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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일상의 혁명이 필요한 이유
<영화로 읽는 페미니즘> 도그빌(Dogville)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지아(知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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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지아(知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공연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영화칼럼을 비롯해 다양하고 새로운 실험으로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 라스 폰 트리에 감독, 니콜 키드먼 주연 영화 <도그빌> 2003

 

마을의 독서모임에서 만난 30대 중반의 여성은 어느 날 이유 모를 따돌림을 받게 되었다. 그것도 유치원에 다니는 딸의 친구 엄마들에게서. 일곱 살 딸이 그림대회에서 상을 받고나서부터라고 했다. 과도한 교육열에서 비롯된 시기와 질투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었다. 동네에서 마주칠 때마다 투명인간 취급하고, 유치원 행사에서 교묘히 따돌리는 것도 모자라 헛소문을 퍼뜨리며 모함을 한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져 왔다.

 

평소 그녀는 동네에서 바보스러울 만큼 순진하고 내성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태가 심각해져 결국 마을의 원로가 중재를 하기에 이르렀는데, 일부 엄마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짓이 참으로 나쁘고 비열했다는 걸 깨닫고 울먹였다. 하지만, 따돌림을 이끌었던 리더 격(?)인 엄마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다. 그 엄마들에게 그녀는 따돌림당할만한, 고통을 당해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법과 상식을 존중하는 평범한 마을 주민들이라는 점이 나는 혼란스러웠다. 과연 무엇이, 그들을 그악스럽게 하나로 뭉치게 해서 죄 없는 사람에게 이유도 없는 지옥 같은 고통을 주었을까? 인간 안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악의 근원이 존재하는 걸까? 여러 질문이 떠올랐다. 그때 떠오른 영화가 바로 <도그빌>(2003)이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 니콜 키드먼 주연 <도그빌>

 

미국 록키산맥에 자리한 작은 마을 도그빌에 갱단에 쫓기는 여자 그레이스가 찾아온다. 처음에 마을 주민들은 낯선 외지인인 그녀를 경계하지만,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는 선의를 보며 점점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그러나 경찰이 마을을 방문하고, 그녀를 찾는 실종자 벽보가 범죄자 신고 벽보로 바뀔수록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벽보에 나온 대로 그녀가 은행 강도 사건에 연루된 범죄자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신고를 빌미로 그레이스의 호의를 이용하게 되는 사람들. 그녀가 마을에서 지내는 대신 감수할 수밖에 없는 위험 부담에, 마을 주민은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의 노동을 그레이스에게 요구한다.

 

▶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도그빌>을 통해 인간 내면의 악함을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하필 왜 마을 이름이 도그빌(Dogville)일까, (개 같은 마을이라니!) 의아했는데 사람들이 그레이스가 도망칠까 봐 그녀의 목에 강제로 쇠사슬을 묶어 노동력을 착취하고 성폭행까지 하는 횡포를 당연한 권력처럼 휘두르는 모습을 보며 이해가 되었다. ‘도그빌’이라는 이름 자체가 사람들 내면에 있는 악의 중의적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불편했다. 그들은 그레이스가 남자들을 먼저 유혹했다고 거짓의 낙인을 찍으며, 성폭행의 책임을 그녀에게 전가하는 추악한 꼼수를 부리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도그빌의 사람들이 우리 마을의 그 엄마들처럼 평범한 소시민들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도그빌은 우리 사회 도처에 존재한다. 지난해 5월 전남 신안군 섬마을의 한 초등학교 관사에서 20대 여자 교사가 학부형과 주민으로부터 집단 성폭행을 당한 끔찍한 사건이 알려졌다. 피의자들이 사전 공모를 한 정황까지 추후에 포착돼서 큰 충격을 주었다. 더욱 소름 끼쳤던 것은, 다음 날 임기를 마치고 섬을 떠날 교사에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세 명의 남자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마을 주민들이었다는 거다. 그들은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였고, 이웃 사람들이었다.

 

당시 신문과 TV에는 도덕과 인성이 바닥까지 추락한 ‘막장’ 현실을 개탄하는 목소리들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데, 끔찍한 사건의 정황 사이로 피해자인 여교사에게도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왜 여교사는 굳이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을까? 왜 여교사는 술자리 도중에 굳이 나오지 못했을까? ‘굳이’로 상정하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사건의 본질과 다르게 주위에서 회자되었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비단 이 사건뿐일까. 2세기경 에페소스라는 도시에 전염병 페스트가 창궐하자, 도시의 정신적인 지도자였던 아폴로니우스는 걸인에게 전염병의 책임을 떠넘긴다. 사람들에게 ‘돌을 들어 모든 신의 적인 저 녀석에게 던지시오!’라고 외치고 이 거지야말로 페스트를 일으킨 악마라고 몰아붙인다. 돌 던지기를 주저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돌을 던지기 시작하자 눈만 껌뻑이던 거지는 눈을 부릅뜨며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고통으로 그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질수록, 사람들은 걸인의 얼굴 속에서 악마를 보았다고 확신하게 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죄책감 없이 걸인이 죽을 때까지 돌을 던질 수 있었다.

 

훗날 이 이야기는 페스트를 치유한 ‘아폴로니우스의 기적’으로 둔갑해서 전해졌다. 걸인을 한 순간에 페스트를 일으키는 악마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살인이 기적으로 미화된 것이다. ‘혐오’가 낯설고 이질적인 것을 차별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우리 안에 두려움을 숙주 삼아 어떻게 자라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아폴로니우스의 기적’ 이야기는 지금, 사회 여기저기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신안군 섬마을의 여교사에게 일말의 책임을 묻는 사람들은, 그레이스에게 성폭행의 책임을 전가하는 도그빌의 사람들과 너무도 닮아 있다. 자신 안의 어둠을 밖으로 투사해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위험한 까닭은, 희생양을 만들어내기 때문일 터. 내 안의 두려움을 투사해서 바라보는 세상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혐오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 라스 폰 트리에 감독, 니콜 키드먼 주연 영화 <도그빌> 2003

 

여성혐오를 통해 유지된 가부장제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여성을 상대로 한 ‘묻지마 폭행 사건’의 배후에 바로 이 혐오가 존재한다. 가해자 남성들은 평소 ‘여자에게까지 무시를 당하는 나’라는 굴절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드러나곤 했다. 이는 여성을 남성인 자신보다 하위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참으로 무서운 생각이 아닌가. 성공한 남성에게는 따라붙지 않는 위협과 성적 협박이 성공한 여성에게는 익명성에 숨겨진 채 무수히 자행되는 현실만 보아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중세 유럽에서는 마을에 역병이 돌아 민심이 흉흉해지면 마을의 외곽에서 마을 주민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영위해가는, 특히 혼자 살아가는 여자들을 마녀로 낙인찍고 화형을 시켰다고 한다. 여자들은 졸지에 역병의 주범인 마녀가 되었고, 마을의 광장 한가운데에서 불태워져 역병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불안을 잠재웠다. 여성 안의 욕망은 거세한 채 남성들이 욕망하는 모습으로, 여성을 때론 성녀로 때론 마녀로 제멋대로 박제화시켰던 세월 속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마녀가 되어 죽어갔다. 어쩌면 가부장제의 역사는 여성을 혐오 자체로 만들어갔던 슬프고 불행한 시간이 아니었을지.

 

시골에서 생계형 작가로 혼자 살아가는 나는 중세 유럽의 마녀 재판이 여전히 유효한 채 우리 사회를 떠돌고 있다고 믿고 있다. 화형 제도라는 형식만 사라졌을 뿐, 가부장제의 유리천장을 흔드는 여성들에 대한 암묵적인 린치는 늘 대기 중이기 때문이다. 일 년 간 혼자 세계여행을 했던 여성의 홈페이지에 우연히 들어갔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는데, 여자 혼자 장기여행을 했다는 이유로 입에 담기 민망한 온갖 욕설과 성적 비하의 말을 댓글로 다는 남자들이 있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혼자 세계여행을 떠난 용기와 진취적인 모험심은 가려지고, 감히 여자가 혼자 일 년 넘도록 여행할 생각을 어떻게 하냐는 둥 성폭행 안 당한 게 다행이라는 둥 조롱과 비하를 일삼는 남자들이 많았다. 그들 또한, 우리 안에 보이지 않는 도그빌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이 인터넷 밖에서는 이 땅을 함께 살아가는 학교 선후배이고, 아들이고, 친구이고, 남편이고, 아버지라는 걸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힘겨운 과도기일 때, 희생양을 찾아 사회의 불안을 잠재웠던 역사의 부끄러운 흔적들을 본다. 그리고 그 희생양들이 늘 여성과 아이, 성소수자와 장애인 등 사회적으로 권력을 갖지 못한 상대적으로 약자인 사람들이었다는 슬픈 사실 또한 마주한다. 희생양이 강요되고 많아질 때 우리는 ‘세상이 악하다’고 말하는데, 그렇다. 지금, 세상은 참으로 악하다. 자신 안의 그림자를 투사해서 만들어낸 수많은 혐오, 오래된 관습과 편견이 더욱 강고하게 길러낸 이 어둔 그림자들이, 역사적인 과도기의 상황과 맞물려 점점 더 큰 괴물로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 혐오의 질주를 멈추지 못한다면, 우리는 도그빌이라는 평화를 회칠한 무덤에서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그레이스를 유일하게 도와주려 했던 톰은 결국 그녀를 배신하며 비겁함을 드러낸다. <도그빌>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용기’

 

목에 쇠사슬을 두른 채 그레이스가 마을 주민이자 작가인 톰에게 묻는 장면은 그래서, 가슴을 아프게 친다.

 

“당신도 그런 인간일까 봐 두렵나요?”
“당신은 당신 스스로를 믿지 못하나요?”

 

마을에서 유일하게 그레이스를 도와주려 했던 톰은 양심과 도덕의 중요성을 설파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녀를 갱단에 넘겨주는 배신자가 되고 만다. 톰의 이면에 숨어 있는 어둠을 그레이스가 저 질문으로 햇빛 속에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내 안에 있는 비겁함, 도그빌을 마주하기 두려울 때 그레이스의 저 질문을 나에게 하고 싶다. 흔히 용기 있는 사람에 대해 겁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용기는 두려움과 함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지 않은가. 만약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없다면, 벼랑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뉴스 헤드라인을 수없이 장식했을지도 모를 일.


이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를 벗어나는 길은 ‘여자가 기가 세면 팔자가 세다’, ‘계집아이처럼 울지 말아라’ 등 피부처럼 익숙했던 편견을 두려움을 무릅쓰고 허무는 작업일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에 대한 질문’으로 살아가는 시간일 것이다. ‘당연함’으로 고착된 차별의 관습에 우리가 일상에서 순간순간 저항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가치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함께 만드는 ‘일상의 혁명’인 것이다. 이 혁명을 하지 않는다면, 영화의 마지막에 도그빌이 갱단에게 몰살당한 것처럼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모두의 재앙뿐이지 않을까.

 

치유는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일어난다. 그때 어둠의 투사는 비로소 멈춘다.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 영화 <도그빌>은 무대배경을 과감히 생략한 연극 무대에서 펼쳐진다.

 

[도그빌을 좀 더 잘 읽기 위한 영화미학]

 

덴마크 감독 라스 폰 트리에는 영화 <도그빌>에서 기독교 정신으로 위장한 미국 사회의 부패한 속내를 실험적으로 풍자했다.

 

영화는 인간 내면의 악을 집요하게 들여다보며, 권력과 구원의 담론을 마치 일종의 제의처럼 담아냈다. 사람들의 내면 상태까지 설명해주는 내레이션과 가끔 버드 아이 뷰(Birds Eye’s View, 하늘을 나는 새의 시점)로 마을을 내려다보는 영화의 시선은 외형상으로는 분명 전지적 시점을 견지하고 있다.

 

프롤로그를 포함한 10개의 장으로 막을 구분한 연극 형식으로 구성된 영화는 실제로 연극 무대에서 펼쳐진다. 그런데 미니멀리즘의 진수를 보여주기라도 한 것처럼 무대배경이 과감히 생략된 상태다. 벽과 문이 없어서 집집마다 서로 무얼 하는지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지만, 마치 벽과 문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은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을 자연스레 떠올려준다.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양심 부재의 마을 도그빌을, 도발적으로 표현해낸 상징이 아닐 수 없다.

 

생략된 무대 배경은 영국의 연극 연출가 피터 브룩의 <빈 공간>의 미학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연극 본질로의 회귀’라는 가치로 모든 불필요한 소도구들을 제거하고 순수한 연극 그 자체를 지향한 빈 공간의 무대에서 배우들이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세상의 부조리를 말한 것처럼, 이 영화에서 배우들이 절제된 연기로 우리 안의 악을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영화 미학적인 장치들은 극작가 브레히트 서사극의 ‘소외 효과’처럼 일반적인 감정이입과는 다르게, 낯설게 바라보는 거리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마을 사람들의 폭력에 암묵적으로 함께 동참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레이스가 성폭행을 당할 때, 벽과 문이 없는 마을 도그빌의 사람들이 동시에 함께 보이는 장면이 특히 그러하다. 관객들은 폭력 앞에서 방관하고 있는 불편함과 무력감을 함께 느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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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3/11 [13:46]  최종편집: ⓒ 일다
 
숨나 17/03/11 [16:35] 수정 삭제  
  일상의 혁명이 필요한 이유. 묵직한 주제를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영화 도그빌 보고 싶군욧!
Viewing 17/03/11 [19:07] 수정 삭제  
  도그빌이 페미니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많은 영화라고 생각했었는데 기사에서 잘 짚어줘서 도움이 됐어요~
푸른 17/03/16 [11:32] 수정 삭제  
  라스폰트리에는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한 작품만 만들죠. 기사 잘 봤습니다.
'악의 평범성'이 미풍양속인듯한 한국.. 17/03/17 [03:37] 수정 삭제  
  글 감사합니다.

당시에(한국도 민주주의로 향하고 있다고 믿었을 때)는 영화'도그빌'을 다소 상징적인 부조리극으로 봤나봅니다. MB정권 이후 역행하면서 요즈음 오히려 '소오름'끼지게 현실적으로 와닿더군요.

유사한 피해자가 여러명인 성폭력사건조차, 피해자들이 '업소녀'이므로 성매수사건이고 돈주는걸잊어버린 사기죄일뿐이라고 둔갑시키고 되려 피해자들을 무고죄로 징역형때리는, 열폭남성망상수준을 실현시키고있는 일부(?)남자검사들과,
모든스텝들과 남자배우와 짜고 '여'배우에게는 아무 상의도 없이 성폭력/폭력을 가하는 현장을 영화랍시고 촬영하는 병리적인 몇몇(?) 남자감독들에게는 제작비가 붙고,
'상'남자감독들답게 유출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반협박으로 찍은 노출장면을 아무 상의도 없이 홍보영상으로 사용하는 등의 특수성범죄가 관행처럼 자리잡은 충무로영화판.

이번주 시작한 드라마'자체발광 오피스' 내용 중 남자대리가 신입'여'계약직에게 "여자티 내지 말아야"개념녀라는듯이 당부하고는, 회식자리에서 그 '여'직원이 남자부장이 따라주는 술을 다 받아마시고 취하자 당연하단듯이 성추행하려는 남자부장을 남자대리는 그냥보는 장면이 있더군요(성상납?).

"한국여자가 혼자 여행하기에 가장 위험한 곳이 한국이더라."는 한비야씨의 기행문(예상했던대로 MB정권이후 열폭남성들에게 특히 인도부분이 타겟이 됐더군요. 한국남성성범죄를 신고하면 꽃뱀이라 우기고, 외국은 무작정 위험하다고 우기는 열폭남성들.)이 아니더라도 한국여자들은 물론 알고있지요.
MB정권이후 여성에 대한 강력범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졌는데도 치안율이 좋게 나오는 이유는 남녀임금격차만큼이나 치안에 대한 남녀격차도 심하다는것을. 그럼에도,

'여자티' 안내고 남성(병리적)문화에 맞춰줘야 생존할수있다고 혹은 그래야 성평등지수 높아진다는듯이 부드럽게 협박하는게 박근혜/최순실보다도 일상에 늘 도사리고있는 일부(?)한국남성들의 초법적 권력임을 알면서도, 위험한 외줄타기를 할수밖에 없음을 알고있지요.

신안군 섬마을 집단성폭력사건처럼 검찰이 순순히(?) 인정한 성범죄사건조차도 피해자탓을 하는 요상한 군중심리 중에는 가해자에 동조하고픈 심보의 열폭남성뿐만 아니라
생존문제로 남자가족과 결별할수 없는 현실을 스스로 망각하려 차라리 남성문제를 희석하고 피해자를 원망하는 여성들도 있겠지요.

내 안의 우리 안의 '악의 평범성'을 인정하고 예방하려면 우선 "차별금지법 통과"가 정답인듯합니다.
이번 대선 후보 중에 "차별금지법 통과"를 일관되게 공약으로 해왔고 대선을 앞두고 비겁하게 말을 바꾸지 않은 후보는 안타깝게도 한 분 뿐이더군요.
oasis 17/03/19 [16:46] 수정 삭제  
  제가 정말 감명 깊게 본 영화예요. 마지막 장면에 복수라고 해야 하나.. 그럴 기회를 갖을 수 있는 사람은...거의 없다는 게..현실의 문제이겠지만. 일단은 영화에서만큼은 결말이 마음에 들었네요. 저희 엄마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시죠. 생존하고 있는, 생존욕구가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이기적이다-라구요. 그 말..살면서 정말 많이 느낍니다. 내 자신에게도요. 이 영화가 좋았던건 결말, 그리고 인간의 저 밑바닥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불편했던 것은 그 모습이 나에게도 있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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