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성애자의 죽음

“강자도 약자도 없는 천국에서 살고 싶다”

박김수진 | 기사입력 2003/05/01 [00:00]

한 동성애자의 죽음

“강자도 약자도 없는 천국에서 살고 싶다”

박김수진 | 입력 : 2003/05/01 [00:00]
지난 4월 26일 오후 3시경 동성애자인권연대(이하 동인련) 회원 윤모씨(19)가 동인련 사무실 문고리에 가방 끈으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단체 대표 정모씨와 사무국장 고모씨가 윤씨의 시신을 발견해 청량리 경찰서에 신고했다. 윤씨는 24일 작성한 다섯 장의 유서와 함께 단체 기부금으로 사용하라며 자신의 전 재산인 34만원을 남겼다. 윤씨의 시신은 4월 28일 인천 화장터에서 화장한 후 납골당에 안치됐다.

윤씨는 2003년 겨울 동인련에 회원으로 가입해 올 해 3월부터 상근을 시작한 인권활동가였다. 가톨릭 신자인 윤씨는 최근 국가인권위원회가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7조 동성애자 인권 침해조항 삭제를 권고한 이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국민일보가 보인 반(Anti)동성애 행각에 항의하며 언론사에 의견을 제보하기도 했다.

윤씨가 남긴 다섯 장의 유서에는 평소 동성애자로서 겪어야만 했던 사회적 편견과 폭력에 분노하고, 이런 편견과 폭력을 부채질하는 보수 종교계와 언론사의 횡포에 죽음으로 맞서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다.

 
윤씨는 “내 한 목숨 죽어서 동성애자 사이트가 유해매체에서 삭제되고 ‘소돔과 고모라’ 운운하는 가식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무언가 깨달음을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나 죽은 게 아깝지 않다”고 밝혔다. 유서 말미에는 “홀가분해요. 죽은 뒤엔 거리낌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죠. ‘윤oo는 동성애자다’라고요…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없고, 그로 인해 고통 받지 않아도 되고.”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아들의 시신을 본 윤씨의 어머니는 “가는 길은 편안해 보이니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청량리 경찰서는 윤씨의 유서를 기자들에게 제공했으며, 각 언론은 성소수자의 인권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리한 취재경쟁을 벌이는 등 유가족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윤씨의 시신을 발견하고 장례 전 과정에 참여한 동인련 사무국장 고모씨는 “윤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언론사의 횡포가 고인의 명복을 빌고 가족들의 요구에 따라 차분하게 치루어 져야 했던 장례식장에까지 이어졌다”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고 사무국장은 “고인의 사생활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경찰서에서 고인의 유서를 공개했다”며 “심지어 한국일보 모 기자는 유서에 담긴 고인의 지인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시도하는 등 비상식적인 작태를 보였다”고 말했다.

동인련은 단체 사이트(outpridekorea.com)를 윤씨의 죽음에 대한 추모사이트로 전환하고, “그가 바라던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동성애자를 낭떠러지로 내모는 동성애 억압적인 사회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는 동성애자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는 하늘나라로 갔지만, 다시는 그 같은 안타까운 죽음이 없도록 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추모게시판에는 “모든 성에 대한 억압이 사라지길 바란다”, “누구나 존중 받는 세상을 만들어 나갈 것을 약속한다” 등의 많은 동성애자들의 메시지가 이어지고 있다. 동인련은 5월 3일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철폐를 바라는 모든 단체와 개인이 함께하는 ‘추모의 밤’을 기획하고 있다.

한편 인권운동사랑방 등 33개 인권단체들은 4월 29일 공동성명서를 발표하고 “윤씨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우리 사회의 편견과 차별이 가져온 사회적 타살”임을 강조했다. 이번 공동성명에 참여한 시민단체들은 고인의 명목을 비는 추모 행사를 함께 추진할 계획이다.

[33개 시민단체 공동성명서 전문]
더 이상 동성애자들을 죽음의 낭떠러지로 내몰지 말라!
-한 동성애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수많은 성적 소수자들을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반성경적이고 반인류적인지…. …죽은 뒤엔 거리낌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죠. 윤○○은 동성애자다라구요.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없고 그로 인해 고통받지도 않아요.” - 고 윤모 씨의 유서 중에서

지난 26일 한 동성애자가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 맞서 싸우다 결국 자살을 선택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는 윤모 씨가 회원으로 소속돼 있던 한 동성애자인권단체 사무실에서 쓸쓸히 자신의 목에다 죽음의 끈을 묶었을 그 순간을 떠올리며, 착잡함과 슬픔을 금할 길 없다. 또한 우리는 윤 씨의 죽음이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을 당연시하고 차별을 조장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한 뼈아픈 각성을 요구하고 있다고 본다. 20살 꽃다운 그의 죽음은 형식적으로는 자살이었는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의 편견과 차별이 가져온 ‘사회적 타살’이었기 때문이다.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된 윤 씨의 곁에는 여러 장의 유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윤 씨의 유서는 동성애자로서 당해야 했던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보여주는 한 동성애자의 애끓는 절규를 담고 있다. 윤 씨는 “수많은 성적 소수자들을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반성경적이고 반인류적인지...”라며 동성애자들을 죄악시하는 우리 사회의 편견에 분노를 토해내고 있다. 윤 씨는 또 “죽은 뒤엔 거리낌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죠. 윤○○은 동성애자다라구요.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없고 그로 인해 고통받지도 않아요”라며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게 된 안타까운 사연을 털어놓고 있다.

나아가 윤 씨는 자신이 속한 동성애자인권단체의 선배들에게 “형, 누나들의 수고가 다음 세대의 동성애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거 잊지 마시구요”라며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 철폐에 계속 힘써 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유서 내용에서 윤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는 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동성애자로서 차별받지 않고 멸시당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은 강렬한 희구를 간직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번 윤 씨의 죽음이 단지 한 동성애자 개인의 죽음일 뿐만 아니라, 차가운 편견과 멸시, 소외와 차별의 빙벽 속에 갇혀 있는 이 땅 동성애자들 모두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에 더더욱 주목한다. 현재 동성애자들을 외로움과 고립감, 절망의 벼랑 끝으로 내모는 편견에 찬 시선과 구조의 폭력이 멈추지 않는 한,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에 내몰리게 될 동성애자들은 끊임없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동성애자들은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멸시와 혐오의 시선으로 인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동성애자임이 밝혀진 후 당하게 될 폭력과 차별에 대한 공포 속에 살아가고 있다. 간신히 용기를 내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힌 경우에도 가족들로부터도 외면당하는 것이 우리 사회 동성애자들의 가슴아픈 현실이다. 더욱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자각하게 되는 청소년기에 대다수 동성애자들은 동성애를 ‘비정상’, '죄악‘으로 치부하는 편견에 부딪혀 더 큰 상처를 입게 된다.

더구나 우리는 간신히 힘겨운 삶을 추스르고 있는 이들 동성애자들을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죄악’ 자체와 동일시하며 그들에게 ‘사회적 사망선고’를 내리고 있는 일부 기독교단체들과 언론의 태도를 바라보면서, 무엇이 더 ‘죄악’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많은 동성애자들이 한두 번 이상씩 자살을 시도해본 경험이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편견과 폭력이 낳은 결과에 다름 아니다. 단지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반인권적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윤 씨와 마찬가지로 절망과 외로움 속에 방황하는 동성애자들, 죽음 이외는 다른 선택이 없다고 절망한 채 손목을 긋고 줄에 목을 매다는 동성애자들이 더 있을지 모른다. 더 이상 윤 씨와 같은 안타까운 죽음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의 죽음이 우리 사회에 던지고 있는 메시지, 그리고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간절히 희구했던 세상이 무엇이었나를 기억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상식’과 ‘사회적 통념’을 가장한 부당한 편견과 차별행위는 동성애자들을 끊임없이 죽음의 낭떠러지로 내모는 범죄행위에 다름 아니다. 우리 모두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의 장막을 거둬내고 이들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반인권적 구조를 해체하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동성애자들은 성적 지향만 다를 뿐, 우리의 형제자매요 이웃이요 존엄성을 가진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것이다.

2003년 4월 29일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노동건강연대/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광주NCC인권위원회, 국제민주연대, 국제앰네스티한국지부, 국제앰네스티한국지부 성적소수자그룹,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다산인권센터, 민주노동당 강남갑 지구당, 민주노동당 중랑갑 지구당,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회진보연대, 새사회연대, 서울퀴어영화제조직위원회, 성동건강복지센터, 안산인권노동센터, 여성해방연대(준), 울산인권운동연대, 인권실천시민연대, 인권운동사랑방, 전북평화와인권연대, KIN(지구촌동포청년연대), 진보네트워크센터, 추모단체연대회의, 평화인권연대, 한국동성애자연합, 한국DPI,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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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홈플러스 2013/04/12 [01:56] 수정 | 삭제
  • 이 기사를 보니 참 가슴이 아프네요.. ㅠ 우리사회가 점점 말세로 가고 있네요 .. 참 진리가 왜곡되고 거짓이 진리가 돠는 세상이네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동성애자들은 죄인 취급해서 나쁘게 보시는데 그 사람의 환경... 상황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는거 같아서 기독교인들에게 실망입니다. 결국 우리 죄인들이 죄인들을 정죄하는 행동은 말이 안되죠.. 말세 때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수 밖에 없겠네요 동성애자분들 힘내세요!
  • 2013/03/03 [16:09] 수정 | 삭제
  • 그것이 한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하다고 어느 교회 목사가 가르치나요? 기독교 참 대단하네요. 그것이 예수님 목숨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기독교라는 게 뭔지 정말.
  • 성희 2010/09/03 [17:42] 수정 | 삭제
  • 현재 보여지는 한명의 희생에 주목하지만 동성애 지지는 다수의 희생이 따르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 라스 2008/11/22 [08:58] 수정 | 삭제
  • 저는, 기독교를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렇게 맹목적이고 극적인 부분은 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기독교.
    참 무서운 종교입니다.

    하지만, 한없이 자애롭기도 한 종교입니다.

    우리나라도 부디 이런 극적이고 배타적인 반응 보다는,
    하나님의 자애로움을 그들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는 종교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게, 저의 작은 바람입니다.
  • Simon J 2008/10/08 [07:51] 수정 | 삭제
  • 이땅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건 알지만... 살아서 이겨내야 의미가 있는 것이죠. 무지한 기독교나 일반인들의 편견에 이겨내시길~
  • 2008/10/08 [04:22] 수정 | 삭제
  • 이들을 다로 분리해서 다른 시선으로 보는건 한국밖에 없어요.
  • 폴라리스 2003/05/02 [02:12] 수정 | 삭제
  • 종교란 원래 사람들 좋으라고 믿는 거 아닌가요?
    신은 사람에게 좋은 존재 아닌가요?
    이런 때 보면 무서워요.
  • 마야 2003/05/01 [22:26] 수정 | 삭제
  • 꽃다운 젊은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나를 포함한 이 사회가
    참으로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정말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슬픕니다
  • 나도 2003/05/01 [20:18] 수정 | 삭제
  • 강자도 약자도 없는 천국
    천국엔 정말 강자도 약자도 없을까?
    그렇다면 나도 가고 싶다
  • 동성애자 2003/05/01 [14:51] 수정 | 삭제
  • 울었어요...
    너무 마음이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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