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가 왜 아직도 야수를?

[잇을의 젠더 프리즘] ‘미녀와 야수’의 저주

잇을 | 기사입력 2017/03/26 [12:50]

미녀가 왜 아직도 야수를?

[잇을의 젠더 프리즘] ‘미녀와 야수’의 저주

잇을 | 입력 : 2017/03/26 [12:50]

※ 세상을 바라보는 20~30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싣는 ‘젠더 프리즘’ 칼럼입니다. 필자 잇을님은 언니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 빌 콘돈 감독, 엠마 왓슨, 댄 스티븐스 주연 <미녀와 야수>(미국, 2017)

 

최근 ‘한남과의 사랑 가능한가?’ 라는 제목의 특강이 열린 것을 봤다. 1991년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를 실사영화로 다시 만든다고 했을 때, 처음 떠오른 생각도 비슷했다. ‘미녀가 왜 아직도 야수를?’

 

물론 수많은 영화에서 여성은 남성을 사랑한다.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조금만 부딪치면 사랑에 빠지고 고민은 없다. 그 남성이 어떤 인간이든지 그 상태는 지속된다. 장르가 멜로드라마라면. <미녀와 야수> 원작에 따르면, 벨은 당연히 야수를 사랑한다. 그렇더라도 ‘유일하게 유의미한 인간관계였던 아버지를 떠나서 남편감을 찾았다’로 요약될 이 이야기가 2017년에도 낭만적이려면, 더 성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미녀와 야수>는 야수의 저주 사연을 보여주고 곧바로 벨에게 향한다. 영화는 엠마 왓슨의 영리하고 용감한 이미지를 빌려왔기 때문에, 벨의 매력에 대한 착각이 잠시 일어난다. 벨은 총명하고, 책도 구하기 힘든 시골에서 같은 책을 읽고 또 읽으며 더 넓은 세상을 꿈꾼다. 부모를 잃고 ‘미혼’으로 남으면 비참해질 거라는 청혼자의 협박도 단칼에 자른다.

 

그런데 괴짜로 불릴 정도로 남다른 욕망을 가진 벨이 그 이후 보여주는 모습은 정해진 결론에 갇힌다. 탈출에 한번 실패하고 나서 다시는 탈출을 시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야수에게 호감을 가지며, 마침내 ‘네가 나를 좋아해줄 리 없겠지’ 하는 야수의 고백도 아닌 고백에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다’고 하고 있다. 이 변화에는 아무 설명도 없어서, 벨이 ‘촛대나 옷장을 선택하기 어려워서 야수를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 빌 콘돈 감독, 엠마 왓슨, 댄 스티븐스 주연 <미녀와 야수>(미국, 2017)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는 일시적 ‘자유’가 주어지자 벨은 어머니를 추억하고 야수의 집으로 돌아간다. ‘자유 없이도 행복할 수 있을까?’ 벨은 자유를 꿈꾸지만 그것을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지 모르고, 제대로 가져본 적 없는 자유를 포기한다. 성에서 나갈 엄두를 못 내는 야수와 달리, 벨은 어디로든 떠나서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다. 야수가 선택해둔 책만이 아니라. 그러나 벨이 자기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주인공’이라는 걸 관객은 알지만 벨은 모른다.

 

야수가 대단히 매력적이든지, 하다못해 우리가 잠시라도 야수에 대해 이입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영화는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냉혹한 아버지와 자랐다’는 몇 초 설명으로 그의 일생을 요약해놓았을 뿐이다. 야수가 ‘금기시된 존재’라는 점에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저주 이전에도 외로웠다면, 왜 저주가 풀리기만을 소망하는지, 괴로워서 울부짖는 그 모습조차 숲의 맹수를 내쫓는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나는 알고 싶다. 주인공의 가족상황을 둘러싼 편견이 아니라.

 

<미녀와 야수>에 설득력을 부여하려면, 벨과 야수를 조금 바꿔놓는 것으론 부족했다. 정해진 전개와 결말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달라져야 했을 것이다. 맹수를 물리칠 때 외에는 야수가 사람 같기만 한 것도, 그래서 사람인데다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벨에게 사랑받는 것 같은 점도 납득되지 않는다. 영화는 차별, 사회적 금기, 모호하고 암묵적인 도덕규칙 등에 의해 덜 지지되는, 낙인찍히거나 처벌되는 욕망들이 있다는 걸 모르는 척 이성애만 잘 완성하고 끝난다. 더구나 야수가 사람의 몸을 갖게 되면 당연히 둘은 더 행복하다는 식의 결말까지.

 

▶ 빌 콘돈 감독, 엠마 왓슨, 댄 스티븐스 주연 <미녀와 야수>(미국, 2017)

 

우리의 저주를 생각해봤다. 이성애 관계, 일대일의 독점관계, 성적인 끌림과 정서적 친밀함을 동시에 느끼는 관계를 항상 시작하고, 지속하고, 또 시작해야 한다는 압박이 그것이다. 때로는 ‘사랑’이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전부처럼 될 때도 있다. 그 저주 때문에, 사랑과 행복은 가능하기 힘들다. 우리는 트랜스젠더퀴어, 동성애자, 양성애자, 애인/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섹스하는 사람, 그 밖의 모든 비규범적인 사람을 차별하는 교육을 받았고, 그것에 분노한다. 동시에 규범적인 자기 욕망과 상황도 괴롭다.

 

나는 지우거나 덮어둬야 할 것처럼 여겨지는 어떤 종류의 ‘친밀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이 있었으면 좋겠다. ‘주인공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야만 한다’는 그 서사를 벗어나서도 잘 살아가고 싶다. 일단, <미녀와 야수>보다 더 용기 있는 영화를 보고 싶다. 그건 가능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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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가 변했는데 2017/04/04 [22:31] 수정 | 삭제
  • 저 왕자가 저주에 걸린 게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 였는데... 왜 또 미녀가 저주를 풀어주죠? .. 교훈을 주려면 추녀와 사랑에 빠져야 하는 거 아닌가.. 옛날에 만들어진 동화를 요즘 세상 가치관으로 보니 불편한 점이 많아요.
  • 마나 2017/03/30 [21:53] 수정 | 삭제
  • 새로운 형태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좋은 각색작이었던 말리피센트가 있었음에도 이렇게 밖에 못한게 괘씸하고 실망스럽더군요.
  • 저도 어제 2017/03/28 [10:41] 수정 | 삭제
  • 또 놀라운 것은 이 영화가 지금 최고순위에 올라 있다는 것. 도저히 알 수 없는 현대임을 재차 확인.
  • 저도 어제 2017/03/28 [10:39] 수정 | 삭제
  • 아빠 생신에 무슨 영화를 같이 볼까 하다가, 엠마 왓슨에 약간의 희망을 걸어보았는데 너무 옛날 그대로라 깜짝 놀랐을 정도. 영화에서 벨은 글쎄요 제게, 파리에서 트렌드를 이끌었다는 어머니를 끊임없이 동경하고(나중에 방평수에 실망하지만), 엄청난 서가와 지식권력에 압도당하고, 소설에 나오는 한 방의 신분상승을 꿈꾸는 점, 차라리 그런 게 그나마 약간 실사적인 생동감으로 느껴지더군요.
  • 아직안봤지만 2017/03/28 [10:29] 수정 | 삭제
  • 좋은 리뷰 잘 봤습니다. 특히 마지막 문단이 참 마음에 드네요. 저도 우리의 저주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 one 2017/03/27 [14:07] 수정 | 삭제
  • 디즈니의 재해석이라면 "숲속으로" 같은 영화도 나왔는데 2017년에 미녀와 야수라니 좀 살망스럽긴 하죠.
  • 프리뷰 2017/03/26 [19:23] 수정 | 삭제
  • 나도 딱 든 생각이 엠마 왓슨이 왜 미녀를? 이었는데... 재밌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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