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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의 언어로 만들어진 한 편의 시 “소성리”
일상의 호흡으로 사드 반대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박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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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렸을 땐 시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땐 교내 동시 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고, 중학교 때 좋아했던 사람에게 -물론 매우 유치한- 시를 쓴 쪽지를 떨리는 마음으로 전하는 일이 하루의 행복한 일과였다. 국어 시간에 시를 배우며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 것도 꽤 재미있었다.

 

나에게 시는 미사여구로 꾸며진 아름다운 글귀 같은 거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런 미사여구를 즐길 여유를 잃어버렸을 때, 시도 나의 세계에서 사라졌다. 시 대신 ‘성공한 30대가 되기 위해 그 전에 해야 하는 것’ 같은 자기계발서나 ‘영어 이메일 쓰는 기본법’ 같은 외국어 공부 책을 선택해야 했으니까.

 

그러다 정말 책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했을 땐 소설에 손이 갔다. 수줍게 시를 쓴 편지를 전하던 존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같은 가격인데 이 책(시집)은 왜 이렇게 얇아?’라고 ‘가성비’를 따지거나,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기보다는 조금 더 직관적인 스토리가 긴 문장으로 설명된 글을 선택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지금 누군가가 ‘좋아하는 시가 뭐냐?’고 물으면 아마 꽤 오랜 시간 머뭇거리다 결국 대답하지 못할 거다.

 

▶ 다큐멘터리 영화 <소성리>(박배일 감독, 2018) 포스터 ©시네마달

 

시와 멀어진 내가 굳이 이런 고백을 하는 건, 다큐멘터리 <소성리>(박배일 감독, 2018)에 그 이유가 있다. 

  

사드 배치가 강행된 소성리 마을

 

<소성리>는 사드(THAAD, 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가 본격적으로 얘기되기 시작했던 2016년 이후, 뉴스 및 신문에 자주 등장하게 된 경상북도 성주 ‘소성리’라는 마을에 사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아래 냉각 상태였던 남북 관계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북한이 핵실험을 지속적으로 강행하자, 박근혜 정부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사드 배치’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이후 2016년 7월, 한국과 미국은 사드 1개 포대를 주한미군에 배치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고, 그 장소는 성주 소성리 일대로 확정되었다.

 

성주 주민들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결국 ‘롯데스카이힐 성주CC골프장’이 사드 배치 부지로 최종 결정되었다. 그리고 2017년 4월, 한국과 미국 양국 군인들에 의해 사드 포대가 전격 배치되었다. 박배일 감독에 따르면 사드 배치는 완료되었으며, 지금은 그와 관련된 업무를 진행할 군인들이 주둔할 숙소 및 관련 시설을 짓고 있다고 한다.

 

<소성리>는 사드 배치에 반대하며 지난한 투쟁을 계속해 오고 있는, 소성리에 살고 있는 할머니들을 조명한다. 이렇게 설명하고 나면 이 영화가 어떻게 구성되었을지 짐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사회운동이나 투쟁을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가진 이미지나 플롯이 그려진다고 말이다.

 

하지만 난 이 영화를 보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시’라는 존재가 떠올랐다. 보통 영화를 보고 나면 어떤 이야기를 봤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번엔 시를 읽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성리에서 살아가는 할머니, 여성농민으로 불리지만 각자의 이름을 가진 존재들의 언어로 채워진 아름다운 시를 말이다. 

 

▶ 다큐멘터리 영화 <소성리>(박배일 감독, 2018) 중에서 ©시네마달

 

할머니의 언어가 나에게 왔다

 

<소성리>에 등장하는 도금연, 임순분, 김의선 할머니는 각자 다른 개성과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불알을 찼으면 불알 값을 해야지!”라고 소리치는 강렬한 장면을 남긴 도금연, 농민운동가와 부녀회장의 카리스마를 가진 임순분, 나도 모르게 따라하고 싶어지는 귀여운 아침 체조를 선보이는 김의선.

 

영화는 ‘할머니’라는 하나의 이름으로만 묶어버릴 수 없는 그들의 개성과 목소리를 담담하게 담아낸다. 8월 24일 인디스페이스에서 진행된 ‘감독과의 대화’에서 박배일 감독은 “등장인물들이 세상을 보는 시선을 담아내기 위해 카메라의 위치를 낮게 조정하기도 했다”고 말했는데, 그래서인지 관객은 그들의 세상 속에 자연스럽게 초대된 느낌을 받게 된다.

 

할머니들의 세상은 평온하다. 벌레소리, 풀 소리, 바람소리가 귀를 간지럽히지만 화면은 복작거리지 않는다. 할머니의 발걸음만큼 천천히 흘러가는 그 세상 곳곳에서 공간과 시간의 여백이 보인다. 화면 속 모습이 생각보다 너무 평화로워서 ‘이 영화는 사드 배치에 대한 투쟁 이야기가 아니었나?’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는 순간, 마을 어귀에 걸린 현수막에 적힌 ‘사드’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때 비로소 생각할 수 있었다. ‘아, 할머니들의 세상에 사드가 이렇게 들어온 걸까! 평온한 삶 속에서 어느 날 예고 없이 이렇게 나타났을까.’

 

▶ 다큐멘터리 영화 <소성리>(박배일 감독, 2018) 중에서 ©시네마달

 

<소성리>의 가장 큰 매력은 어떤 특별한 장치나 극적인 연출 없이, 비어있는 걸로 보였던 여백들을 할머니들의 이야기와 언어로 차곡차곡 채운다는 점이다. 숨겨진 의미가 하나 둘 밝혀지는 것처럼 ‘소성리의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게 아닌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이유, 그들에게 남아 있는 전쟁의 기억 등이 등장한다.

 

‘빨갱이가 진짜 뻘건(빨간) 사람은 아니더라’는 이야기들은 때론 너무 생생하고 시대적 이질감이 느껴져 알아듣기 힘들기도 했고,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목소리엔 힘이 담겨져 있었고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요동치고 있었다는 거다.

 

그 언어에 매료되고 나니, 맨발로 흙을 밟으며 모종을 심던 나이 드신 할머니들이 아스팔트 길거리에 앉아 ‘사드 가고 평화 오라’고 외치며 경찰에게 둘러싸인 모습이 화면에 등장했을 때 그저 애처롭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모습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걸. 지금 내가 불법촬영이 없고 여성이 임신중지를 결정할 수 있는, 여성의 몸과 건강이 존중 받고 성차별에 노출되지 않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외치듯이 할머니들도 우리 모두의 평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우리의 두려움을 건널 수 있도록 해주는 다리”

 

<소성리>는 그렇게 천천히, 계속 생각할 여지를 던져주며 나를 자극하고 인도했다. 어떤 이야기를 쭈욱 읽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구성해가며 채워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기다 반짝이는 소성리의 모습을 통해 아름다운 미사여구의 맛도 봤다.

 

▶ 다큐멘터리 영화 <소성리>(박배일 감독, 2018) 중에서 ©시네마달

 

시인이자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로 목소리를 냈던 오드리 로드는 “여성들에게 시는 사치가 아니”라며 시의 중요성을 논하면서, “시는 단순히 꿈이나 환영이 아니라, 우리 삶을 뼈대로 해서 만들어진 구조물이다. 그것은 미래의 변화를 위한 토대이자, 이전까지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을 건널 수 있도록 해주는 다리”(책 <시스터 아웃사이더> 중, 후마니타스)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도 <소성리>는 한편의 시였다. “미래의 변화를 위한 토대”를 만들어내기 위해 지금 오늘도 평화를 위한 투쟁을 하고 있는 소성리 할머니들은 “우리의 두려움을 건널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제 이들의 언어가, 더 많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오랜만에 시 한편을 읽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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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8/29 [13:59]  최종편집: ⓒ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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