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학교 인생, 일이 공부고 공부가 일이다

<20대 여성 ‘일’을 논하다> 활동보조 일을 하며

김민경 | 기사입력 2014/12/07 [11:31]

탈학교 인생, 일이 공부고 공부가 일이다

<20대 여성 ‘일’을 논하다> 활동보조 일을 하며

김민경 | 입력 : 2014/12/07 [11:31]

※ 2014년 <일다>는 20대 여성들이 직접 쓰는 노동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올해 초 초등학교 동창생들의 대학 입학 소식을 들었다. 누군가는 그 유명한 서울대 의예과에 합격했다 했고, 누군가는 처음 이름 들어보는 대학에 간신히 합격했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는 그렇게 똑똑하다고 칭찬받곤 했던 친구가 하위권 대학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평생 같은 동네에 살줄 알았던 친구들은 이렇게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됐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대학에 입학해서 14학번으로 바쁘게 살고 있을 이 시간, 지금 나는 대학에 있지 않다. 1995년생 스무 살이지만 나는 대학에 가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막 졸업했던 그때까지만 해도 그 애들도 나도, 우리 사이에 이런 차이가 생길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삶

 

▲  "민경먹방".  스무살, 내 삶은 내가 책임진다.   © 김민경

내 학력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학교 2학년 1학기 중간고사까지다. 그 후에 고등학교 졸업검정고시까지 봤기 때문에 공식 기록은 고졸이겠지만, 학교에서의 기억은 남들에 비해 현저히 짧다.

 

학교에 다닐 때는 매우 평범한 학생이었다. 엄청나게 모범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딱히 노는 부류도 아니었다. 학교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특별히 싫어하고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태어나서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학교에 다니지 않는 삶을 상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주위에서 학교를 그만둔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소 보수적인 지방 소도시 출신인 내가 대안학교나 홈스쿨링을 접해 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중학교 중퇴라고 말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학교에서 안타까운 일을 겼었구나 하고 걱정하는 눈빛과, 혹은 엄청난 신념과 개성의 소유자라서 학교를 박차고 나온 자를 보는 듯 신기함이 담긴 표정으로 본다. 그리고 모두들 입을 모아서 “대단하네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어요?” 라고 질문한다.

 

사실 탈학교는 ‘별 일 없이 진행’되었다. 재미없는 대답이겠지만, 사실이다. 왕따를 당하지도, 교장 선생님께 반항하지도 않았다. 간신히 기억을 더듬어 탈학교의 시발점을 찾아보자면, 사회적 기업에서 운영하는 대안캠프에 가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엄마의 권유로 우연히 캠프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 캠프는 ‘올롱가포’라는 이름의 필리핀 중소 도시에 위치해 있었다.

 

캠프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전까지 알았던 캠프와는 전혀 달랐다. 내가 알던 캠프들은 체계적인 시간표와 규칙에 따라 운영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 캠프에는 주어진 시간표가 없었고,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꼭 지켜야 할 것 외에는 어떤 엄격한 규율도 없었다.

 

주최 측의 의도는 아이가 부모와 학교를 떠나서 마음껏 생활해 보는 것이었다. 그 의도에 맞게 그곳에서 실컷 놀았다. 따갈로그어로 구멍가게라는 뜻인 ‘사리사리’에서 군것질 거리를 사먹고,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의 바다로 놀러가고, 친구들과 어울려 이야기하고, 웃고, 보고 싶은 영화와 드라마를 잔뜩 보며 그렇게 6개월을 보냈다.

 

여덟 살 때 학교에 들어간 이후 그렇게 제약 없이 놀아본 것은 처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매우 엄격한 스케줄에 따라서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교에서의 삶 자체는 기본적으로 규율과 시간표에 갇힌 삶이었다. 모범생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학교를 다니는 이상 규율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학교라는 규율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일종의 타락이라고 생각했다. 10대의 삶에 학교 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어떤 책에서 읽었던 문장이 아직도 머리 속에 남아 있다. 그 책 역시 탈학교를 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가 쓴 책이었다. 책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의무교육이라 말할 때 의무는 부모에게 적용되는 사항이지, 아이에게 적용되는 사항이 아니에요” 라고. 부모가 자신들의 무성의 때문에 아이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아이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학교는 의무적으로 다녀야 하는 곳이 아니다.

 

나는 필리핀에서 처음으로 모국이 아닌 타문화를 겪었고, 가족 아닌 타인들과 섞여 사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학교 이외의 곳에서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 나는 학교를 다 폐쇄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학교는 10대의 삶에서 하나의 선택지여야 한다. 청소년이 학교에서 이탈한다고 바로 범죄자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10대의 삶에 대한, 그리고 배움에 대한 상상력 부족이다.

 

탈학교를 해서 대안캠프에 있는 동안, 나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기획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규율과 시간표가 없다고 해서 되는 대로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책임지며, 자신의 결정권을 누구에게도 위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오히려 이런 길이 좋지 않을 때도 있다. 학교에서는 힘들지만 규율과 시간표 속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저절로 물속으로 이끌어주는 파도처럼, 누군가에게 결정권을 주는 일은 편안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내 선택과 책임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싶지도 않고, 그 선택의 결과와 책임을 남에게 미루며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지도 않다. 작고 미약하더라도 스스로 내 삶을 온전하고 단단하게 꾸리며 살고 싶다.

 

일을 하는데 돈을 벌지 못한다?

 

▲  나에게 일이란 배우는 활동이다.   © 김민경

대안캠프에 다녀와서 열일곱 살 때부터 스무 살이 된 지금까지 4년 동안 한 인문학 공동체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이 공간에서 하는 공부는 일종의 고급 스펙으로 자리매김하여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지금의 인문학 열풍과는 사뭇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서 공부는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혹은 다른 사람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공부하지 않는다.

 

이 공간에서 공부의 의미는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이때 구원이라는 것은 스스로가 자신의 문제를 고민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 앞서 탈학교 이야기를 할 때도 했던 말이지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우리의 문제 해결을 외부에 위탁한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허둥댄다. 그리고 일말의 고민 없이 학교, 병원, 상담소 등에 자신을 내맡긴다.

 

물론 그런 외부 기관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스스로에게 없다면, 나의 존재는 대체 무엇일까. 자신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하게 될 것이다.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 내 삶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점을 찾는 것을 남에게 의존하지 않기 위해, 나는 이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다.

 

이곳에서 읽는 책은 소위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이다. 고전은 지어진지 최소 수십 년에서 많게는 수천 년이 된 것도 있다. 하지만 이 책들은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읽히고 있다. 그것은 고전의 주제가 어느 시대에나 해당될 만큼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고전의 문제의식과 나의 문제의식이 부딪혔을 때, 새로운 질문이 탄생하고 새로운 답의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동안 수천 년 전의 질문과 지금의 질문이 부딪히면서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그리고 나는 그 싸움의 과정에서 배우고 있다.

 

지금은 주로 러시아 문학과 중국 고전을 읽고 있다. 나는 이렇게 읽고 쓰는 작업이 현재 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이라는 것의 정의는 사람마다 많이 다를 테다. 물론 나는 공부로 별다른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지 못하다. 딱히 돈을 벌어다 주지 못하는 내 공부가 누군가의 눈에는 취미 정도로 여겨질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다. 현재 자신에게 가장 가치 있는 활동을 ‘일’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가장 집중하고 있고, 그 활동을 통해서 경제적 가치가 아니라도 각자의 방법대로 어떤 생산물을 생산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활동에서 충분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면, 이런 것을 오히려 ‘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돈을 벌 수 있는 활동만을 일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쉽게 일에서 소외된다. 하고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분리되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활동에 집중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 활동으로 돈을 벌고 있다고 해도 진정한 ‘일’은 아니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지만 돈을 벌지는 못한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불행하지 않다. 나의 직업은 ‘읽고, 쓰고, 배우는’ 활동이다. 배움에 대해 다른 상상력이 필요한 것처럼, 일에 대해서도 다른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내겐 자격증을 갖추고, 돈을 버는 것만이 일이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돈까지 벌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존재 전부를 집중할 수 있는 활동이 있다면 엄연한 일이며 노동이다.

 

활동보조 일을 통해 배우다

 

물론 공부하는 활동을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경제적인 문제는 다른 식으로 해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지금 ‘활동보조’라는 일을 하고 있다. 활동보조는 아직 많이 알려진 직업이 아니다. 활동보조란 간단하게 말하자면 신체 혹은 정신 장애로 인해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을 하는 데 지장을 겪고 있는 수많은 장애인을 위해, 그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제도다.

 

‘활동보조’는 장애인들에게 어떤 지시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전까지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들은 시설이나 혹은 보호자의 기획에 따라서만 살아야 했다. 본인의 선택과 취향, 삶의 길 등은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이 일이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며 단단하게 꾸리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는 점 때문이었다.

 

활동보조 이전에도 잠깐 알바를 한 적이 있다. 4개월 정도 일본식 돈까스 체인점에서 서빙하는 일을 했다. 그러나 이 아르바이트의 경험은 내 인생에서 아무런 흔적도 없이 흐릿하다. 그 이유는 바로 내가 이 경험을 통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껏 남은 흔적이라고 해봐야 바쁜 점심시간에 느꼈던 고단함, 그리고 사장님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은 기억뿐이다.

 

이 일을 하면서 정말 영화 <모던타임즈>의 이미지와 같이 톱니바퀴의 한 부분처럼 일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느 날 없어져도 얼마든지 교체될 수 있는 그런 작은 공장에 소속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 내 몸을 제물처럼 바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때문에 다음 아르바이트는 그 목적이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도, 그저 시간을 때우는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래서 ‘활동보조’를 선택했다.

 

위에서 활동보조에 대해 좋은 점만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렇게 녹록치만은 않다. 활동보조는 일대 일로 하는 일이다. 한 명의 장애인과 한 명의 활동보조인이 만나 함께 활동을 해나가는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수많은 감정이 올라왔다 내려가고, 그것이 신경전이 되어 갈라지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

 

그뿐 아니라 일의 특성상 장애를 이해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사건들도 빈번하다. 의사소통의 장애, 옷 입는 방법이나 샤워하는 방법을 내가 평소에 하는 것과 다르게 해야 할 때 느끼는 짜증스러움과 난감함에 가끔 힘들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럴 때 이용자를 탓할 수는 없다. 서로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장애’에 대해 공부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아는 활동보조인들 여럿과 장애 문제에 대해 관심 있는 분들이 모여서 ‘장애학 세미나’라는 것을 시작했다. 장애학 세미나는 애초에는 활동보조를 하면서 느끼는 문제들을 해결해보자는 가벼운 의도에서 출발했다. 그렇지만 이 세미나의 줄기는 여러 갈래로 계속 퍼져나갔다. 그래서 처음에는 단기 세미나로 기획했던 것이 지금 여러 시즌 계속 이어지고 있다.

 

첫 시즌에서는 ‘몸’을 중점적으로 공부했다. 장애를 어떻게 단점이 아닌 ‘몸의 차이’로 인식할 수 있을지, 몸의 차이에 대해 다른 문화권에서는 어떻게 사유하고 있는지에 대해 공부했다. 그리고 이어서 이용자의 장애뿐 아니라 우리의 노동으로 관심이 옮겨갔다. 우리의 일들은 흔히 ‘돌봄노동’이라고 불린다. 이런 돌봄노동이 어떻게 타인과 소통하는 활동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두 번째 시즌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지금 시즌에서는 ‘시설’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나는 이 일을 하기 전까지 시설이라고 불리는 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시설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사람들, 탈시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시설’이라는 공간 자체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지금은 형제복지원 사건, 아우슈비츠 등을 다룬 수기를 읽고, 시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푸코의 논의를 읽고 있다.

 

이론과 현장의 배움이 만날 때

 

나는 활동보조를 하면서 한 가지가 바뀌었다. 엄청나게 드라마틱한 변화는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세상을 보는 시야가 확실히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휠체어로 다니는 서울이 얼마나 가파르고 좁은 곳인지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섞여 일하고 공부하는 일터와 공부터를 생각해 본적 없었다. 무릎으로 이동해야 하는 사람의 삶을 고려해 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나와 다른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처음으로 타인의 삶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활동보조를 하면서 이론적인 배움과 현장에서의 배움이 만나는 것을 느꼈다. 현장에서 일만 할 때는 문제를 느껴도 그저 불평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책을 통한 공부가 필요했다. 그리고 책으로만 읽는 공부의 한계도 분명히 절감했다. 현장 속에서 직접 뛸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

 

앞에서 내 일은 ‘배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활동보조를 하면서 공부하는 이 상황이 좋다. 경제적 목적을 위한 활동과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활동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구체적인 활동의 내역들은 바뀔 지도 모른다. 그래도 계속해서 ‘배우는’ 일을 해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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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절기 2014/12/08 [11:53] 수정 | 삭제
  • 일찍 시작하는 자생적인 삶에 응원을 보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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