 불기소 처분을 받고 복귀한 것으로 알려져 공분을 샀지만, 그마저도 사실이 아니었다. 언론노조 출판노조협의회에 따르면 가해자 이 모 상무는 ‘단 한번도 회사를 나가지 않은 채, 사내 이사, 비상무 이사로 이름만 바꾼 채 버젓이 회사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생각보다 가까이 있어요, 우리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도, 문제를 제기한 피해자는 꿋꿋하다. 밥보다 비싼 링거를 맞고 수시로 항불안제를 먹으며 버티고 있다지만 ‘오늘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며칠 전 그는 자신의 SNS에 ‘자기 때문에 현재 그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으면 어쩌나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마음을 밝혔다. 그 말, 반가웠다. 그게 맞다. 남 생각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여전히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것 같은 가해자와 회사 대표는 제발 이제라도 남 생각 좀 했으면 좋겠다.

 

지금은 피해자가 오직 자신 자신만 생각했으면 한다. 용서니 배려니 그런 건 이다음 언젠가, 하게 될 때가 오면 하는 걸로 하고, 지금은 몸과 마음 모두 잘 추슬러서 꼭 살아남았으면 한다. 나의 이런 마음이 가 닿은 것처럼 그는 말한다. 생(生)도 싸움도 둘 다 이길 거라고. 부끄러운 줄 알라고. 양아치 짓 해가며 책 팔아온 당신들이랑 급이 다르다고. 진심으로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내 편이라고.

 

하루가 끝나기 전, 나는 하루의 안부를 확인하듯 그의 SNS 계정을 들여다본다. 자기의 언어로 말을 한다는 것,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의연하거나 괜찮을 필요, 당연히 없다. 불안과 고민과 분노와 잠깐의 평온과 일상과 유머까지 우리는 공유하고 있다. 그 말들을 바라보며 우리가 우리의 말을 잃지 않기를, 경험이 말이 되고 말이 미래가 되는 삶을 포기하지 않기를, 손가락과 엉덩이의 힘을 꾸준히 믿어가기를, 지지와 공감의 관계망을 이어가기를 바라고 있다.

 

어쩌면 이 글을 볼 그에게 수줍은 마음을 전한다. 생각보다 가까이 있어요,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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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10/07 [10:01]  최종편집: ⓒ 일다
 
독저 14/10/07 [12:49] 수정 삭제  
  어렵게 용기 냈을 피해자를 지지합니다.
복운의여왕 14/10/07 [20:06] 수정 삭제  
  용기 있는 그분과 용기 있게 지지글 보내주신 님께 존경의 박수 보냅니다
보니비 14/10/07 [22:37] 수정 삭제  
  어렵게 용기 내주셔서 진실을 알려주셔서 정말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지지합니다.
나무 14/10/07 [23:19] 수정 삭제  
  상무가 수습사원에게 옷 벗으라 하고.. 게임끝인데 불기소처분이라니.. 검사를 기소해야할 것 같네요.
노공 14/10/08 [00:37] 수정 삭제  
  지지합니다. ..
kook 14/10/08 [14:02] 수정 삭제  
  피해자에 대한 지지의 마음을 표현할 길이 생겼네요.
아래글은 언론노조 출판협의회 계정에서 퍼왔습니다.
탄원서로 어렵게 입을 연 피해 당사자에게 고마움과 지지를 표현할 수 있겠네요.

"쌤앤파커스 수습사원 성폭력 사건을 위한 탄원서를 모집합니다! 아래 링크에서 탄원서 양식 내려 받으실 수 있습니다. 가해자를 반드시 법정에 세워 처벌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참여 부탁 드립니다!"
http://cafe.naver.com/booknodong/2277
김민지 14/12/29 [13:09] 수정 삭제  
  지지합니다.
김민지 14/12/29 [13:12] 수정 삭제  
  너무재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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