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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이름의 무게
<초딩아들, 영어보다 성교육> 14. 엄마로서 글쓰기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김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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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키우는 엄마’가 쓰는 초등학생 성교육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필자 김서화 씨는 초딩아들의 정신세계와 생태를 관찰, 탐구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편집자 주]

 

엄마부대에게 냉소를 보내기는 쉽다

 

“김제동이 장가는 다 갔다”, “누가 제동이에게 딸을 주겠는가.”

 

한 방송인의 퇴출을 요구하며 하얀 소복까지 꺼내 입으신 그녀들, 엄마부대봉사단. 비혼 남성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둘째고, 아직도 딸을 ‘준다’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내 기준에서는 참으로 2015년스럽지 못하다. 물론 캐나다도 아니고 한국의 2015년은 그러한 것이라고 한다면 딱히 반론도 못하겠지만. 엄마부대의 행동은 여러모로 촌극 같았기에(하물며 퇴출시키라는 방송인의 이름도 틀리게 적었다) 그녀들에게 냉소를 보내기는 쉬웠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대세가 된 것만 같다. 엄마라는 단어는 이곳저곳에서 숱하게 등장한다. 실제 그녀들의 역할이 수만 가지이다 보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생산, 소비, 노동, 교육, 사회변혁 등등. 엄마 이름 안 붙을 곳이 없다. 이 시대가 진정 엄마를 요청하나 보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 시대적 개성을 가득 담은 엄마에 대한 다양한 명명도 얻게 되었다. 촛불시위를 이끌던 유모차부대, 지금의 엄마부대봉사단, 그리고 엄마에 대한 가장 경멸적 명명인 ‘맘충’까지.

 

엄마라는 단어를 둘러싼 이런 말들의 오르내림이 격한 것처럼, 나에게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는 생각했던 것보다 늘 더 무겁거나 반대로 과하게 가벼웠다. 숨고를 틈도 없이 사투 중이다. ‘사투’라는 단 두 음절 사이의 거리는 넘치는 감정과 일상의 반복적인 노동과 예측할 수 있으면서도 또한 예측할 수 없는 사회적 시선을 담기에 너무 비좁지만, 그 이상의 단어를 마땅히 찾지는 못하겠다. 여전히 엄마라는 이름은 내 의지를 훨씬 넘어선 곳에 있다.

 

아이러니다. 나는 지금 엄마라는 이름 아래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라는 위치에서, 첫째아이를 아들로 소환하여, 하물며 성을 ‘교육’의 자장 안에 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도 시대적 요청이라고 해둘까. 엄마표 놀이교육, 영어교육, 수학교육, 책육아… 뭐든 엄마만이 미래 세대의 책임자인 것 같은 문구들이 지천이니 말이다.

 

초딩+아들+성교육, 이 세 단어의 조합은 한국 사회의 불평등한 젠더 관계나 지나칠 정도로 빈번한 성폭력 상황들, 편견과 왜곡이 심한 성인식을 재고할 유용한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틀은 나를 가장 고통스러운 곳으로 내몬다. 엄마라는 화자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말이다. 나는 스스로 할 수 없는 틀을 만들고, 쓸 수 없는 내용을 써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엄마라는 이름은 어두운 터널 같다

 

이미 십 여 년도 훌쩍 지난 일이다. 1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산업도로의 긴 터널 속을 자전거를 타고 들어갔던 적이 있다. 터널 안은 모든 것이 상상 이상이었다. 온도 조절이 불가능한 대형 한증막 같았고, 대형트럭들은 지나가며 먼지를 더했다. 오고가는 차량이 내는 소리는 터널 벽을 타고 증폭되었기 때문에 내 고막을 비롯해 내장까지도 찢어놓을 기세로 한 번씩 휘감고 갔다.

 

분명 고산지대 히말라야가 아니라 터널 안이었는데, 숨쉬기 위한 산소량은 그보다 못한 듯했다. 그나마 히말라야라면 공기라도 청정했을 텐데. 요새처럼 조명이 많이 달려있지도 않았다. 호흡곤란으로 죽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한걸음이라도 더 옮겨 여길 벗어나자 할 때, 불빛이 보였다. 이제 숨 쉴 수 있어.

 

겨우 불빛 아래 도착했는데 그곳은 터널의 끝이 아니라 정확히 한 가운데, 중간지점을 표시하는 불빛이었다. 아! 여전히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고 또 그만큼 남은 앞을 보고, 다시 뒤를 보고, 또 그만큼의 앞을 보고. 무식하게도 진퇴양난을 몸으로 배운 날. 나는 이미 이 터널 안 산소를 다 소진한 것만 같은데. 살려면 호흡곤란 상태로 버틴 만큼 더 버텨야한다는 현실.

 

 ©출처: 박영숙 사진집 <미친년 프로젝트>(눈빛, 2005) 중에서

나는 엄마라는 이름의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다. 아직은 진퇴양난, 아니 반도 안 왔는지도 모르지. 아니다, 항상 그 한가운데 있는 기분이다.

 

그때 터널을 지나고 나서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엄마라는 이름도 지나고 나면 그 터널처럼 버려버릴 이름이었으면 싶다. 이렇게 말했다고 나의 행·불행을 점칠 필요는 없다. 10여 년 전 터널 속에서 불행해 죽겠네,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한 숨 한 숨 해결하려고 한 걸음 한 걸음 완수하려고 고민한 기억밖에 없다. 진퇴양난에 빠져봐야 진짜 고민이 시작되는 법이다. 행불행은 막상 터널을 지나고 터널 속을 회상할 때 들이닥쳤지.

 

내가 궁금한 목소리는 엄마라는 터널 속에서 숨가빠하는 이들의 말이다. 그러나 들을 수 있는 말은 이미 터널을 다 통과한, 그 중에서도 선택적으로 운이 좋은 몇몇에 불과했다. 일명 ‘서울대 엄마’, ‘하버드 엄마’류 말이다. 자식을 서울대까지 보내서 독립시켜 놓고도 ‘OO엄마’라는 이름을 붙이고 다니는 것은 호흡곤란 속에 고민하는 것보다 정말 더 나을까? 누구에게 나을까? 터널의 경험을 이야기할 권한은 모두에게 있지 않다. 선택의 기준에 ‘엄마의 자격’이라는 규범이 있다.

 

자식의 모든 문제는 엄마탓

 

처음 아들에게 성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성폭력 가해자 부모들의 태도, 특히 엄마들의 복잡한 태도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복잡한 심경은 대개는 좋지 않은 결과들을 낳는다. 가장 대표적인 유형은 피해자를 타격하는 것.

 

우리 사회에서 엄마는 자식과 독립적인 개인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 자식이 잘했을 때 못했을 때, 자식의 일거수일투족에 강박적으로 엮여들어가는 일을 제어할 권한이 없다. 자식이 훌륭히 자랐다면 그녀의 터널 경험은 얼마든지 미화될 수 있다. 반대로 자식이 세속적 기준에서 성공하지 못했거나, 하물며 범죄자, 성범죄자라도 된다면 그녀의 경험은 가장 안 좋은 방식으로 왜곡되거나 아예 터널의 경험조차 잃어버릴 수도 있다.

 

모든 자식의 사건사고 앞에서 엄마들의 불안한 태도는 이런 것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아이의 일들은 엄마에게는 우연의 산물일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로서 지내온 모든 경험을 재심받게 될 위기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일명 모든 자식 문제는 엄마탓.

 

이는 젠더 문제다. 사회 생활하는 남성들에게서 아빠의 지표를 찾으려하거나, 그 자식의 잘못을 그의 공적 생활에 연루시키는 경우는 흔치 않다. 자식양육, 가사살림 등을 여성의 일로 한정해온 이데올로기의 전형이다. 유사한 활동을 하는데도 엄마부대봉사단과 어버이연합이 하는 말의 뉘앙스가 다르다. 한쪽은 양육자처럼 말하고, 다른 한쪽은 그저 윗세대 조언자처럼 말한다.

 

엄마로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처음 우려한 것은 이것이었다. 혹여 자녀들의 성적 사안들까지도 엄마탓으로 할 빌미를 주지는 않을까. 가해자들은 정말 엄마들이 잘못 가르쳐 가해자가 되었나. 언론들은 이런 전제 하에 매번 가해자의 가정환경부터 뒤지지만, 그건 그들이 분석하지 않으려 하는 게으름의 결과다.

 

엄마들이 아들 성교육 안 시켜서 남자들의 성인식이 형편없다고? 그 생각이 가장 형편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 엄마가 성교육 잘 시킨다고 아들이 정말 성평등한 인식을 가지게 될 일도 아니다. 내가 살아온 경험만 보아도, 가족보다는 사회로부터 배우는 것이 더 많은 법이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은 이를 부인하려하지만.

 

터널 안에서 말하기

 

아들 키우는 ‘엄마’로서 글을 쓰는 것은 다른 엄마들에게 어떤 책임감이나 의무를 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엄마들이 가진 통념이나 오해, 성폭력 사건들에 대한 무지, 그리고 바로 엄마로 사는 우리들의 삶을 동일한 위치에서 이야기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떤 위치? 터널 밖이 아닌 터널 안에서, 숨쉬기 힘들더라도. 터널 안이라면 오히려 ‘엄마의 자격’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어차피 나가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선택적이고, 그 선택의 기준이 바로 ‘엄마의 자격’이었을 테니 말이다.

 

엄마부대봉사단을 보면서 멈칫한 이유는 막상 그녀들에게 있지 않았다. 엄마부대를 비판하는 손쉬운 방식들. ‘나는 저런 엄마 없다’, ‘당신들도 엄마냐’, ‘엄마라는 단어 사용할 자격도 없다.’ 바로 이런 말들 때문이었다.

 

공적 공간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여성들에게 거리낌 없이 ‘맘충’이라는 경멸적 단어를 붙이는 이들도 ‘저것도 엄마냐’ 하는 말을 달고 산다. 사람들은 자꾸 그녀들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기술하며 맞다, 아니다 타진하려 하지만 의미 없는 짓이다. 촛불시위 때 거리로 나온 유모차부대 엄마들에게 우익단체는 아동학대죄를 운운하며 ‘너희들은 엄마도 아니다’라고 했다. 각기 다른 엄마를 지칭하는 말들 사이를 공전하는 논리는 대개 하나다. 엄마의 자격.

 

아마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명명될 모든 것들 사이를 공전할 그 논리를 무력화시키려면 그 기준을 통과하기 전에 해야 하지 않을까. 터널 속 조건이 어떤지 실컷 지껄여 줘야 한다. 운 좋았던 누군가를 미화시키는 것에 현혹되지 않고, 터널 밖으로 나가 간택되기를 고대하지 않고, 어두워도 여기서 한 숨 한 숨 고르면서 쓰자 마음먹는다.

 

사실 내가 터널 속에서 진퇴양난, 호흡곤란의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아들에게 전할 것이 생각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터널 자체가 성차별적 상황이라고밖에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들 성교육은 별수 없이 나의 삶과 너무도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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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1/25 [14:55]  최종편집: ⓒ 일다
 
설구교 15/11/26 [08:56] 수정 삭제  
  독립적 개인이 되어야죠. 나부터라도..
ㅇㅇ 15/11/26 [15:42] 수정 삭제  
  인간이란 이름은 평범한 이름, 엄마라는 이름은 지독한 이름!!
15/11/28 [14:12] 수정 삭제  
  엄마라는 단어속에 갇혀있는 이미지를 거두고 싶네요
아이둘 15/12/31 [12:59] 수정 삭제  
  울면서 긴 터널을 걸어왔어요. 이제 바깥 세상도 보이고 빛도 느껴지지만 '밖의 길'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야 할 길, 언제까지고 걷다보면 터널천장이 유리처럼 혹은 그물망이 되어 나의 비를 막아주기도, 나를 조이기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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