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색깔을 찾아서

뮤지션 강허달림

문이정민 | 기사입력 2003/09/21 [19:37]

나만의 색깔을 찾아서

뮤지션 강허달림

문이정민 | 입력 : 2003/09/21 [19:37]
‘강허달림’은 그녀의 본명이 아니다. 그녀의 본명은 ‘강경순’이다.

시골소녀, 꿈을 꾸다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40분 정도 들어가야 나오는 시골마을. 그녀는 거기서 태어나 자랐다. 가난한 소작농의 집에서 6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모든 산천을 돌아다니면서 동네를 휩쓸었다. 초등학교 때는 공부도 잘했고, 운동도 잘했다. 무엇보다 노래는 “동네 콩쿠르에서 냄비는 다 탈 만큼” 잘했다.

그녀가 “인생을 걸” 목표를 잡은 건 초등학교 6학년 때. 시골에서 접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서야 아버지 환갑잔치 선물로 들어온 TV를 가질 수 있었다. 가요라는 것을 접해본 적이 없던 그녀는 이선희의 ‘그대여, 잘못은 내게 있어요’를 듣고 그대로 “꽂혔다”. 그때 마음먹었다. ‘가수 해야지’ 하고. 그렇게 마음먹은 후에는 한번도 그 꿈을 버린 적이 없다.

순천시에 있는 중학교에 올라가자 상황이 좀 달라졌다. “공부 잘하는 애들과 옷 잘 입는 애들”이 수두룩했다. 그녀는 자연히 밀렸고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없었다. 언니는 3일 밤을 굶으며 시위를 해 결국 대학에 갔지만 바로 밑인 그녀는 중 3때 상고를 선택했다. 당시 어떤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난 대학을 가지 않고 돈을 벌겠어!”라는 호기어린 선언을 했고 그녀는 그게 좋았다. 그녀가 진학한 상고에는 기타 중창반이 있어 잔뜩 기대했지만 기타를 못 사서 들어갈 수 없었다. 조금 후에야 4천원짜리 기타를 사서 ‘물음표 음악학원’에서 수강할 수 있었다.

마침 KBS 청소년 가요제가 열렸다. 그녀는 원장선생님을 한달 동안 따라다니며 조른 끝에 곡을 하나 받았고 녹음한 테이프를 서울로 보냈다. 3차 예선까지 통과, 본선 진출자 리스트에까지 올랐지만 마지막 관문에서 떨어졌다. 그래도 그녀는 용기백배 했다. ‘난 서울로 갈 거야, 할 수 있어.’

“나, 서울 왔어! 다 죽었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서울로 상경했다. 노래하겠다는 생각 하나로, 달랑 배낭하나 매고. 서울에 와서 직원 다섯 명인 장판 회사에 경리로 취직했다. 당시 월급은 30만원. 그녀의 계획은 이랬다. 24만원씩 3년 동안 적금을 부으면 천만원 정도가 모인다. 그렇게 3년만 버티고 본격적으로 노래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꿈은 단박에 물거품이 됐다. 회사가 작다 보니 사장의 권력이 막강했고 갓 상경해 “나, 서울 왔어! 다 죽었어!”하며 의욕 충만했던 그녀는 당돌하게도 “왜 함부로 하세요?” “미스 강 말고 경순씨라고 불러주세요”하며 꼼꼼하게도(?) 따졌던 것이다. 결국 2개월 만에 잘렸다.

고졸 학력이었지만 그녀는 생각했다. “대학은 안 다녔지만 그 사람들보다 더 유식하고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주눅들지 않기 위해 다짐했고 자신했다. 그런데 녹록치 않은 서울 생활, 돈을 벌려면 대학을 가야 한다는 현실인식이 앞섰다. 2년 동안의 재수생활, 음악을 공부할 수 있다는 서울예전이 목표였다. “거기 가면 음악 공부도 하고 음악 하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쉽지 않았다. 다른 전문대 건축과에 합격했지만 재수하는 2년 동안 신문배달로 모은 90만원으로는 등록금이 모자랐다. 결국 포기하고 그때 막 생긴 서울 재즈아카데미 보컬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음악인생이 시작됐다. 스물 여섯이었다.

자신감을 얻다

음악을 제대로 접한 적도 없고 악보를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주산만 튕기던” 그녀에게 아카데미 생활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난 뜰 거야!” 하고 자신했던 그녀의 패기는 점차 무너졌다. 그녀는 “내가 생각했던 음악이 아니야” 라는 혼란에 괴로웠다. 현란한 테크닉을 구사하는 동기들 사이에서 창 발성이 남아있던 그녀는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 된 심정이었다. 동기들은 판소리만 하고 있는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저 애는 무슨 국악을 한대니?”하고 수근거렸다.

그리고 ‘96년 12월 28일’. 그녀는 그 날짜를 잊지 못하고 있다. 가수 한영애씨의 특강. 그녀는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을 배웠다. “우리나라 소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냐?”며 강의를 시작한 한영애씨는 “가장 중요한 것은 ‘소리’다. 자기 본연의 색깔을 낼 수 있는 자기만의 소리를 찾는 것이 보컬이다”라고 말했다. 아카데미 1년 과정이 끝날 때까지 무대 한번 올라간 본 적이 없는 ‘촌년’에게 그 조언은 가슴깊이 각인됐다.

그리고 다시 재등록했다. 아카데미 청소부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그 당시 그녀는 그저 ‘청소부’였을 뿐이다. 아무도 노래로 그녀를 기억하지 않았다. 동기생들이 머라이어 캐리나 휘트니 휴스턴을 흉내낼 때 그녀는 판소리를 하면서 발성연습에 몰두했다. 그러던 중 ‘보컬 리뷰’ 라는 수업이 있었다. 첫 무대였던 셈이다.

“지금껏 수업 중 자기 색깔로 느낌 있게 부르는 사람은 처음이다.”
이것이 그녀의 무대를 본 강사의 평가였다. 반응은, 너무나 좋았다. ‘청소부’였을 뿐인 그녀는 노래로 다시 평가 받았고 자신감을 얻었다.

블루스, 내가 찾은 음악

그녀는 올해 3월, 그룹 ‘신촌 블루스’ 보컬로 영입됐다.

그녀는 그저 “내 나름대로 노래를 한 것”이었을 뿐, 블루스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가 느낀 블루스의 매력은 “이것이 ‘블루스다’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음악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그저 좋아하고 즐긴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블루스를 접하고 즐겼던 것처럼, 관객들도 그저 즐겼다. 글도 못 읽고 악보도 못 보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음악, ‘리듬’만이 존재하는 블루스는 어쩌면 그녀에게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현학적으로 따지지 않고 자기 멋대로 즐기고 빠지는 것. 그녀는 이태원 클럽 ‘just blues’를 시작으로 무대를 휘저었고 클럽에 자리가 없을 정도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 뒤 그저 “노래 시켜준다”고 해서 들어간 것이 ‘페미니스트’ 타이틀을 건 마고 밴드였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조차 생경했던 그녀에게 마고 밴드는 익숙치 않았다. 그녀는 “운동권 음악이 시시했다”. 각종 여성단체 행사에 불려 다녔지만 음악으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스트 밴드니까 써주는 것 같았다.” 만족할 수 없어 결국 밴드에서 나왔지만 중요한 걸 건졌다. 엄마성. 시골 깡촌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에게 ‘부모성 함께 쓰기’라는 발상은 충격적이었다.

“내 모든 사상은 엄마”

그녀는 페미니즘은 몰라도 엄마의 삶은 알았다. “소리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아버지 덕에” 궁핍한 생활은 늘 엄마의 몫이었다. 글도 읽을 줄 모르는 엄마는 시골 소작농의 아내로 6형제를 낳고 키우고 집안을 건사했다. 힘든 생활 속에서도 막내인 그녀를 늘 지지해주고 묵묵히 믿어줬던 엄마. 엄마의 삶 자체가 그녀를 구성했다.

엄마의 성, ‘허’ 씨. 그녀는 엄마성을 자기 이름에 달고 싶었다. 그리고 ‘달리고 싶다’는 의미의 ‘달림’. 강허달림. 그녀가 새롭게 찾은 이름이었다. 그런데 세상은 좀 이상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엄마성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같이 음악을 할 수 없다고도 했고 무작정 싫어하기도 했다.

그녀의 본명은 ‘강경순’이다. 공경할 ‘경’, 순할 ‘순’. 그녀는 순할 ‘순’ 자가 싫다고 했다. 서울에 와서 “순하게만 살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시골 촌년에게 사람들은 좀처럼 문을 열지 않았다. 아니, 자신도 문을 열수 없었다. 신촌의 한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때 그 곳 사람들은 누구나 ‘이즘’이니 ‘사조’를 이야기했고 “몇 학번이냐?”고 물었다. 음악을 사랑하고 영화를 좋아했던 그녀지만 좀처럼 입을 열수 없었다. 압구정에 있는 클럽에서 공연할 때는 지하철 문만 열려도 그 낯설고 불편한 공기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무작정 사람들에게 다가서고 마음을 여는 그녀는 ‘푼수’였을 뿐이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이 서울에서는 쉽지 않았다.

서울 생활에 지친 그녀는 한달 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지켜봐 주었다. 몰래 돈을 쥐어주며 시내에 나갔다 오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안달하지 말자. 내 방식으로만 다가가 문을 열어 달라고 하지 말자. 그들 방식을 존중하고 지켜봐 주자”고. 오랜만에 복작대는 식구들 사이에서 추석을 보내면서 그녀는 힘을 얻었고, 다시금 ‘자신’을 바라보았다.

서울생활 10년, 이제는 본연의 자신을 찾겠다면서 그녀는 농담처럼 말했다.
“그래, 나 촌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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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를린 2003/09/24 [14:48] 수정 | 삭제
  • 씩씩한 사람을 보면...내 가슴이 설래고...
    조용하기만한 답답한 사무실서...
    당신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눈물이 나..

    강허달림!
    기억하겠어여
  • 이유지현 2003/09/23 [23:07] 수정 | 삭제
  • 강허달림, 멋진 여자.
    정말로, 정말로, 그녀는.

    올해안에 꼭 당신의 공연을 보겠어요.
    올해안에는요.
  • 말라싱어 2003/09/22 [11:37] 수정 | 삭제
  • 신나라. . . . .

    나두 깡촌인데.

    나두 꿈이 있다.

    아자리~!
  • 2003/09/22 [00:03] 수정 | 삭제
  • 그녀의 삶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네요.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을 둘러보고.
    그리고 다시 세상을 바라보고.

    강허달림님, 음악으로 보여주세요. ^^
  • j.j 2003/09/21 [21:47] 수정 | 삭제
  • 열심히 살아가는 멋진 여자들이 참 많아요. 강허달림님의 강하고 아름다운 삶에 박수를 보냅니다. 더불어 따뜻한 글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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