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보는 혈통 물려받은 소녀의 성장기

만화리뷰- 말리의 <도깨비 신부>

김윤은미 | 기사입력 2003/10/22 [17:23]

귀신보는 혈통 물려받은 소녀의 성장기

만화리뷰- 말리의 <도깨비 신부>

김윤은미 | 입력 : 2003/10/22 [17:23]
작년 10월 단행본 1권이 출간된 말리의 <도깨비 신부>는 잡지연재만화가 아니다. 만화 판에서는 잡지 연재가 작품 인지도를 높이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니만큼, 처음부터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그러나 만화가 괜찮으면 소리 소문 없이 독자들이 입을 모으는 법. 또한 최근 추세는 잡지보다 오히려 단행본 쪽에 볼 만한 만화들이 많다. 말리의 <도깨비 신부>, 변미연의 <미스티>가 그 대표적인 예. <도깨비 신부>에 대해 많은 독자들이 오랜만에 괜찮은 만화가 등장했다고 평가했으며 작년 독자만화대상 신인부분을 수상하기도 했다.

<도깨비 신부>는 소재의 채택이나 그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 매우 성실한 만화다. 이를테면 <오후>에서 호평 속에 연재 중인 송채성의 <미스터 레인보우>의 경우, 소재의 신선함 때문에 독자의 시선을 끈다. <미스터 레인보우>의 주인공은 낮에는 유치원교사로 밤에는 바에서 일하는 게이인데, 게이의 삶에 대한 사실적인 접근은 한국 순정만화에서 거의 최초다. 이에 반해 <도깨비 신부>는 외가 쪽의 귀신 보는 혈통을 물려받은 소녀의 성장 이야기라는 설정을 채택했다.

귀신을 본다는 것은 호러 장르의 단골 손님이다. 그런데 <도깨비 신부>는 많은 순정 호러들처럼 귀신을 보는 소녀의 소외감과 귀신들이 지닌 외로움, 인간의 숙명성과 슬픔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귀신에게 자신의 몸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투쟁적인(!) 소녀를 그린다. 소녀는 자신의 몸을 먹으려고 달려드는 객귀(객사한 귀신)와 싸우며, 할머니와 스님, 도깨비 연구가는 그녀에게 귀신에 대한 지식을 줌으로써 그녀를 돕는다. 이쯤 되면 주인공이 여자라는 것만 제외하면 모범적인 소년 성장물의 서사에 더 가까워진다.

도입부는 전통적으로 용신을 상대로 만선을 기원하는 전통이 있었던 어촌을 무대로 외지 무당이 용신굿을 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미 퇴락할 대로 퇴락한 어촌마을에서는 마을 자체적으로 용신굿을 하지 않은 지 15년이 넘었다. 여기에 도시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소재를 제공하겠다는 방송제작진과 이름 한 번 팔아서 유명인이 되겠다는 욕심 가득한 무당이 달라붙은 것. 작가는 이를 통해 진심 어린 굿판이 이제는 한낱 오락거리에 지나지 않는 세태를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외지 무당의 부름에 나타난 용신은 한 눈에 외지 무당의 욕심을 알아보고 버럭 화를 낸다. 한편 마을의 제일 가는 무당이었던 옥분 할머니와 그녀의 손녀 선비는 용신과 친밀한 대화를 나눈다. 물질적인 외지 무당과 진심 어린 토속 무당의 대비라니, 무조건적인 전통 옹호와 과거에 대한 향수를 이야기하는 게 아닌지 한 순간 의심스러워진다. 그러나 작가는 용신과 옥분 할머니, 그리고 옥분의 신인 마을 장군이 죽는 모습을 연달아 그리면서 ‘이미 사라져 가는 것들은 사라질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전통적인 것을 자꾸 끄집어 내 ‘그때가 좋았다’는 식으로 비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의와 성실함을 중시하는 <도깨비 신부>의 우직함은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다.

죽은 사람은 사라지고, 이제 남은 것은 객귀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고집스런 소녀 신선비다. 신선비의 삶은 고전적인 서사이론의 설화 분석틀로 설명이 가능하다. 신선비는 주인공으로서, 귀신을 보는 데다 객귀가 탐내는 몸을 가졌다는 점에서 고난을 겪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녀는 할머니의 죽음 때문에 도시로 떠났다는 점에서, 객귀에게 자신의 몸을 빼앗기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한다는 점에서 모험의 여정에 섰다. 게다가 그녀는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일종의 외상으로 남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기억까지 해결해야 한다.

그녀의 방해자는 일차적으로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객귀들이며, 그녀를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는 아버지와 새 가족이다. 가난하지만 정이 가득한 시골에서 자라난 신선비와 대조적으로 아버지와 새 가족은 도시의 물질적이고 메마른 삶을 대변한다. 어릴 때부터 이상한 것을 보고 고함지르기 일쑤였던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시하는 또래 친구들 역시 그녀의 방해자다.

한편 주인공을 도와주는 조력자는 그녀의 할머니와 그녀가 키우던 개다. 할머니와 개가 죽자 갑자기 스님처럼 도를 닦은 신비한 인물이 나타나 객귀를 복숭아 나뭇가지로 몰아내고, 그녀에게 ‘두려움이 객귀를 부른다’는 진리를 던져주기도 한다. 한편 뒷산에서 우연하게 만난 도깨비 연구가는 그녀에게 음과 양 사이에 존재하는 '도깨비'라는 존재를 알려줌으로써 그녀가 객귀와 한판 승부를 벌일 수 있는 힌트를 준다. 즉, 신선비의 조력자는 토속적인 존재, 도를 닦는 사람처럼 성숙한 인간, 그리고 근대과학의 극단적인 법칙성을 벗어나 변화무쌍한 현실을 볼 줄 아는 과학자와 지식인이다.

<도깨비 신부>에서는 여성작가에게 흔히 기대하게 되는 예리한 관찰력이나 일상의 불안과 억압에 대한 감지와 같은 요소를 찾을 수는 없다. <도깨비 신부>는 고난을 극복해서 성장하는 전형적인 서사라는 점에서 성별 구분이 중요하지 않은 만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맡아왔던 무당이라는 소재를 다뤘다는 점, 마을 장군과 용신에게 입바른 말을 할 줄 아는 할머니와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당당한 선비 같은 여자들, 속시원하다.

옥분할머니는 마을을 지키는 무당이라는 직책 때문에 평생 마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괴로운 삶을 살았지만, 손녀만큼은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게 해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은, 의지의 소유자다. 그래서 선비에게 추근대는 바다 도깨비를 마음껏 대야로 내리친다. 고집 가득한 눈동자가 인상적인, 어떻게든 객귀에게 먹히지 않고 살아날 것으로 예상되는 손녀 신선비도 좋다.

작가는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진 성실함과 신의, 진심 어린 것, 전통에 대한 아쉬움이 크며, 따라서 근대화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인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도깨비 신부>는 여성주의적 서사로 따지면, 전통적으로 소년이 차지했던 성장물을 고집스런 여자 주인공과 여자로 이어지는 외가 혈통으로 대체해 불만과 아쉬움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다른 층위의 의미에서) 근대적이다.

<도깨비 신부>는 성실한 만화인 만큼 복선을 충분히 깔았으며, 그 때문에 앞으로의 전개과정을 예측할 수 있다. 드디어 뒷산에 도깨비불로 그 존재를 드러낸 도깨비들과의 만남을 통해 선비는 객귀와 한판 승부를 벌일 것이며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정리할 것이다. 그러니 제목도 <도깨비 신부>겠지. 그리고 어머니를 멀리했던 아버지와 화해는 아니라도, 적어도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관계로 변하지 않을까. 이렇게 예측할 수 있다 해도 나는 단행본 3권을 기다리게 될 것 같다. 구역질 나는 객귀들을 자세하게 표현한 꼼꼼한 그림체하며, 때를 놓칠세라 제공되는 귀신과 무당에 대한 지식은 다른 만화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없는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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