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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과 바닥’에선 세상이 다르게 보여
<노년여성의 경험을 잇다>3. 도시의 독거노인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최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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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년여성들이 살아온 생의 이야기와 다양한 경험이 역사 속에 그냥 묻히지 않고 사회와 소통하며 다음 세대와 교류할 수 있도록, 노년여성을 만나 인터뷰해 온 여성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내 직업은 독거노인 생활관리사

 

▶ 나는 내가 사는 기초자치구의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다. ⓒ최현숙

“몸이 안 좋아서 못 간다고 하면, 오라는 연락을 점점 안 해. 힘들어도 갈 거야.”

 

지난 주 당신 방에 둘만 앉았다가 정란희(가명, 87세) 여성노인이 내놓은 말이다. 남기고 남 주고 할 거 없이, 그 말을 혼자 다 들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나 들으라고 작정하고 내놓은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좁아터진 방에 바짝 마주 앉아 대놓고!? 참 대단한 양반이다.

 

나 만난 첫날, “나는 글씨를 몰라요” 라며 가장 중요한 정보 삼아 공지하신 양반이다. 앞으로 내내 글씨 관련 일은 알아서 하라는 말이다. 동네 독거노인들 여남은 명이 둘러앉은 자리에서였다. 그 결에 두 분이 더 커밍아웃을 했다.

 

저 연락 관련 사연인즉슨 이렇다. 정란희 씨는 지난 겨울 돌아가시나 싶었다. 당신 말로도 ‘이번엔 죽으려나 보다’ 했다. 그 겨울 동안은 독거노인센터에서 모이는 프로그램이나 나들이, 외식 초대에는 연락을 안했다. 대신 자주 전화하고 방문하면서, 반찬과 도시락을 보내드리는 일 등은 가능하면 연결했던 거다.

 

올해 4월 들어서며 몸이 나아졌지만 작년과는 많이 달랐다. 5월 어버이 날 행사에 정란희 씨를 초대했다. 날씨만 좋았다면 별일 없었을 텐데, 하필 그날따라 비바람이 몰아치고 추웠다. 행사장을 들어서는 노인은 온몸을 달달달달 떨고 있었다. 추워서도 그랬지만 비바람에 몸을 지탱하기 힘들어서다. 손에 든 긴 우산은 비를 막는 게 아니라 지팡이로 쓰고 있었다. 작고 마른 몸에 우산까지 썼다면, 거센 비바람을 못 이겨 쓰러질 판이었다.

 

사실 그날 아침 ‘못 오셔도 된다’고 연락을 했었다. ‘그걸 왜 못가냐?’며 ‘이따 보자’시는 거였다. 나는 다른 준비들을 하느라 모시러 갈 수는 없었다. 돌아가시는 길에는 인근 노인들 네 분과 함께 가시도록 택시를 잡아드렸다. 다음 만날 날, 정란희 씨는 내가 기사에게 넣어준 택시비를 극구 돌려주셨다. 잠깐이라도 집에 들르면 뭐라도 내놓는 양반이다. 반찬이고 후원물품이고도 그 김에 얼굴이나 보자며 가져 오라시는 분이다.

 

“탈이라도 나실까봐 걱정이 돼서 그러죠.”
사과 삼아, 핑계 아닌 사실을 말했다.

 

“놀러가다 죽으면 젤 좋지 멀. 산 귀신이 뻘떡 일어나서 죽은 귀신한테 한 턱 낼 거야.”
눈을 마주치고 둘이 껄껄 웃었다. 내 직업이 독거노인 생활‘관리’사인데, 이 양반은 노인복지의 ‘관리’ 바깥에 있겠다는 거다.

 

밥벌이이자 생활이고 글이며 운동인 현장

 

2008년 앞뒤에 시작된 진보정치의 혼돈 속에서, 나는 정당과 운동 바깥의 일과 활동을 찾아 나섰다. 밥벌이와 함께 운동(movement)과 운동(sports)을 하며, 당시 52세때 뿐 아니라 이후 십여 년 혹은 죽음 가까이까지 계속 있을 수 있는 현장이면 좋겠다 싶었다.

 

내가 요양보호사가 되고, 노인 구술생애사를 쓰게 된 과정은 2013년 <일다>에 실려 있다. (여성노인 구술사 기록하는 ‘요양보호사’) 그 후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는 싸움과 노동조합 활동 등으로, 요양업계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2013년 가을, <워크넷>을 통해 내가 사는 기초자치구의 독거노인 생활관리사가 되었다.

 

서비스 이용자인 노인들이나, 서비스 제공자인 생활관리사들의 상황과 임금 조건 등은 요양 현장과 비슷하다. 내가 만나는 노인들은 아직 노인장기요양제도의 돌봄 서비스를 받을 단계까지는 가지 않은, ‘혼자 끓여먹고, 혼자 움직일 수 있는’ 건강 상태다. 내 편에서 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노동이나 복지라는 이슈보다는 생애사와 관계를 중심으로 중하위 계층의 중장년 여성들과 독거노인들을 만나고 있다는 점이다.

 

▶ 내가 담당하는 지역의 31명의 독거노인들 중에서 25명이 여성이다.   ⓒ 최현숙

 

현재 내가 담당하는 지역의 31명의 독거노인들 중에서 25명이 여성이다. 또 내가 속한 독거노인센터에는 50명의 생활관리사 중에서 절대 다수인 48명이 여성이다. 우리 구에 거주하는 독거노인 중에서 1천5백명 정도를 우리 독거노인센터에서 ‘관리’한다. 가족관계와 사회관계, 경제 수준, 건강 등을 참고해서 상대적으로 어려운 분들을 선정한다. 그러다보니 대체로 빈곤한 독거노인들이다.

 

혼자 산다고 해서 반드시 가족 관계가 단절된 것은 아니다. ‘현재 혼자 거주하는 노인’이 독거노인의 기준이다. 생활관리사나 센터, 구청과 보건복지부가 염려하는 최고의 사고는 시신이 뒤늦게 발견되는 노인 고독사나 자살이다.

 

한세상 이야기, 여성노인 구술생애사

 

독거노인들과 만나서 하는 무엇이든지가 내 밥벌이(1일 5시간, 최저임금 근로계약)이자, 생활이고, 글의 현장이다. 나는 글과 관계를 통해 운동(movement)과 만나고자 한다. 따로 운동(sports)할 시간 낼 마음은 없고, 그들을 만나러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과 출퇴근길이 정기적이고 거의 유일한 운동이다.

 

업무 외에 가장 주력하는 바는 여성노인들과 함께 하는 구술생애사 작업이다. 남성노인들은 숫자도 적지만, 구술생애사 식의 관계 맺기와 드러내기를 수락하는 경우가 드물다.

 

내가 구술생애사의 주인공으로 욕심내는 사람은, 각별한 사건을 겪은 당사자나 각별한 생애를 산 사람이 아니다. 누구나 한세상을 살다 가듯, 누구에게서나 한세상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우선 중요하게 보는 것은, 나와의 친분이나 신뢰 관계가 이미 만들어져 있는가이다. 아직 관계가 얕은 분 중에서 욕심나는 사람이 생기면, 길게 보고 슬슬 옆구리를 찔러가며 관계를 만든다. 그러다보니 내 주인공들은 대체로 2년 이상은 나와 관계를 이어온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깊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거나, 구술생애사의 목적에 대한 이해 차이로 중간에 그만두게 될 염려가 있다.

 

가능하면 깊은 만남과 대화를 통해 이분들이 꺼내놓는 생애사와 현재를 듣고 관찰하고 공감하며, 이를 기록하고 해석하여 공유하는 일이 내 구술생애사의 과정이다.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로 밥벌이를 바꾼 2013년부터 독거노인들과의 구술생애사 작업을 지속하고 있고, 생애사 내용을 원재료로 삼아 르포 형식의 다른 글쓰기들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보다 집중적인 만남과 글쓰기 작업을 위해, 담당하는 독거노인들의 거주지 인근으로 이사했다.

 

▶ 독거노인들과 만나서 하는 무엇이든지가 내 밥벌이이자, 생활이고, 글의 현장이다.  ⓒ최현숙

 

미리 만나는 위안, ‘그럭저럭 살아지겠구나’

 

노인을 ‘문제 집단’으로만 보는 사회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노년을 불안해한다. 그리고 이는 현재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진다. 빈곤과 독거까지 겹친 노인은 불안을 넘어 두려움까지 갖게 한다. 두려움은 혐오의 뒷면이다. 섣부른 동정과 시혜 또한 혐오와 차별의 이면(裏面)이다.

 

만 59세의 독거여성이자 예비노인이며 부자가 아닌 나는, 독거노인들과 가까이 지내며 ‘저 나이에 저 상황이 되어도 그럭저럭 살아지겠구나’ 하는 안심이 온다. 미리 만나는 위안이다. 내 남은 삶이 지금 만나는 노인들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 수 있는지를 상상하고 계획한다. 문득 죽음이 와버린다면 “산 귀신이 뻘떡 일어나서 죽은 귀신한테 한 턱 낼” 일이다. 죽음이라는 끝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는 존재들의 근본적 위안이기도 하다. 시체가 썩는 고독사에 대한 불안도, 죽음이나 시신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더 살 사람들을 위한 걱정에서다.

 

“뉴스에 나오는 거처럼 혼자 죽어 썩고 나서 발견되는 거는 안 당해야할 텐데. 밉든 곱든 자식한테 그 꼴을 당하게 할 순 없잖아. 죽은 나야 멀 알겠어? 내가 계속 전화 안 받으면 얼른 와서 나 좀 디리다 봐요. 나한테 젤로 자주 전화해 주는 사람은 최 선생이니까. (…) 요즘은 수급자랑 혼자 죽은 사람한테랑은 정부에서 장례비도 주구 화장도 치러 주구 한다더만. 없이 사는 노인들이 그걸 아주 큰 다행으로 여기더라구.”

 

“언젠가부터 밤에 잘 때도 문을 안 잠궈. 왜는 머가 왜야? 자다가 죽는지도 모르게 혼자 죽을 수도 있다 이거지. 그런다면야 최고 복이지. 그러니 밖에서 불러서 대답 없으면 방문 좀 밀어보고 가. 죽어서 오래도록 썩는 거는 막아얄 거 아냐, 하하하. 이 집에도 피해고 치울 사람들한테도 피해잖아.”

 

‘여성’과 ‘노인’이 이분들에게 불가항력의 조건이라면 ‘독거’는 밀려난 조건이자 선택이기도 하고, ‘빈곤’은 밀려나고 또 밀려난 조건이다. 다른 욕망은 사는 동안 차차 포기했고, 그러느니 차라리 삭제했다. 밀려나고 포기하고 삭제한 ‘다른 입장’에서는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빈곤은 가난의 정도와 상태가 아니라 가난에 대한 태도이자 느낌이다. 더한 빈곤에도 속 편하고 당당하게 사는 노인들이 있다. 온갖 고생 다 해봤고 죽을 날도 멀지 않았는데, 대체 뭐가 두렵냐는 거다. 독거 역시 오히려 자유롭단다.

 

▶ 밀려나고 포기하고 삭제한 ‘다른 입장’에서는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최현숙

 

‘바깥과 바닥’에 사는 노인들의 역설과 해학

 

생활관리사로든 구술생애사 작가로든 내가 만나는 독거노인‘류’에 대한 사회의 고정관념이나 일반화에서 벗어나는 것이, 내 관찰과 질문의 시작이다. 그러면서도 ‘바깥과 바닥’에 사는 사람들의 역설과 해학에 뒤통수를 맞듯 놀라기도 한다. 그들의 생각은 담론이 만들어놓은 ‘정상’ 이데올로기의 경계를 되는대로 들락거린다. 모성애나 혈육의 정 또한 삶의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엎치락뒤치락 재구성된다.

 

“불효소송인가 하는 그 방송 봤지? 그거 보니까 아주 재밌더라구, 하하하. 만고에 내가 젤로 속편하다는 생각이 들어. 달라는 놈이 있기를 해, 보채는 년이 있기를 해? 줄 것도 없고 뺏길 것도 없어. 기왕 연락이 끊긴 거, 자식하고도 차라리 안보고 사는 게 신간이 편해…. 자식들한테 연락이 오면 (국민기초)수급 짤릴까 봐 오히려 겁난다니까. 없는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어. 있는 놈들은 있어서 불효소송이니 머니 지랄들이고, 없는 년들은 없어서 또 부모 자식 간에 멀어지고. 그런 세상이 돼 버렸어.”

 

제일 큰 문제 집단이라는 ‘빈곤한 여성독거노인’ 중 많은 사람들은, 누가 심난해하거나 말거나 지금이 젤로 편하고 행복하단다. 보증금 없는 20만원 월세에 공동화장실 쓰는 쪽방에 사는 이말자씨(가명, 86세)는 그중에서도 단연 갑이다.

 

“나는 결혼 전이나 후나 평생 내 손으로 식구들 먹여 살려야 하는 팔자였어. 지금이 외려 젤 편해. 허리 아프네 무릎 아프네 해도 지금이 젤 행복해. 옛날에는 저녁 때우면 아침 걱정, 아침 때우면 저녁 걱정, 그걸루 세월을 다 보낸 거야. 근데 지금은 쌀 떨어질만 하면 어디서든 줘. 굶게 생겼는데도 안주면 달라고 하면 되지 멀, 하하하… 아무리 늙구 없이 살아도 무릎하고 틀니만 있으면 살만 해. 어디서 머 먹으러 오라 그러면, 틀니 끼고 나가야 할 거잖아. 무릎 더 망가지면 집으로 가져오라 그러지 멀.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살구, 내 꺼 없으면 남의 껄루 살면 돼, 하하하.”

 

평등이니 복지니 미세먼지는 길게 살아야할 니네들의 문제란다. 그러니 니네들이 알아서 지지구 볶구 싸우든가 하란다. 가난하게만 산 나는 무죄란다.

 

“아니 세상에 말이야, 물까지 사먹고 숨도 맘대로 못 쉬게 천날 만날 미세먼지 어쩌구 하는 세상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어? 이런 놈의 세상, 떠날 날이 얼마 안남은 게 얼마나 큰 다행인지 몰라. 나는 없는 집에 태어나서 평생을 못 먹고 못 쓰다가 가는 사람이야. 환경이니 머니 그런 거는 난 아무 책임이 없어. 지금도 나는 지네들이 종일 버린 거, 새벽마다 나가서 쓰레질을 해주고 20만원 받아 사는 사람이야.”

 

더 가져놓고도 우울증에 빠진 노인도 있다. 84세의 이금자(가명) 씨는 연립주택 보증금 8천만 원에 통장에도 수천은 들어있는 눈치다. 남편의 춤바람과 바람기로 갈라서면서, 평생 모아 산 아파트를 팔아 돈을 나눴다. 용서해달라며 기어들어올 걸로 생각했던 쟤들 아버지가 자기 몫의 돈을 다 쓰고 죽어버린 거랑, 아들에게 물려 줄 아파트를 처분하고 돈이 흐트러져버린 게 가장 큰 상처이자 우울과 자살충동과 악몽의 원인이다. 바득바득 아끼기만 하는 버릇은, 본인도 자식들도 지긋지긋해 하는 어쩔 수 없는 습관이다. 인터뷰가 끝난 저녁 8시 너머까지 어둡다 어둡다 하면서도 결국 형광등을 켜지 않았다.

 

“그 집을 아들한테 못 물려준 게 젤 후회가 돼. 이 보증금이라도 까먹지 말아야지. (…) 지네들 소원이 엄마가 편하게 돈 쓰는 거 좀 보는 거라면서, 월세로 돌리고 돈을 쓰래는 거야. 내가 이렇게 구차하게 살다 가면 지네들은 어떡하냐고, 제발 좀 먹고 싶은 거 먹고, 쓰고 싶은 거 쓰고, 그러래. 궁상 좀 떨지 말라고 맨날 화를 낸다니까. (…) 겨란이라는 거를 내가 여태 나 먹자고 내 손으로 사먹어 보지를 못했어. 미련 떠는 거야 그게. 알아. 알면서도 못 고쳐. 저기 임대아파트 살다 간 노인네 있잖아. 위암 걸려서 먹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혼자 누웠으니까, 옛날에 먹고 싶어도 돈 아까워서 못 먹은 음식들이 줄줄이 떠올라서 혼자 눈물이 줄줄 나더래. 내가 결국 그 꼴루 죽을 거야. 그래도 못써. 평생 버릇은 못 고쳐요.”

 

▶ 한편으론 ‘참 좋은 세대가 멸종되는 구나’ 싶다.   ⓒ 최현숙

 

한편으론 ‘참 좋은 세대가 멸종되는 구나’ 싶기도 하다. 독거노인이 뉴스에 오르려면 고독사나 자살 정도는 돼야 하는 반면, 많은 여성독거노인들은 도시 골목에서도 그들 세대의 오손도손과 십시일반을 어떻게든 꾸려 나간다. 없는 중에도 불러서 나눠먹고, 아픈 노인에게 죽을 쒀서 쩔뚝거리며 들고 가고, 꼬박꼬박 경로당에 모여 점당 십 원 민화투를 치다 국수를 삶아 먹고, 문득 공원에 모여 양푼에 열무김치 비빔밥을 치대 먹으며, 재수 좋게 옆을 지나던 나를 극구 불러 앉힌다.

 

팔자타령 대신, 내가 찾아봐야 하는 과제는

 

지금이 젤로 행복하다는 이말자씨의 똥배짱과 호기에 속이 시원하더라도, 돈 못 쓰는 이금자씨의 우울과 지긋지긋한 절약에 가타부타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더라도, 나는 또 나대로 정란이씨니 이말자씨니 이금자씨가 도대체 왜 하나같이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를 찍었는지, 그걸 좀 이해를 해봐야 사는 사람이다. 내가 그녀들 속에 들어가 생애구술사를 듣고 묻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여성/독거/빈곤/노인과 뒤엉켜진 생애 동안의 상처, 혼인상태 여부(결혼/이혼/비혼), 못 배움, 출신, 개인의 성격, 사회사의 영향, 노동의 내력, 이주의 내력, 몸과 마음의 질병 내력, 정치적 보수화 등의 연결고리가 나는 궁금한 거다. 그들의 팔자타령에 대해, 나는 재수니 팔자 말고 다른 설명을 찾아봐야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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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6/25 [14:55]  최종편집: ⓒ 일다
 
16/06/27 [12:07] 수정 삭제  
  필자와 할머니들의 걸쭉한 입담을 떠올리며 재밌게 읽었습니다. 이렇게들 살아가시고 있군요. 어느 생에나 희로애락은 공평한가봐요^^
Azi 16/06/27 [18:37] 수정 삭제  
  정말 혼을 쏙 빼놓는 얘기들... 연재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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