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조이랜드의 세계로”

<페미니즘과 논다>③ 미술 연극 영화 추리게임이 페미니즘을 만날 때

박주연 | 기사입력 2017/11/14 [23:07]

“어서오세요, 조이랜드의 세계로”

<페미니즘과 논다>③ 미술 연극 영화 추리게임이 페미니즘을 만날 때

박주연 | 입력 : 2017/11/14 [23:07]

가을을 알리는 단풍이 자연스럽게 눈에 담긴 지난 10월 21일,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뒤섞여 있는 인사동을 지나, 외부인의 출입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는 ‘살기 좋은 나라, 조이랜드’로 입국했다. 입국 심사장에서는 조이랜드 입국을 환영하는 안내원들이 나의 신원을 확인한 후, 어떤 기호가 그려진 노란색의 종이띠를 손목에 채워주고 안전통행증을 건넸다. 이름과 아무 지장 없이 통행할 수 있도록 허가한다는 말이 적힌 안전통행증을 펼쳐보며 열려 있는 문 안으로 들어가던 그 때부터 나의 조이랜드 여행은 시작되었다.

 

▶ 조이랜드로의 입국을 허가하는 안전통행증 ⓒ박주연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바바라 크루거

 

안국역 근처에 위치한 아라리오 뮤지엄에서는 매달 “AM I ART&TALK”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지난 9월에 페미니스트 작가로 유명한 바바라 크루거의 예술세계에 대해 알려주는 “[AM l ART&TALK # 21] 바바라 크루거: I announce, therefore I am”가 열렸다. 10월에는 바바라 크루거의 예술세계에서 영감 받아 만들어진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AM l ART&TALK # 22] 바바라 크루거: 조이랜드”가 열렸다. 그 프로그램이 바로 조이랜드라는 세상으로의 여행을 제공한 곳이다.

 

이 조이랜드 프로그램을 탄생하게 한 작가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는 개념예술(conceptual art), 포스트모던(postmodern), 페미니스트 예술(Feminist Art)에 큰 영향력을 끼친 작가 중 한 명으로,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지난 11월 1일부터 뉴욕시에서는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으로 만들어진 메트로카드를 5만 장 한정 발매하기도 했다. 이렇듯 예술적 가치와 상업적 성공을 함께 이뤄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준 작가다.

 

바바라 크루거는 1945년 뉴저지에서 태어나 자랐다. 시라큐스 대학(Syracuse University)에 입학해 디자인 및 예술 관련 수업을 듣다 1년 만에 그만두고, 뉴욕으로 거처를 옮겨 파슨스 스쿨(Parsons School of Design)에서 본격적으로 디자인을 공부했다. 그리고 하우스 앤 가든(House and Garden), 어퍼처(Aperture), 마드무아젤(Mademoiselle) 등의 잡지사에서 디자이너 및 편집자로 일했고, 22살의 나이에 리드 디자이너가 되는 등 실력을 인정받았다.

 

1973년 세계적인 비엔날레로 손꼽히는 휘트니 비엔날레(Whitney Biennial)에 작품이 전시되고 주목을 받았다. 1976년 뉴욕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거처를 옮긴 후에는 시와 글쓰기 공부에 집중했고, 이후 사진과 글을 조합하여 강렬한 메시지를 던지는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특히 소비주의와 여성 이슈에 대한 관심과 목소리 내기는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 중 주요한 부분이다.

 

지금까지도 페미니즘 운동에서 인용되곤 하는 “너의 편안함은 나의 침묵이다”(Your comport is my silence, 1981), “너의 시선이 나의 빰을 때린다”(Your gaze hits the side of my face,1981), “우리는 또 다른 영웅은 필요 없다”(We don't need another hero, 1985), “너의 몸은 전쟁터다”(Your body is battleground, 1989), “태어나지 않은 이에게 생명을, 태어난 이에게 죽음을”(Pro-life for the unborn, Pro-death for the born, 2000-2004)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바바라 크루거는 작품을 통해 여성들의 목소리를 내고자 했으며 많은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조이랜드 입국

 

바바라 크루거의 예술의 영향을 받아 지금 우리 여성들의 이슈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만들고자 아라리오 뮤지엄과 세컨드필름매거진이 조이랜드를 만들어 냈다. 세컨드필름매거진은 온라인과 미디어를 중심으로 재생산되는 여성에 대한 일상적 차별에 주목하며, 여성캐릭터와 관련한 상상력의 빈곤을 지적하고, 더 나은 캐릭터를 위한 대안을 이야기하는 잡지다. 세컨드필름매거진 측은 게임과 영화, 연극이 복합된 이번 프로그램을 만들게 된 계기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라리오 뮤지엄으로부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에 대해 제안을 받았고 내부적으로 논의를 시작했어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연사를 모시고 강연을 여는 것이었지만, 그냥 앉아서 이야기를 듣는 고루한 형식은 피하고 싶었어요. 조금 더 대중적이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고, 그 때 떠올랐던 것이 ‘방탈출 게임’이었습니다. 요즘 젊은 층들이 흔히 소구하는 방탈출 게임의 포맷을 가져오고, 미스터리 추리 게임들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텔링 방식을 입혀보자는 것이 저희의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만들어진 조이랜드는 많은 사람들이 살기 원하는 꿈의 나라 같은 곳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는 사회, 그래서 모두가 행복한 사회다. 조이랜드에 입국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조이랜드 시장으로부터 환영사를 듣는 것이었다. 시장은 조이랜드를 탄생시킨 장군에 대한 아름다운 스토리를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장군이 전쟁 속에서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조차 사람들을 구하려 한 행적들을 늘어놓으며, 어릴 적 자신이 그 장면을 보고 얼마나 감명 받았는지 말하면서 조이랜드는 그렇게 만들어진 곳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시장의 환영사가 끝나자마자, 조이랜드 입국을 안내했던 안내원 중 한 명이 등장한다. 안내원은 사실 자신은 비밀요원이며, 조이랜드의 환상은 다 거짓이라고 조심스레 폭로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활동이 위험에 처해있으니 자신을 도와 조이랜드의 어두운 비밀을 밝혀내자고 말한다.

 

▶ 미션을 공유하는 비밀요원 ⓒ세컨드필름매거진

 

새로운 세상으로의 신비한 여행이 어두운 지하에서 옹기종기 모여 비밀요원 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탐험으로 변한 것이 그 순간부터였다.

 

미션 수행

 

첫 번째 미션은 비밀요원의 친구이자 또 다른 비밀요원이라고 하는 ‘미스 봉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이다. 천만 관객 돌파로 유명한 영화 <베테랑>(2014)에서 장윤주가 연기하는 ‘미스 봉’은 황정민이 연기하는 주인공 ‘서도철’과 같은 팀으로, 영화 속에서 주요 사건을 해결하는 경찰 중 한 명이다. 하지만 내내 ‘미스 봉’이라고 불린다. 다른 남성경찰들이 ‘윤 형사’, ‘왕 형사’로 불리는 와중에 ‘봉 형사’가 아닌 ‘미스 봉’으로 명명되는 것이다.

 

게다가 위장 전문이라는 특징이 무색하게, 여성성을 부각시키는 약간의 역할을 할 뿐 그 외에는 팀에 민폐가 되거나 웃음을 제공한다. 이 첫 번째 미션은 여성경찰이라는 이유로 ‘미스 봉’으로 불리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지, 우리에게 물어보는 것 같았다.

 

‘미스 봉’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우리는 일단 방에 잠입한 후, 다이어리 속에서 이름을 찾아낼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 실마리를 가지고 입국 시에 안전통행증과 함께 받았던 조이랜드 지도를 펼쳐놓고 암호를 풀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사이인 팀원들과 갑자기 머리를 맞대고 암호를 풀어야 했지만 어색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집중했다.

 

다른 팀원의 활약으로 지도에서 찾아낸 글자의 조합으로 우리 팀은 ‘미스 봉’의 이름이 ‘봉윤주’라는 것을 알아냈다. 비밀요원이 건네 준 빈 메모지에 그 이름을 써서 다시 조용히 건넸다. 문제를 풀었다는 기쁨도 잠시, 비밀요원은 다시 우리에게 다른 암호를 찾으러 가야 한다고 했다.

 

▶ 암호를 풀어야 하는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참가자들 ⓒ세컨드필름매거진

 

두 번째 미션은 자신의 꿈을 접어야 했지만 바가지 긁는 아내가 되어 버린 ‘미옥’이 남긴 숫자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셜록을 꿈꾸는 만화방 주인인 ‘대만’과 레전드 형사 ‘태수’의 협력과 사건 해결을 다룬 <탐정: 더 비기닝>(2015)에서, 셜록과 같은 탐정이 되는 꿈을 안고 사는 ‘대만’의 아내로 일과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미옥’의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끊임없이 꿈을 이루고자 하는 한 사람과, 그 사람을 끊임없이 지원해줘야 하는 사람의 관계와 위치 그리고 그것이 어떤 성별에 의해서 어떻게 고착되는지를 생각해 보게 했다.

 

그리고 마지막 미션은 수많은 남자들로 하여금 순수하고 깨끗한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한없이 미화할 수 있게 만든 <건축학개론>(2012)에서 일명 ‘쌍년’이 되어버린 서연에 대한 암호를 푸는 것이었다.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였던 서연의 이야기는 지워지고, 서연을 좋아했던 승민의 상처받은 첫사랑에 대한 아픔이 부각되었던 그 이야기에서 우리가 읽어내지 못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던 서연의 악보가 잔뜩 쌓인 방에 놓여있는 책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를 보면서, 난 서연이 이제라도 그 때 그 사건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기를, 그 상처에서 치유되었기를 간절히 빌었다.

 

▶ 서연의 짐인 악보와 책이 있던 마지막 미션의 공간 ⓒ박주연

 

우리는 쫓아오는 조이랜드 관계자들을 피해 숨어서 책의 제목과 관련된 퀴즈를 풀고 거울을 이용하여 암호를 풀었다. 그 암호를 푸는 여정에서 만난 세 명의 여성캐릭터들이 나를 거울에 비췄을 때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프로그램을 기획한 세컨드필름매거진은 거울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거울은 방탈출 게임이나, 공포추리 게임에 흔히 등장 하는 트릭이에요. 진실에 거의 다가왔다고 느끼는 순간, 다시 한 번 그 진실을 뒤집어 보는 행위는 게임 자체에서 느끼는 희열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패러다임, 편견이 뒤집히는 느낌을 받게 주죠. ‘내가 당연하다고 느꼈던 점들을 다시 한 번 뒤집어 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조이랜드 극에서 이 거울 트릭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최종 퀴즈까지 다 풀고 나서 팀별로 각자 발견한 암호를 비밀요원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 암호가 차례대로 화면에 나타났을 때 조이랜드에서의 여정이 참여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조이랜드가 업그레이드시켜 준 나의 페미력

 

“Your comfort is my silence(당신의 평안은 나의 침묵으로 이루어진다)는 바바라 크루거의 유명 작품 중 하나에요. 바바라 크루거는 사진과 텍스트를 결합하는 예술 형식을 통해서 사회제도적 권력에 항거하는 아티스트이고 이 작품은 남성지배 구조하에 이루어진 ‘평안’이 결국에는 억압받고 고통 받는 자의 ‘침묵’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요. 다수가 침묵하고,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해서 폭력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겠죠. 저희는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억압과 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이 메시지와 결을 같이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고, 이 점을 토대로 극을 구성하게 되었어요.” (세컨드필름매거진)

 

조이랜드에서의 여정, 조이랜드에 숨겨진 이야기를 파헤치는 모험의 여정은 그렇게 끝났다. 연극, 영화, 게임이 절묘하게 조합을 이룬 약 세 시간 동안 영상을 보면서 화가 나기도, 머리를 굴리느라 힘들다고 한숨을 내쉬기도, 웃기도, 성취에 만족하며 우쭐해지기도 하면서 다양한 감정 또한 배출되었다.

 

조이랜드는 조이랜드가 이야기하는 그런 조이랜드가 아니었다. 조이랜드에서의 시간은 또한 ‘모두가 평등하면서도 각자의 위치를 지키는 나라, 나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여주는 나라’라는 말로 포장된 것들을 들추고, 지워지는 것들을 찾아내야 하는 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는 시간이기도 했다.

 

보통 온라인 게임에서 미션을 수행하고 나면 ‘항마력이 10% 상승했습니다’ 같은 어떤 능력이 상승한다. 조이랜드를 통해서 나의 페미력은 조금 더 상승했다. 다음엔 어떤 일이 나의 페미력을 올려줄지, 벌써부터 즐겁게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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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2017/11/16 [20:54] 수정 | 삭제
  • 우와 재밌게 읽었어요!
  • 2017/11/15 [09:50] 수정 | 삭제
  • 베테랑 최근에 봤는데... 장윤주 역할이 존재감이 작지 않았어요. 실제 경찰에서 그런 호칭은 안 쓸텐데 화 나네요. 이제 대중매체에서 '미스*' 이런 호칭은 없어져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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