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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빈민가에서 본 인종, 계층, 차별
지구화 시대 ‘이주’의 감수성(4) 국경, 빈부의 격차②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조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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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출장, 이주노동, 어학연수, 유학, 국제결혼, 이민 등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는 경험을 하고 있으며, 국내에도 많은 이주민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일다>는 지구화 시대를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이주’의 감수성을 들어봅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선망하던 국가의 빈민가에서 본 맨얼굴

 

대학에 다니던 시절, 나는 학교의 지원을 받아 미국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가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학생비자를 빨리 받기 위해 장학생으로 지정해주었고, 간단한 대사관 인터뷰를 통해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출국한지 11시간 만에 미국 LA에 도착했다. 모든 것들이 낯설었지만 당시엔 미국이라는 것 자체만으로 모든 것이 HOT해보였다. TV에서만 보던 도시에 와 있다는 것에 연신 두근거렸다. 공항에서는 빠르게 입국 심사를 통과시켜주었다.

 

▲  Twin Peaks에서 샌프란시스코 전망을 배경으로.    © 조효비

내가 다닌 학교의 기숙사는 LA부근 해변 쪽에 있었는데, 흑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빈민촌이었다. 학교는 빈민가의 1백년 된 오피스텔에 기숙사를 제공해주었다. 학교와는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학교 조교들은 첫날부터 주의 사항으로 “여자들끼리만 다니지 말고 남자친구들도 같이 다니라”는 말을 했다. 당시엔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어학수업을 듣고, 오후 1시부터 8시까지는 의과수업을 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에 들어오면 새벽 4~5시까지 과제와 복습을 했다. 이렇게 빠듯하게 생활하며 잠이 매일 모자랐지만, 그럼에도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즐기고 싶어서 시간만 나면 주변을 여행했다.

 

기숙사 근처에는 장애인들이 많이 보였고, 초고도비만인 사람들도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가난한 지역이니까. 마트에서 저렴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것이 99센트짜리 2인분 파스타와 1달러짜리 큰 프라이드 치킨 두 조각, 그리고 3달러짜리 큰 소시지 다섯 개입이었다. 나도 돈이 없어서 그런 것들을 사서 먹다 보니 금세 살이 불었다.

 

하지만 베버리힐즈나 해변 쪽의 부유한 마을에 가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날씬한 몸에 딱 붙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아이폰을 팔에 차고 조깅과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빈부의 격차가 체형의 차이를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표정도 대조적이었다.

 

황당한 일을 겪어도 ‘영어가 부족한 내 탓’

 

기숙사에서 해변 쪽으로 5분만 걸어가면 해변가의 고급스러운 레스토랑과 펍, 클럽, 아울렛 등이 있었다. 토요일 밤에는 드레스와 슈트를 차려 입은 연예인 같은 사람들이 보였다.

 

주말이 되어 룸메이트들과 아울렛에 가려고 나섰을 때였다. 낡은 빨간색 차를 몰고 가던 내 또래로 보이는 흑인남자 세 명은 느닷없이 우리에게 총 쏘는 시늉을 하며 성적인 욕설을 하고는 쌩 지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당황스러워서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못 배워서 저런 것’이라고 말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누가 봐도 기숙사 근처 빈민가에 사는 흑인들 같았다. 흑인들은 아시아인들을 자신의 아래로 본다고 하던데 정말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  라스베가스에서 친구들과.    © 조효비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우린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햄버거 가게에 들어갔다. 햄버거를 주문했는데, 젊은 백인 점원은 못 알아듣겠다며 우리에게 짜증을 내었다. 메뉴번호를 얘기해도 못 알아들었다. 이쯤 되면 못 알아듣는 척 하는 거라고 생각할 법도 한데, 우린 화를 낼 엄두도 못 내고 ‘영어 실력이 부족한 우리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점원이 유일하게 알아들은 와퍼 버거 세트를 주문했다. 그 이후로는 와퍼 버거 세트를 주문하는 게 당연해졌다. 배가 덜 고픈 날은 와퍼 주니어 세트를 주문했다.

 

주말에 여행을 가러 아침7시쯤 기숙사를 나섰다. 1분도 아까웠기 때문에 뛰어다녔다. 그러자 경찰차 한 대가 우리를 향해 사이렌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멈춰서 나도 모르게 양팔을 들었다. (미국에선 총기 사용이 허가되어 있기 때문에 경찰 검문을 받게 되면 총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양 손을 다 들어야 한다.)

 

건장한 백인 경찰이 대뜸 ID카드를 보여달라고 했다. 우리가 잘못한 것이라곤 3미터짜리 횡단보도를 횡단한 것이었다. 다행히, 단순 검문이었고 경찰은 금방 사라졌다. 생각해보니 이곳은 경찰차가 자주 다녔다. 아침에 빈민가를 걷다 보면 벗어져 돌돌 말려있는 여자속옷이 많이 보였다.

 

그렇게 살짝 겁 먹은 채로, 놀러 가기 위해 지상전철을 탔을 때였다. 노숙자 같아 보이던 흑인남성이 구걸을 하며 협박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내 눈을 봐! 난 이렇게 불행해! 그러니 50센트씩만 줘!”

 

그리고는 의안을 뽑아 사람들에게 들이밀었다. 처음 보는 의안을 뽑아내는 모습과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 두려워서, 빨리 내리고만 싶었다. 한국인 학생들이 트램으로 단체 이동을 할 때는 항상 마약견과 경찰들이 옆에 붙어있었는데 이 남성이 우릴 위협하며 절규할 때는 보이지 않았다.

 

경계를 넘는 경험을 통해 배운 것

 

교환학생으로 4개월 남짓 지내며, 내가 만난 미국인들은 대체로 친절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유한 지역에 있을 때 그곳 사람들은 친절했다. 역시 자본주의 국가답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불친절한 것은 마트의 점원들도 그랬지만, 어학수업 시간의 교사 캐시도 마찬가지였다. 어학수업은 영어실력 등급을 나누어 운영되었다. 나는 제일 하위 반이었지만, 그 반에서는 우등생이어서 종종 캐시는 다른 친구들의 영어 지도를 내게 맡기곤 했다. 캐시는 학생들이 자기 말을 못 알아들으면 침묵하며 째려봤고, 심지어 그냥 수업을 끝내버리기도 했다. 당시 스물일곱 살이었던 그녀는 힘들다며 우리를 지도한지 한 달 만에 일을 그만뒀다.

 

나를 비롯해 한국에서 온 학생들은 대부분 나이가 어렸다. 한국에서 이렇게 대놓고 무시를 받는 경험은 별로 겪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미국 교환학생으로 오는 한국인 학생들은 대체로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것 같았다. 본인 소유의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친구도 있었다. 그렇지만 미국에 와서 생활하면서 다들 무시당하는 일을 처음부터 약속이라도 한 듯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미국인들에게는 화도 내지 않았다. 분명 선진국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는 것이 있었다. 미국 안에서 미국인만 없으면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느꼈다.

 

▲   헌팅턴 사막공원. 사람들이 불친절해도,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면 행복하다고 느꼈다.   © 조효비


그렇게 교환학생 기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내가 다니는 대학교 안에도 중국인 유학생들이 굉장히 많았다. 내가 교환학생 신분이 되어보기 전에는 그들을 보며, 속으로 ‘쟤네는 유학까지 올 정도면 부자일 텐데 왜 여기로 온 거야?’ 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래도 중국은 우리보다 HOT하지 못하잖아’, ‘중국유학생들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려 다니고 항상 사람들을 경계해’ 하는 마음을 품곤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미국에서 내가 받은 시선과 같았고, 중국인 유학생들은 내가 처했던 상황과 비슷한 입장이었다. 그제서야 그들의 타국살이에 말할 수 없는 차별이나 위축감이 내재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방어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국경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인종과 빈부의 격차를 보고 겪은 것은 나의 정체성을 어떤 부분 단단하게 해주기도 했고, 시야를 넓혀주기도 했다. 특히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감정이나 그들이 정착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혜안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의사들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전두엽의 기능이라고 설명하던데, 나는 경계를 넘는 경험을 통해 편협하지 않게 바라보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경험의 시작은 무모함이나 욕심에서 출발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전보다 건강한 생각과 포용력을 갖게 된 것은 길지 않은 시간에 비하면 내겐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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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8/14 [21:27]  최종편집: ⓒ 일다
 
둥둥 15/08/15 [06:21] 수정 삭제  
  키크고 얼굴 하얀 외국인에게 눌리는 기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더라구요. 재밌게 봤습니다.
MURMUR 15/08/15 [13:13] 수정 삭제  
  저도 이번에 LA에 있는 언니집에 다녀왔습니다. 공교롭게도 관광쇼핑지역에 인접한 주택가였는데요. 1년 넘게 그곳에서 생활한 언니형부는 LA는 사람들이 외국인에게 너무 친절하고 인종차별도 거의 없고 표정도 밝다고 극찬했어요. 하지만 제가 차로 30분도 안 되는 거리에 혼자 다녀올 계획을 세우자 거긴 남부 라티노 지역이라고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말렸어요. 감이 오더군요. 미국이 다 같은 미국이 아니고, LA가 다 같은 LA가 아닌 건 너무 당연합니다. 생각해보니 LA 남부 쪽 도서관, 아카이브, 박물관 좀 둘러볼 생각에 급한대로 네이버 검색 좀 해봤지만, 그 친절한 미국인들이 많다는 해변, 그로브, 헐리웃을 제외한 곳에 다녀왔다는 LA 여행기는 보기 힘들더군요. 가볍게 적어주셨지만 귀한 글 고맙습니다.
닉네임 15/08/20 [09:09] 수정 삭제  
  남아프리카에서 브라질로 갈 때 백인아이들한테 꼼짝 못하던 흑인 스튜어디스가 황인인 우리한테는 함부로 대하던 기억이 납니다.그때는 왜 우리말로라도 싸울 생각을 못했는지.. 좋은 경험 차분한 글 좋네요.
15/08/21 [16:34] 수정 삭제  
  저도 오래전에 보스턴에 간적 있었는데 별로 호의적이지는 않더라고요. 아무래도 영어도 못하고 동양인이니 더 그랬던거 갔습니다. 근데 사실 우리나라가 더 차별이 심한거 같더라고요. 동남아나 중국등에서 온 사람들을 엄청난 편견부터 가지고 상대도 안해주니.. 하지만 호주는 좀 여유로워서 그런지 대부분 친절합니다. 영어 못해도 인내심 가지고 들어주고.. 외국에서 그런 경험하면 우리나라에 있는 외국인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덜덜 19/10/16 [11:44] 수정 삭제  
  캐나다도 마찬가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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