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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위한 여성들의 저항
새만금 그곳엔 여성들이 있다 -끝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윤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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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마을 여성들의 갯벌 지키기는 2001년 여름, 하리갯벌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여성들의 ‘갯벌 지키기’는 외지인 갯벌출입 통제, 그물철거 사건, 그리고 조개의 남획을 방지하기 위한 방배출입 통제 등으로 이뤄졌다. 또 2002년 6월에는 생합(백합) 생산자들이 그레마을 생합 소매상을 상대로 ‘생합가격 보장’을 요구하며 생합의 채취와 판매를 집단적으로 거부하기도 했다.

새만금 반대운동과 여성들의 만남

하리마을 여성들을 중심으로 펼쳐진 ‘갯벌 지키기’는, 새만금 방조제 공사로 인해 갯벌 생태계가 악화되어감으로써 생계위협을 느낀 여성들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갯벌 지키기’가 지역 새만금 반대운동과 결합돼 새만금 방조제공사 중단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확장되었다.

부안의 지역문화운동을 하던 사람들로 구성된 ‘부안사람들’이 진행했던 지역 새만금 반대운동은 새만금 갯벌과 바다를 삶터로 살아온 지역
주민들의 삶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생존권 운동이자, 뭇 생명들과 더불어 사는 삶의 방식을 회복하고자 하는 생태운동의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새만금 갯벌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서 갯벌에서 생명을 느끼고 그 생명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그런 감성을 이야기한 분도 여성이에요. 그리고 ‘이 갯벌이 어머니의 자궁이다’라고 이야기 한 분도 여성이에요. 그 다음에 이 갯벌이 누구의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대한다고 말씀하신 분도 여성이에요. 새만금 반대운동의 본질, 뿌리는 이 여성한테 다 나왔어요. (…) 저는 여성어민들이 이 새만금 반대운동의 주역이라고 봐요. 또 진짜 그분들이 바다와 갯벌에 가장 애절하기 때문에.” (A씨)

‘부안사람들’의 활동가인 A씨는 지역 여성어민들로부터 새만금 반대운동이 지향해야 할 가치와 관점을 발견하고 배울 수 있었다고 밝힌다.

“남자들보다도 여자들이 훨씬 쉽게 받아들여요. 남자분들은 설득하기가 힘들어요. 남자들한테 이야기하면 '야, 저 넓은 땅 그냥 두겄냐?' 이렇게 이야기하고. 이 얘기는 뭐냐면은 군(郡)에서, 여기 면(面)에서 하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뭐 면 직원이나 군 직원들을 만나서 술 한잔 하든지 하는 식으로 만날 기회들이 있으니까 그런 얘기를 믿는 거죠. 근데 여자분들은 아무래도 그런 데 접하는 기회가 없고 하니까 어떻게 보면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 다음에 직접 생합을 잡고 하다 보니까 실제로 그런 것이죠. 실제로 남자들은 돈을 벌든지, 안 벌든지 사실 그렇게 집안 가사에 대해서 그렇게 크게 신경을 안 쓰는 편이에요, 여자들이 이렇게 벌고 그러니까.” (B씨)

주민들을 새만금 반대운동에 참여하도록 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B씨의 말은 가정이나 마을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여성들이 새만금 사업의 진실에 더 근접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여성들 입장에서 보면 새만금 갯벌은 자신은 물론 가족과 마을 공동체의 생존이 달린 목숨과도 같은 삶터인 셈이다. 이런 갯벌을 지키기 위해서 여성들은 “죽고 살기로 갯벌을 못 막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여성들의 이해는 ‘새만금 갯벌이 살아야 우리가 산다’는 것으로 모아질 수 있었고 그 결과, 여성들과 새만금 반대운동 간 연대가 가능했을 뿐 아니라 상호 영향을 주고 받으며 지역 새만금 반대주민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성 주도의 저항

2002년 4월, 새만금 방조제 공사는 70% 이상 진행된 상태였다. 새만금 방조제를 쌓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토석이 필요하다. 이러한 토석은 새만금 지구내의 산을 깎아 충당하게 되는데 그레마을 주변의 해창산이 바로 토석 채취를 위해 깎여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안사람들’과 환경단체 활동가들은 새만금 방조제 공사를 저지하기 위한 ‘해창산 토석채취를 반대하는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해창산 농성의 주요한 참여집단은 하리마을 여성들이었다. 농성기간 중에 치러진 ‘새만금 사업 장례식’은 여성들이 주도한 집회였는데, 이는 여성들이 지역의 새만금 반대주민운동에 본격적으로 결합하게 됨으로써 새만금 반대운동의 주체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농성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중반에 접어들면서 몇몇 여성들은 아예 생계도 포기한 채, 매일같이 농성장으로 달려와 공사를 저지하기도 했다. 여성들은 공사를 다시 시작하는 시공업체 인부들에 맞서 덤프 트럭 앞에 드러눕거나 포크레인 위에 올라타기, 트럭 앞을 가로막기, 공사 진입로 한 가운데에 앉아 있기 등 온몸으로 저항했다.

해창산 농성과정에서 여성과 남성의 태도를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온 몸으로 맞서는 여성’과 ‘뒷짐지고 서있는 남성’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아주머니들이 더 바다 가보면은 그렇게 생겼으니까 더 그렇게 헐 수 밖에 없지. 아주머니들은 우리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우선 현재 바다 가야 돈을 버는디 바다가 이렇게 후딱 막어 버리면은 못 살게 생기니까 그렇지, 안 그려? 밥을 굶고 갈치던 자식을 못 갈키게 생겼잖아.” (C씨)

여성들에게 바다가 막히는 것은 생계터전을 잃어버리는 일이며 가르치던 자식을 못 가르치게 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와 달리 과거 배를 가지고 고기를 잡았던 남성들은 수협에서 제공하는 면세유를 받아 생활하고 있었다. 이런 남성들은 면세유를 팔아 한 달이면 100만원이 넘는 돈을 벌고 있었다. 해창산 농성장에는 군의 수산과 직원들과 경찰, 새만금 사업단 직원들이 농성하는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어갔는데, 그렇게 되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남성들은 대부분 농성장에 오지 않으려 하거나 오더라도 '뒷짐지고 서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남성들 모두가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갯벌에서 주로 맨손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남성들은 여성들과 마찬가지고 먹고 살기 위해서 농성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해창산 농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그레마을에서 성과 계급에 따른 노동분업의 구조 속에서 재산과 권력을 갖고 있지 않은 ‘주변화된 집단’들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생명을 살리는’ 여성

농성중반에 접어들면
서 싸움은 더 빈번해졌다. 농성으로 몇 주 동안 공사를 못해 경제적으로 피해를 보고 있던 시공업체 측은 공사를 방해하는 농성단원들을 업무방해죄로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여성들의 분노는 더해만 갔다. 여성들이 느끼는 분노의 근원에는 자신들이 살기 위해 삶터를 지키겠다는 것이 ‘왜 죄가 되는가’에 대한 부당함과 억울함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런 부당함과 억울함은 여성들로 하여금 ‘왜 자신들이 여기에서 공사장의 인부들과 실랑이를 벌이며 죽기살기로 해창산을 지키려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계기로 작용했다.

“차 못 다니게 차 길에가 앉어 있었더니 나를 막 끗고(끌고) 다니길래 차 앞에가 누워버린 거지. (…) 경찰도 안 무섭고 어떤 놈도 안 무섭고, 인자 대통령이 와도 안 무서울 정도야? 왜 막었냐? 나 먹고 살라고 막었다. 니네들은 다 배우고 똑똑하고, 권력 있으니까 돈 벌지만 우리는 뭣 모르고 가서 하루 벌어 하루 살은께 그게 우리의 만족인데 그것마저 뺏어 가면은 우리는 어떻게 하냐고? 진짜 우리 목숨을 끊은 거나 다름 없는 거지. 뭐 살인이 달리 살인이여.” (D씨)

D씨는 여성가장으로 많은 빚을 안고 있는 상황이었다. 황폐화된 시화호를 다녀온 후 새만금 반대운동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강한 확신과 정당성을 갖고 있었다.

“나는 보상 얘기를 잘 안 쓰는 게 이 자연을 보호하고 이 생명을 살리자는 그런 뜻을 가지고 지금 운동을 하잖아. (…) 왜그냐면은 생명 때문에, 이 생명을 살리고, 참 하느님이 정말로 귀한 걸 주셨는데 사람의 힘으로 파괴시키고 이걸 막는다는 것은 좀 그렇잖아. 그러니까 내 뜻은 그거여. 나도 생명을 귀하게 여기자.” (D씨)

그녀는 해창산 농성을 ‘생명을 살리기 위한 운동’으로 인식하고 있다. 갯벌을 자신의 생명줄로 여기며 살아온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생명은 갯벌과 바다의 생명들과 연결되어 있고 그런 갯벌을 지키기 위한 해창산 농성은 ‘갯벌의 생명을 살리는 운동’인 것이다. 농성 단원들과의 상호작용과 저항 경험의 의미화를 통해 그녀는 자신을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그래서 이러한 생명들을 살리는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 정체화하게 된 것이다.

‘갯살림’은 지속되어야 한다

여성들의 ‘갯벌 지키기’와 ‘해창산 농성’은 갯벌과 자신들의 삶이 맺어온 연결(관계) 고리를 다시 잇기 위한 여성들의 노력과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여성들의 자신들의 삶과 갯벌의 관계를 다시 연결시키는 것은 새만금 간척사업이라는 현재의 개발을 다시 보고, 갯벌을 다시 회복하는 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여성들은 새만금 간척사업을 “수많은 생명을 죽이는 잔인한 짓”으로 정의하고 있다. 자신들은 갯벌 속에서 자라는 생명들에 의존해 갯벌과 더불어 살아왔다고 이야기하는 이 여성들은 새만금 간척사업과 같은 인간에 의한 자연파괴는 인간 스스로의 목숨을 단축시키는 행위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새만금 간척사업은 마을 공동체의 붕괴를 의미한다. 새만금 방조제로 갯벌이 막히게 되면 마을 주민들은 떠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고향을 등지고 사람들이 떠나면 그레마을 공동체가 해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들은 생계가 막연해지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바닷일 이외에 특별한 기술이 없는 이들은 도시나 다른 지역으로 간다 해도 '노숙자'나 '도시 빈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바다와 갯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자신들의 살길이자 마을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일임을 여성들은 주장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의 토대인 갯벌을 파괴하면서까지 지역이 발전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지역의 발전은 갯벌을 보존함으로써 가능한 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갯벌을 지키고 보존할 때, 자신들의 마을이 발전할 수 있고 전북이 발전되며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고 여성들은 말한다.

갯벌에 의지해 삶을 살아온 여성들에게 ‘뻘땅’은 단순한 생계수단, 돈벌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 개인적인 생각은 이 새만금만큼의 갯벌이 있는데다가 나를 그냥 아주 이주만 시켜줬으면 쓰겄어. (아, 새만금..) 갯벌만큼만, 이 뻘이 있는 데만큼만. 거그다 나를 이주만 시켜주면 나는 더 이상…만약에 그럴 경우에는 현금도 필요 없고…진짜 나는 그러고 싶어. 그래 가지고 내가 죽을 때까지 바다에서 그냥 조개 잡고 그것 먹고, 나 그러고 살고 싶어. 아무 필요 없어. (…) 진짜 바다하고 같이 뭐 대답은 못 들어도 그냥 바다하고 같이 이야기도 하고 그냥... 진짜 그러니까 나는 그러고 살고 싶어서...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 그 속에서 살다가 죽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E씨)

삶의 절박함을 넘어 비장함이 느껴진다. 남편의 죽음으로 혼자 다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고 자식들을 가르쳐야 했던 막막한 상황에서 갯벌은 그녀에게 삶의 의지와 희망을 줬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해주는 마음의 안식처였다. 이 여성에게 갯벌은 자신의 삶 그 자체, 그리고 살아갈 의지와 힘을 주는 그런 공간인 것이다.

여성들의 삶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는 새만금 갯벌 ‘살림’은 새만금 간척사업으로부터 인간을 포함한 뭇 생명들의 삶터인 갯벌(자연환경)을 지키고 파괴된 갯벌을 보살피며 가꾸는 것임과 동시에, 이제까지 인간-자본-남성의 이해에 가려 억압당하고 가치 절하됐던 자연과 여성을 비롯한 ‘타자화된 것’들이 갖는 긍정성과 가치를 살려내는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새만금 갯벌 ‘살림’은 단지 여성들의 책임과 실천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자연과 인간의 삶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윤리를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 실천해 나갈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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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10/13 [00:41]  최종편집: ⓒ 일다
 
Tilly 03/10/13 [02:13] 수정 삭제  
 
연재 기사 즐겁게, 꼼꼼히 보았습니다. 많은 걸 배울 수 있었고, 무엇 보담도 갯살림이 반드시 지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redArrow 03/10/13 [05:43] 수정 삭제  
  아 정말 열받죠.
삶의 터전이자 자연의 보고인 갯벌을..
들인돈이 아깝다고 더 훼손하고..

정말 무슨 생각으로 하는건지..
블루 03/10/14 [21:34] 수정 삭제  
  갯벌의 여성들이라고 해야하나요?
기사를 통해서 갯벌의 여성들의 경험과 노동과 투쟁이 생생하게 전달되었습니다.
새만금 공사는 중단되고, 바다와 갯벌은 살려야 한다는 메시지도 어느 때보다 강하게 전달이 된 것 같습니다.
연재기사 잘 보았어요


미완 03/10/18 [04:05] 수정 삭제  
  자연과 닮은 여성, 자연은 자궁처럼 모든 것을 키워낸다.
그점에서 자연은 그것을 모태로 인간인 여성과 남성,
그리고 모든 생명체들이 살아갈 터로 존재하고 있다.

자연에 저항하는 것이 아닌 공존을 위한 생각의 전환이
더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땅을 아스팔트로 막아버리고
산을 깍아내리고 갯벌과 물길을 막아 인간이 살 땅을 늘린다 한들
개발이라는 괴물을 만족시킬 방법이 있겠는가.
소통없이 개발이라는 한쪽 방향으로의 추구가 먹히던 시대는
이미 지나지 않았는가

이익창출이라 한들 자연만큼 영원한 것이 있겠는가
자연에 비하여 하잘 것 없는 한시적인 이익을 위해
인간이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고 자연의 이양권을 쥔양
거스려 짓밟으려는 집착과 우월성에 끝이 있겠는가
덜함이 없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서있고 누리고 있는
주변을 보면 알것이다.

사람이 늘어나는 만큼 그 배수가 아닌 몇곱절의 파괴를
자연을 향해 해야 하는 인간의 생활권, 항상 우선권을 주어야 하는가.
결정권을 자연으로부터 이양해 오는 과정이 평화와 공존이었는가.

원주민에게 몇푼 쥐어주고 그들을 장구한 세월동안 먹여주고 입혀준
자연을 치라고 한쪽 손에 칼을 들려주는 것이 지역 발전인가
실업을 줄였다고 말할 수 있겟는가. 일시적인 일자리가 아닌
끊임없이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줄 수 있겠는가.


그들의 눈을 막고 귀를 막아 자연과의 소통을 차단한 오염물질은
자연의 심성과는 먼 인간의 악마적 본성이다. 자신만의 순이익을
계산해 내게 하여 반목하게 하는 개발과 그에 따른 번지르르한
이익창출의 유혹이 뱀의 혀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또한 이미 특혜라면 특혜일 수 있는 가진자들의 방관은 새만금이 없어지던
아니던 상관없는 수구집단으로 머물게 하는 것이며 여전히 가지지 못한자들의
생존 몸부림은 걸림돌로 치부되어 치워버려야 하는 또하나의 제거 대상이 되는 것이다.

새만금 갯벌을 메우기 위해 그 주변 해창산을 깍은 것은 또하나의
폭력이며 파괴다. 이렇게 줄줄이 엮이며 끊이지 않는 파괴의 연속을
잔잔한 물위에 이는 작은 파문이라고 여길 수가 없다.
멈출것이라 말 할 수가 없다. 이 기세로라면 이러한 인간의 오만으로라면
일파만파로 결국 후손들에게 죽음의 땅을 물려줄 수 밖에 없다.

노을이 지는 드넓은 갯벌이 도시인들에게 녹녹하며 배부른 낭만적 배경이라면
그곳에 몸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절실한 생활터전이며 목숨줄이라는 것이다.
하루 갯벌체험으로 자신의 즐거움만을 채우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이 그렇게 하잘것 없는 것이겠는가

이렇게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일 것 같았던 사람들속에서
작은 움직임 하나. 시작은 미비했으나 그 파문은 멀리 멀리 퍼져
전세계적으로 유일무일한 삼보일배를 이끌어 내었다. 그것을 통한
저항의 힘, 각성의 힘, 분명 그들은 자연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자연과 닮은 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피흘리며 마비되어 가는 그들의 감각을 일으켜 세운 자연의 울음소리...
극심한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그힘은 양심이었으며
굽힐 수 없었던 것은 자연을 향한 인간을 향한 그들의 넓고 깊은 사랑이었다.
몸으로 정신으로 보여준 자연을 향한 겸손이었다.


“내 개인적인 생각은 이 새만금만큼의 갯벌이 있는데다가 나를 그냥 아주 이주만 시켜줬으면 쓰겄어. (아, 새만금..) 갯벌만큼만, 이 뻘이 있는 데만큼만. 거그다 나를 이주만 시켜주면 나는 더 이상…만약에 그럴 경우에는 현금도 필요 없고…진짜 나는 그러고 싶어. 그래 가지고 내가 죽을 때까지 바다에서 그냥 조개 잡고 그것 먹고, 나 그러고 살고 싶어. 아무 필요 없어. (…) 진짜 바다하고 같이 뭐 대답은 못 들어도 그냥 바다하고 같이 이야기도 하고 그냥... 진짜 그러니까 나는 그러고 살고 싶어서...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 그 속에서 살다가 죽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E씨)

이처럼 자연과 하나되는 마음이 있을까.
어떤 거창한 말도 이 여성의 말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이것이 자연과 코드가 맞는 여성의 심성이다. 동화된 그자체로
자연이 되어 버린 여성...

그러한 여인들이 있는 곳 새만금 두레마을과 해창산 하리마을
몸으로 '생명살리기 운동' 으로 전개하는 투쟁..우리는
앉아서 그들의 절실함을 얼만큼 느낄 수 있겟는가.
바라보며 얼만큼 공감할 수 있겟는가.
우리모두는 알게 모르게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관심조차도 두지 않는다면 그 빚을 어찌 갚을까..

이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이미 새만금은 시뻘건 흙에 덮혀 죽음의
땅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약진(?)하는 건설의 현장으로 뒤바뀌어,
죽어간 생명체의 비명과 그곳을 터전으로 한 사람들의 한숨은
들리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어느것도 소외시켜서는 안되는 공존은 정말 어려운가.
개발의 주도자들이 진정 고뇌하며 살펴보앗는가 묻고 싶다.
과업이 뭐 그리 중요하관대 업적이 무에 그리 중요하다고 국책으로
세습되어 대업이라 명명했는가....


이얌 03/10/18 [18:20] 수정 삭제  
 
예전에 새만금에 대한 TV 다큐멘터리를 봤을 때보다 더 감동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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