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삶의 물질적 배경의 문제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따뜻한 밥이 뭘까?

김혜련 | 기사입력 2016/10/19 [00:50]

‘밥’은 삶의 물질적 배경의 문제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따뜻한 밥이 뭘까?

김혜련 | 입력 : 2016/10/19 [00:50]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편집자 주

 

타인들의 밥 이야기를 보며

 

▶ 정끝별의 밥시 이야기 <밥>(마음의 숲, 2007)

나는 타인들의 밥이 궁금했다. 도서관에서 밥에 대한 이런저런 글을 찾아 읽다가 정끝별 시인이 엮은 <밥-정끝별의 밥시이야기>를 만났다. 서두의 밥에 대한 추억을 읽는데 갑자기 가슴에 통증 같은 게 왔다. “이게 뭐지?” 거의 동물적인 질투, 즉물적 부러움이었다. 이런저런 밥의 추억과 그리움에 관한 글들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내 안의 심리적 저지선이 ‘툭’ 하고 무너지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어릴 적을 뒤적이다 보면 먹거리와 관련된 추억들이 제일 많다. (…) 엄마는 손도 크고 손맛도 좋았다. (…) 집안 대소사가 다가오면 며칠 전부터 엄마는 돼지고기를 삶고, 쇠고기를 누르고, 홍어를 삭히고, 김부각을 말리고, 술을 내리고, 산자를 튀기고, 약과를 모양내고, 오꼬시를 굳히고, 식혜를 끓이고, 수정과를 거르고, 떡을 빚고, 떡시루를 앉히고, 약식을 누르고, 찰밥을 찌고, 뒷마당에 가마솥뚜껑을 괴고는 가지가지 부꾸미와 부치미와 지짐이를 하고 잡채를 무치고, 죽상어와 조기를 찌곤 하셨다.”

 

그가 나열한 다양한 먹을 것들. ‘고소하고, 기름지고, 찰지고 달고, 오돌오돌, 바삭바삭, 쫀득쫀득, 따끈따끈…’ 그런 음식들 앞에서 ‘그것을 만드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여자들이 집안 대소사나 명절에 하는 과중한 노동…’ 그런저런 생각이 작동하지 않았다.

 

그저 부러웠다. 먹어본 적 없는, 먹을 것의 다채로움 앞에서, 어린 시절 맛본 풍요로운 음식이 일상의 맛, 삶의 풍요로움일 수 있겠구나, 짐작하며 통증처럼 내 삶의 빈곤이 보였다.

 

“쌀이 끓어오르고 부푸는 동안, 밥솥이 칙칙칙 가쁜 숨을 토해내는 동안, 우리들의 허기도 따숩게 익어 갔던가. 하여 밥 냄새가 솔솔 퍼지기 시작하면 나지막한 그리움처럼 차오르는 잘 익은 허기가 집안을 가득 부풀게 했던가. 그 밥 냄새에 밥 먹어라 부르는 소리가 얹히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저녁의 힘이 솟아났던가. 특별할 것도 없는 그런 흥성스럽고 아늑한 저녁이 있었던가. 그런 저녁이 어린 나를 살찌우게 했던가. 갖은 먹거리의 재료들 속에서, 그 재료들이 맛갈진 음식이 되는 동안, 어린 내 영혼은 오래오래 함포고복(含哺鼓腹)했으리라.”

 

내 밥엔 그리움이 없다, 추억이 없다. 아니 내 밥의 추억엔 불안과 눈치, 이따금씩 밥 먹다 얻어맞는 매와 부끄러움이 있다.

 

처음으로 내 영혼의 허기는 단지 영혼의 허기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밥의 허기,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저녁의 힘’, ‘특별할 것도 없는 아늑한 저녁’의 부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특별할 것도 없는 아늑한 저녁  ⓒ김혜련

 

따뜻한 밥의 부재는 단지 밥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삶의 물질적 배경 같은 거였다. 삶을 떠올릴 때 저절로 아늑하고 포근해지는 근원적 배경. 그런 배경이 없는 자의 삶의 황폐함이 그의 밥 글에 비춰졌다. 

 

따뜻하고 아늑한 밥의 기억이 없는 사람의 영혼이 어찌 따뜻할 수가 있을까. 더구나 충만할 수 있을까. 자신이 먹는 밥에서 스스로 소중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소중히 여길 것인가.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볼 것이며 타인의 소중함을 알 것인가. 아무리 관념적으로 스스로를 귀하게 여긴다한들 그것이 구체적인 일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 관념이 나를 이루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평생 느껴왔던 삶의 허기, 고아 의식은 단지 심리적인 것이 아니구나. 그건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이었구나. 삶의 허기를 극복하고 싶다면, 내 밥의 허기를 알고 그것으로부터 먼저 벗어나야 하는 거구나. 

 

이 사실을 난 왜 이제야 깨우치고 있나. 온갖 정신의 세계, 마음의 세계를 찾아 헤맸지 구체적인 것에서 찾을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하다니. 스스로에게 따뜻한 밥을 해 먹일 생각을 결코 해 본 적이 없다니…. 

 

많은 경우, 깨달음은 허망하다. 그 깨달음의 내용이 지극히 당연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당연한 것을 아는 데 반평생이 걸리다니, 제대로 못 먹어 허기진 사람을 제대로 먹일 생각을 해보지 못하다니… 허망했다.

 

만약 이 사회가 밥을 중요하게 취급했더라면…

 

그런데 왜 이제야 ‘밥의 세계’가 보이는 걸까? 오십 평생 자신을 찾아 헤맸고, 그 결과 ‘나는 안 되는 인간이구나’ 절망하고 난 뒤에야 밥의 세계가 보이는 걸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밥에 대한 경멸 때문일 것이다. 난 밥 먹는 것이 노역(勞役)이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 하는 내 식욕을 부끄러워해야 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밥 먹는 것을 경멸하게 됐다. 경멸하는 대상에 대해 무슨 탐구를 하겠는가?

 

게다가 밥은 ‘아무 것도 아니지’ 않는가. 밥을 먹는 건 숨을 쉬는 것과 같다. 숨을 어떻게 쉬는지 궁금하지 않듯, 밥이 궁금하지 않았다. 밥은 그저 밥일 뿐이었다. 만약에 이 사회에서 밥이 중요한 일로 취급되었어도 난 밥의 세계에 그리 무지했을까? 단지 관념적/추상적으로 밥이 소중하다고 막연히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진정 밥이 소중한 세상이었어도? 밥이 어떻게 마련되고 어떤 조건에서 소중해질 수 있는지를, 어떻게 먹고, 해야 하는지를, 사회적 중요 의제로 생각하는 세상이었어도 나는 밥에 대해 그리 경멸할 수 있었을까?

 

세상엔 인간심리와 정신세계에 대한 연구는 숱하지만, ‘한 인간이 어떤(어떻게) 밥을 먹(었)는가’가 그의 삶에 끼치는 영향 같은 걸 연구하지는 않는다. 밥에 대한 무시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오랜 이분법과 연결되어 있다. 그 역사 속에서 나는 밥 같이 ‘하찮은’ 물질 세계가 아닌 ‘고귀한’ 정신적 세계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정신의 꽃’도 밥 없이 피지 못하는 구나

 

밥에 대한 무시는 당연히 몸에 대한 무시로 이어진다. 나는 밥을 경멸하고 몸을 무시하면서 ‘저 높고 먼’ 세계를 향해 나아갔다. 내 영혼의 아름다운 영지를 기어이 회복하고야 말겠다고,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듯, 문학이라는 선지자의 안내를 받아 반짝이는 정신의 세계로 나아갔다.

 

현재는 언제나 누추한 것,
마음은 늘 먼 미래에 살았다.
(푸쉬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패러디)

 

정신의 고귀한 꽃을 피우면 나머지는 모두 ‘저절로’ 해결된다고 믿었다. 내가 피우고자한 정신의 꽃은 밥 없이 피지 못하는 꽃이라는 걸 이제야 안다. 밥의 세계를 무시한 정신의 꽃은 ‘헛꽃’일 뿐 아니라 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 따뜻한 밥이 뭘까? ⓒ그림: 김혜련

 

내 생명에게 ‘따뜻한 밥’ 먹이기

 

밥의 역사를 들추어 보면서 ‘밥 먹기’와 ‘밥하기’ 사이의 분명한 연관이 보였다. 나는 따뜻한 밥 먹기의 기억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따뜻한 밥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즐겁게 밥을 한다는 일이 어찌 가능할까?

 

즐거운 밥하기라는 ‘영웅적 과업(!)’을 실현하기 이전에 해야 할 게 있다. ‘밥 먹기’부터 배워야 한다. 나 자신, 내 생명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따뜻한 밥이 뭘까? 평생 밥을 먹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구강기의 결핍을 채우듯 입 안 가득 떠 넣고 허겁지겁 목구멍으로 삼키거나, 그저 한 끼를 때우는 ‘끼니’로서의 밥, 그런 밥 아닌 밥은 어떤 밥일까?

 

밥은 한 번도 내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질감, ‘통통하고’ ‘쫀득하고’ ‘고소하고’, ‘말랑말랑’ ‘보슬보슬’, ‘숭얼숭얼’, ‘녹진녹진’ ‘심심하며 달달한…’ 몸의 느낌으로 다가온 적이 없다. 따뜻한 밥은 하나의 이미지, 관념일 뿐이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흰 쌀 밥’, 햇반 광고를 볼 때와 같은 이미지, 빈약하고 메마른 관념이다. 그것은 몸의 감수성이 아니다.

 

나는 밥의 물질성을 느낄, 몸의 감수성이 말라버렸다. 밥은 내게 몸 전체로 퍼져 나가는 ‘살아있는 물질’이 아니라 언제나 ‘머리에서만 머무는 관념’이었을 뿐이다. 그건 거의 ‘기괴함’이라 할만하다. 밥은 나에게 물질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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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미 2016/11/02 [11:48] 수정 | 삭제
  • 60을바라보면서도 아직 밥하기가어렵고힘든사람입니다~^경우는좀다르겠지만 어릴적사랑의결핍으로생긴힘듦이 너무나공감되는마음입니다~요즘은대물링의걱정과함께 노력중입니다^^함께이고난?을헤쳐나가봅시다ㅎㅎㅎ화이팅~♡
  • 돌고래 2016/10/22 [16:19] 수정 | 삭제
  • "그저 부러웠다. 먹어본 적 없는, 먹을 것의 다채로움 앞에서, 어린 시절 맛본 풍요로운 음식이 일상의 맛, 삶의 풍요로움일 수 있겠구나, 짐작하며 통증처럼 내 삶의 빈곤이 보였다." 는 고백에서 공감하고 갑니다.
  • 2016/10/19 [12:54] 수정 | 삭제
  • `따뜻한 밥`은 다정한 사람과 편하게 먹는 밥이 아닐까요. 선생님의 밥의 허기를, 밥먹기의 부끄러움을 저는 사람에게 느껴본적있어요. 그 시간들을 지나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내 인식이 있고서야 편안해졌지요. 선생님의 복이 있는 밥그림, 참 다정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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