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집회에 데이트 하러 왔니?”

<치마 속 페미니즘> 혁명과 섹스①

홍승희 | 기사입력 2017/01/14 [21:28]

“너는 집회에 데이트 하러 왔니?”

<치마 속 페미니즘> 혁명과 섹스①

홍승희 | 입력 : 2017/01/14 [21:28]

집회에서 감춰야 하는 여성성

 

2008년, 열아홉 살이던 나는 또래 친구들과 달리 대학 졸업반이었다. 나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에 하이힐을 신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갔다. 나에게는 이게 평상복이었고,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광장에서 자주 마주치던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너는 데이트 하러 왔니?”

 

집회할 때는 하이힐이나 미니스커트를 입으면 안 되는 걸까? 당시에는 ‘촛불소녀’라며 교복 입은 여학생들에 대해 언론과 시민사회 전체가 열광하던 때였다. 치마교복과 미니스커트는 얼마나 달랐던 걸까.

 

촛불집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힘찬 구호와 대열이 만들어졌다. 그 속에서 동떨어진 옷을 입고 있는 나는 이방인 같았다. ‘도서관에 하이힐 신고 오는 여자들 이해가 안 돼’ 라는 수군거림처럼, ‘집회 나오는데 치마입고 하이힐 신은 것 봐’ 하는 수군거림을 들었다.

 

한일군사협정에 반대하는 대학생 통일대행진을 할 때였다. 당시 나는 동료들과 생활할 때, 화장실에 몰래 숨어서 화장을 했다. 왜냐하면 광장에서 치마를 입었을 때와 마찬가지 느낌을 조직 사람들에게 받았기 때문이다.

 

한번은 내가 너무 짧은 바지를 입었다고 선배에게 주의를 받았다. 시민들을 만나는데 옷이 너무 짧으면 보기가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궁금했다. 짧은 바지는 진정성이 없어 보이는 걸까? 조직에서 나는 치마 혹은 짧은 바지를 입거나 화장을 하면 운동의 진정성을 의심받았다.

 

생리가 터진 날, 몰래 생리대를 챙기느라 굼뜨게 움직이다가 선배에게 따끔하게 비판을 받았다. 그의 눈빛은 내게 말했다. ‘여자라고 해서 봐줄 생각 없어. 너는 여자가 아니라 혁명가야’ 라고. 혁명가일 때 나는 여자의 옷을 벗어야 했다.

 

정치적으로 잘 팔리는 여성성

 

그런데 이런 조직 분위기와 같은 듯 다르게, 여성성은 집회에서든 어떤 이슈에서든 부각되고, 활용됐다.

 

가령 대학생 반값등록금 집회 때는 유치장으로 연행된 여대생들의 브래지어 착용 금지 논란으로 이슈몰이가 되었다. 나는 기습시위를 하다가 종종 실신을 했었는데 ‘여대생’ 실신이라고 기사가 나왔다. 당사자들이 외친 중심 이슈는 반값등록금이었는데 여대생 실신, 여대생 브래지어가 이슈가 되는 식이다.

 

내가 피켓시위를 하거나 퍼포먼스를 할 때도, 작업 내용이 아니라 “정치에 관심 있는 여성”이라는 의외성이 부각됐다. 모든 이슈에서 여자를 다루는 방법과 마찬가지로 나도 개념녀, 광화문녀로 이름 붙여졌다. 효녀연합 퍼포먼스를 할 때도, 국정교과서 반대 피켓시위를 할 때도 그랬다. 나는 촛불소녀도 아니었고 광화문녀도, 개념녀도 아니었는데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 여성을 성적 상품으로 유통시키면 잘 팔리니까 그렇다.

 

그럼 나는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까? 이슈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내 여성성을 활용해야 하는 걸까, 고민은 깊어졌다. 그러나 페미니즘을 만나고 이와 같은 나의 오랜 고민은 끝났다.

 

▶  [당나귀 하이힐]  ⓒ 홍승희 作

 

명예남성과 어머니 혁명가

 

나는 자주 울고, 분노하고, 쉽게 들뜬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 안에서 그런 나의 모습은 ‘여성적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언니와 나에 대해 말했다. “홍자매는 너무 감정적이야.” 또,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열심히 활동 중인 우리를 보고 말했다. “너희는 금방 그만둘 줄 알았는데 오랫동안 열심히 하는구나.”

 

어떤 사람들은 말했다. “너희는 OO의 간판이야”, “너희가 오니까 환해진다.” 외모를 과도하게 꾸미면 진정성이 없다고 비판받고, 외모를 적절히 꾸미면 칭송을 받는다. 사회 어느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운동 조직에서도 여성성은 칭송의 대상이 되거나 감추어야 할 대상이 되거나 한다.

 

진보정당 활동을 하면서 만난 남자친구는 내게 말했다. “그 여자선배는 이랬어. 대모처럼 사람들의 고민을 다 들어주면서도, 자기의 소신이 뚜렷해서 사람들에게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지. 그런 사람이 필요해.”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운동가를 묘사했다. 나는 그의 기대에 따라 시원시원한 명예남성이면서도, 어머니 같은 혁명가가 되어야 했다.

 

그의 시선과 기준에 부합되지 않으면 나의 진정성은 의심됐다.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를 지향하는 나는 그와 만나면서 다른 사람들과 이성애 감정을 나눴다. 이런 나를 보는 그의 시선은 혹독했다. 혁명을 한다면서 자의적으로 행동하는 자유주의자이거나, 혹은 ‘문란한’ 여자면서 정의로운 척 한다고 비판 받기도 했다. 그런 시선이 두려웠던 나는 나에게 맞지 않는 갑옷을 입어야만 했다. 때로는 여자, 때로는 명예남자의 갑옷.

 

혁명에서조차 여성의 역할은 정해져 있다. 홍보와 선전에서 ‘가련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투쟁적’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대중들의 심금을 울린다. 어머니 같은 혁명가이거나 위험한 미인계, 색계가 되기도 한다. 가부장은 ‘문화’ 코드로 해석되어, 보수적인 사회분위기 ‘정서’에 맞춘 실천투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부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문란한’ 여자는 혁명에서도 배척된다. 혁명에서조차 대상화되고 도구화되는 여성들이 자신의 불편을 말하면 그(남자)들은 이런 식으로 말해왔다.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지 말자고, 동지.”

 

소외되지 않는 오늘을 사는 것이 내겐 혁명이다

 

내가 왜 화장실에 숨어서 화장을 해야 했을까. 화장을 하건 안하건 여자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내가 원하면 하는 거고, 원하지 않으면 안하는 거다. 그런데 여자인 나는 진정성이 없어 보일까봐 숨어서 화장을 하고 짧은 바지를 내려 입어야 했다. 사실 나는 적당히 청순하고 적당히 과감한 것이 여자의 미덕이 되는 사회의 시선에서 해방되고 싶었는데, 해방을 외치는 운동 조직에서조차 내 존재는 검열됐다.

 

시간이 지나, 나뿐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같은 불편을 토로하는 소리를 듣게 됐다. 나는 더 이상 여성성을 파기해야하는 것으로 여기면서 어머니를 칭송하는 혁명을 믿지 않는다. 혁명은 갑옷이 아니라 생명의 자연스러운 생동이다. 나는 정의로운 여자도, 문란한 여자도, 어머니 혁명가도 아니다.

 

페미니즘을 말하고 읽고 쓰는 나에게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상처가 많아 페미니즘에 빠졌구나. 안타깝다”, “부디 대의를 위해 활동해주세요.” 여자인 내가 섹슈얼리티를 말하는 것은 사적인 것이지만, 거대한 자본과 국가권력, 제국주의와 싸우는 것은 공적인 대의가 된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아니, 나는 아주 급진적인 혁명의 시간을 살고 있어요. 내 존재가 소외되지 않는 오늘을요.”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 ㅇㅇ 2019/11/12 [02:07] 수정 | 삭제
  • 글쓴이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 ㅇㅈㅇ 2017/01/26 [16:33] 수정 | 삭제
  • 내 존재가 소외되지 않는 오늘...ㅠ
  • Ian91 2017/01/21 [16:54] 수정 | 삭제
  • 결국은 사회적통념깨기가 페미니즘의 지향향이겠네요.집회에 짧은 치마와 하이힐을 입고 나가도그런 것이 문제되지않고 집회참여자의 목소리에 집중하게되는 사회를 원하시는데, 너무 사회를 수준높게 보시는 것 아닐까해요.어떤 지향성을 갖고 계신 분이니 답답하시겠지만.. 허리를 낮추어 어린아이를 달래듯 차근차근 사회와 함께 발맞춰나가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 ㄱㅈㅇㄴ 2017/01/20 [13:45] 수정 | 삭제
  • 살아잇어줘서 고마워요. 극복하라는 말 쉬운 말 아니지만 이렇게 글 올려줘서 감사합니다.
  • 참담 속의 희망 2017/01/17 [13:54] 수정 | 삭제
  • 늘 응원합니다~ 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위 글이 5,60대 연령인 분의 회고였다면..싶은 슬픔은 있네요.
    남북 분단 상황을 정치에 이용해 겁박하는 그들이나, 지옥으로 공포심을 유발해 겁박하는 그들이나, 가부장이데올로기 자본주의라는 인재로 인해 반복되는 비극들을 해일이라는 자연재해로 왜곡해서 겁박하는 그들이나 참 똑같군요.
    아직도 이땅의 일부(?) 진보(?) 남성들의 인식수준은 제자리군요.
  • MSN기사를본손님 2017/01/15 [21:09] 수정 | 삭제
  • 학생운동하는 사람들도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진짜 정의로운 사람, 정치의 입문을 꿈꾸는 사람, 학생운동하는 여학생이 맘에 들어 꼬시고 싶어 합류한 사람, 혁명과 개혁의 범위나 이해도도 이상향도 조금씩 다르다는 것... 바로 다양성의 이해죠. 단지 지금의 사회를 좀 더 나은 사회를 꿈꾼다는 공통점만 있을 뿐입니다. 남들보다 더 앞장 서던 사람이 변절하기도 하고 부패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글을 쓴 사람의 의견에 공감이 갑니다. 단지 아쉬운 것은 그런 편견들에 맞서 그때그때 싸우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바위에 부딛혀 깨지는 계란이 될지언정 그런 편견에 맞서 싸우는 것이 진짜 투쟁이 아닐까요? 그런 편견에 맞서 싸우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 아닌 사상으로 무장된 도전이어야 합니다. 사회를 변혁시키는 사상만이 사상이 아니고, 필요에 따라 여성성과 남성성을 강요하는 편견을 부수는 사상도 사상입니다. 학생운동도 지도부의 독재가 될 수도, 부패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정치현실처럼 잘못된 것을 그때 그때 바로 잡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학생운동을 더 옳바른 길로 조금씩 발전시켜 나아갑니다.
  • 마고 2017/01/15 [15:56] 수정 | 삭제
  • 그냥 나로 살련다
  • Backho 2017/01/15 [10:18] 수정 | 삭제
  • 사회 문화적으로 만들어진 의식을 바꾸어 가는 것이 쉬운일은 안니네요 점차 아니면 혁명적으로 불시에 바뀌기도 하지만저변에 가려져 있는 고정관념 깨기는 이른바 진보에서도 어려운 일이지요개인의 욕망 또한 그러한 것 같습니다편견과 왜곡이 가득하죠작가님과 같은 분도 있지만 전반적인 불신을 일으키는 반페미니즘 정서를 뿌리고 다니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부르는 지식계층들의 문제도 있다고 봅니다
  • partrasue 2017/01/14 [22:46] 수정 | 삭제
  • 웅..운동권 문화 여전해..구리다.. 운동권만 아니겠죠. 사회에서 성녀/창녀 이분법도 아직도 심한 것 같으니까요. 그래도 작가님처럼 내 존재가 소외되지 않는 오늘을 살고 있다고 당당하게 외치는 여성들이 있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살고 싶다고, 살고 있다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