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라는 전쟁, ‘여성’이라는 예술

여성시인들이 불러낸 ‘내 책상 위의 천사들’

김영옥 | 기사입력 2019/02/25 [21:23]

‘여성’이라는 전쟁, ‘여성’이라는 예술

여성시인들이 불러낸 ‘내 책상 위의 천사들’

김영옥 | 입력 : 2019/02/25 [21:23]

※ 필자 김영옥 님은 <이미지 페미니즘: 젠더정치학으로 읽는 시각예술>의 저자이자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연구활동가입니다. 이 글은 <여성이라는 예술: 우리는 각자의 슬픔에서 자란다>의 발문을 약간 수정한 내용입니다. [편집자 주]

 

‘위험한, 위협받는’ 여성들, 새로운 전선을 만들다

 

‘여성해방’이라는 키워드가 다시 붉게 타오르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희망과 분노, 열정과 다짐의 심장박동 소리가 울린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임을 알리는 불꽃의 이어짐, 2015년부터 지금까지 ‘페미니즘 리부트’라고 명명된 새로운 역사의 흐름이 도도하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에서 메겔 문화운동으로,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에서 2018년 미투(#MeToo) 운동으로 이어지는 여성인권투쟁은 한국여성(인권운동)사에 돌이킬 수 없는 혁명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새롭다고 말했지만 또한 전사(前事/前史)를 이어 받아 이어 쓰는 전승의 역사이기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 새로운 것은 ‘페미니즘 리부트’(손희정, <페미니즘 리부트>, 나무연필, 2017)라고 불리는 맥락이다. 참고문헌들을 앞에 두고 ‘참고문헌 없음’을 선포하게 만든, 또한 길게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짧게는 40여 년 전부터 한국사회에 명백히 존재해왔던 여성(주의)운동의 역사를 앞에 두고 ‘페미니즘 원년’을 선포하게 만든 이 맥락 말이다. 이는 한국 가부장제 사회와 그 안에서 시도된 페미니즘 도전들의 역설과 모순, 곤경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 역설과 모순, 곤경을 딛고 격랑의 변증법적 움직임 한가운데서 ‘연결되어 있음’의 믿음이 서서히 개화하고 있다. 이 믿음은 “등 뒤로 기나긴 끈이 이어져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 등과 등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깊이’ 닿아 있다는 확신”(박연준, 「춤을 추리라, 여성의 모습으로」, <여성이라는 예술>, arte, 2019)으로 지각된다.

 

지금 여기, 한국이라는 지역에서 페미니즘을 리부팅하는 주체들은 자기 안에 결빙된 채 갇혀있던 다양한 시간대의 동시적 깨어남을 경험하고 있다. 상이한 시간의 경험과 이야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풀려나면서 만들어내는 형상들은 놀랍게도 구체적이다.

 

상처와 고통과 불안의 또렷한 자국들이 서로를 알아보기 시작하면서 이미 짐작하고 있던, 그러나 두루뭉술하거나 추상적이어서 정치적 집단행동으로 점화하기 어려웠던 ‘위험한, 위협받는’ 여성의 삶이 삭제되거나 축약되지 않은 모습으로 광장에 서게 되었다. (그동안 ‘위험한 여성’은 남성의 수직적 자아를 위협하는, 특히 성적으로 위험한 여성으로 기호화되었으니, ‘여성’이 현실과 상징 모두에서 겪는 모순과 역설, 곤경은 바로 이 ‘위험한 여성’에서 응축되어 나타났다.)

 

▶ 강성은, 박연준, 백은선, 이영주 공저 <여성이라는 예술: 우리는 각자의 슬픔에서 자란다>, arte(아르테), 2019

 

예술계의 페니스 파시즘, ‘여성’이라는 전쟁

 

다른 이들보다 상징계와 더욱 밀접한/밀착된 삶을 사는 여성창작자들은 그만큼 더 ‘위험한, 위협받는 여성의 삶’을 살아낸다. 일과 사생활의 경계도, 작업 결과와 작업 과정 그리고 작업 과정 중 만나는 사람들과의 경계도 불분명한 이들의 일-삶은 그만큼 치명적인 분열과 강도 높은 긴장을 내장한다.

 

상징계가 이들에게 부여하는 자리 자체가 내부의 외부, 또는 가장자리이기에, ‘여성’ 삶이 처한 저 불/가능성의 복잡함을 고발하거나 해체하려면 이들은 내부와 외부에 동시적으로 거주하는 자신들의 디아스포라적 실존을 고통스럽게 견뎌야 한다. 때때로 이 견딤은 실패해서 ‘이중 첩자’의 배신으로 미끄러지기도 한다. 성공한다고 해도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비(非)문법, 비(非)체계를 독해 가능하게 만들어야하는 난제는 매번 고스란히 남는다.

 

문단 내, 미술계 내, 연극계 내, 영화계 내 등등 문화예술의 각 영역에서 전개되는 미투 운동이 특히 더 ‘다루기 어려운’ 건 이 때문이다. ‘예술의 이름’으로, 예술의 특수성과 고유성의 이름으로 행해진 많은 성/폭력들은, 예술이 무엇인지, 예술의 특수성과 고유성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의미투쟁에서 결정권을 가지지 못했던 여성들의 ‘동의’를 알리바이로 삼기 일쑤고, 강력한 저항과 고발이 있다 해도 ‘화해’로 마감되기 일쑤였다.

 

강요된 동의, 강요된 화해에서 강요는 지우고 동의와 화해만 선전해대며 ‘예술가가 되고 싶은, 예술가로 남고 싶은 여성들’을 위협해온 예술‘계’의 페니스 파시즘! 이 소용돌이 속에서 “‘여성’이라는 전쟁”은 “‘여성’이라는 예술”을 포개고, 이렇게 탄생한 “‘여성’이라는 전쟁-예술”은 현실을 살아내는 여성들의 기기묘묘하고 위험한 곡예와 기예(technê의 아이러니)를 가리킨다.

 

이제 여성창작자들이, 활자로 이미지로 몸으로 악기로 일상과 상징계 모두에서 ‘자기만의 기호학’을 향해 ‘분투’하던 이 여성들이 일어서고 있다. 서로서로 팔을 엮어 ‘우리’라는 칼리그람을 형상화하고 있다. 각자도생의 안간힘인 듯 여겨지던 분투는 비로소 ‘우리의 정의로운 분노’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우리의 경험, 우리의 감응, 우리의 작업’이 어떤 둘레세계(Umwelt)에서 누구/무엇에 반응하며 탄생하는가를 보다 명료하게 알리는 시도들이 확산되고 있다. (당연히 이 ‘우리’는 차이를 억압하거나 부정하지 않는 구성적 ‘우리’다.)

 

여성예술인연대(AWA)가 성폭력‧가정폭력 추방주간 기념 특별전으로 꾸렸던 아카이빙 전시회 <SPEAK OUT: 2016년 10월 19일부터>(2018년 11월 28일~12월 9일 서울 동대문구 삼육빌딩 1층에서 열림), 그리고 네 명의 여성시인들이 자신들의 시어에서 함께 울리고 있는 다른 여성들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있는 책 <여성이라는 예술>도 이런 시도 중의 하나다.

 

여성창작자들과 그들의 뮤즈

 

문화예술계에서 여성은 늘 남성창작자의 뮤즈로 호명되곤 했다. 여성이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고 싶을 때, 그 고유성의 신화적 기원으로 삼을 수 있는 뮤즈는 그렇다면 과연 누가 될 수 있는가.

 

▶ 강성은, 박연준, 백은선, 이영주 공저 <여성이라는 예술: 우리는 각자의 슬픔에서 자란다>, arte(아르테), 2019

 

<여성이라는 예술>에서 발언하고 있는 강은선, 박연준, 백미선, 이영주는 그들과 동행하며 그들을 지켜주었던 ‘내 책상 위의 천사들’을 소개한다. 선배, 스승, 친구, 동시대 여성 –어느 시대에 속하든, 어느 연령대이건, 어떤 관계성으로 부르든, 이 여성들은 다형적(multi-figural) 형상으로 여성시인 자아를 만드는 뮤즈들이다. 이들은 현재진행형으로 상징계에 무수한 틈새와 이론(異論), 이명(異鳴)들을 새겨 넣고 있는 중이다. 19세기를 살았던 나혜석이나 이사도라 덩컨, 버지니아 울프도 보이고, 21세기를 살고 있는 김혜순이나 나탈리 포트먼, 레이디 가가도 눈에 띈다.

 

[이 책에 나혜석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나혜석의 이름도 함께 부르며 저자들의 기억 작업에 동참한다. 나혜석은 연인으로, 비/시민으로, 어머니로, 예술가로 분열된 정체성을 살아야 했던/하는 여성자아를 지구/지역 차원에서 사유할 수 있도록 이끄는 중요한 거울이다.

 

여성학자 김은실은 나혜석이 결혼 후 ‘구미여행’을 떠나던 시기와 시몬 드 보봐르가 <제2의 성>을 집필하던 시기,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쓰며 여성의 지적 시민권을 요구하던 시기를 ‘동시대성’이라는 관점에서 함께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김은실 외,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 휴머니스트, 2018) 이들은 각기 다른 역사적 공간을 살았지만 그 공간을 성평등하게 전환시키고자 사유하고 모험한 동시대 여성들이었다.

 

또한 페미니스트 감독 김소영은 다큐멘터리 <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2004)에서 ‘나혜석 콤플렉스’를 역사적으로 맥락화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여전한 가부장제에 맞장을 뜨(고자 하)는 나혜석 후예들의 자율성 추구와 해방 의지에 길을 내주고자 시도한다.]

 

<여성이라는 예술>의 저자들이 위에 언급한 뮤즈들과의 조우를 고백하는 것은 비가시적이었을지언정 면면히 이어져온 또 다른 ‘창의성 계보’에 자신을 기입하는 행위다. 이 고백은 동일자적 자아를 구축하기 위해 여성뮤즈를 동원했던 남성창작자들의 기만적 소영웅주의와는 다른 길을 간다. 여성창작자들의 자아는 거미줄처럼 이어지고 연결되며, 물결도 각양각색인 다원을 그린다.

 

“실비아 플라스를 생각하면 가끔 나는 내가 실비아 플라스 같다. 그녀와 영혼을 함께 쓰고 있는 것처럼 친밀한 느낌이 든다. (…)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면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 혹은 연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어쩐지 그녀와 내가 포개져 있다고 여긴다.”(백은선, 「서로를 지키고 스스로를 지키는 일」, <여성이라는 예술>, arte, 2019)

 

백은선의 이 ‘고백’은 일종의 사랑고백이다. 그녀의 뮤즈 실비아 플라스를 향한 ‘마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 ‘마음 고백’은 여성시인들이 자신들의 여성뮤즈들과 맺는 관계의 어떤 전형을 드러낸다. 여성시인의 시적 화자인 ‘나’는 이 세계에서 매 순간 추방당하는 무수한 몸-목소리들이 등장하는 무대이며, 여성뮤즈들은 때론 뮤즈로 때론 추방당한 유령으로 이 연행에 동참한다.

 

▶ 김혜순 <여성, 시하다>, 문학과지성사, 2017

 

이것이 여성이 ‘시하는’ 고유의 방식이다. 이 고유의 방식을 김혜순은 “내가 시를 쓰기 시작하면 영감이 아니라 유령이 솟아오른다. 꿈속을 보게 하는 희미한 빛처럼 저쪽의 사물들이 피어오른다”(김혜순, <여성, 시하다>, 문학과지성사, 2017)는 말로 표현한다. 남성창작자들이 영감을 위해 뮤즈를 불러내고, 그 뮤즈-영감을 밟고 ‘이쪽/내부/아버지 나라’의 사다리를 오르고자 할 때, 여성창작자들은 여성뮤즈들과 함께 유령들의, 즉 ‘저쪽/외부/바리데기 나라’의 실존을 언어화하려 한다.

 

<여성이라는 예술>의 저자들도 각자의 언어로, 형상으로, 행동으로, ‘투신’으로 저 외부의 실존을 언어화하고 있다. “‘여성’이라는 전쟁-예술”을 몸으로 연행한다. 이 연행은 통렬한 역설이다. 그동안 남성들의 근대적 주체화 과정의 일환으로 발명된 ‘여성이라는 무질서’(캐롤 페이트먼, <여자들의 무질서>, 이평화,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2018)나, 포스트근대적 자기반성의 일환으로 호명된 ‘여성이라는 은유’(김애령, <여성, 타자의 은유>, 그린비, 2012), 고대부터 후기근대에 이르기까지 남성/인간의 섹슈얼리티 이해를 위해 변주되어 온 ‘여성이라는 병, 히스테리’(지그문트 프로이트, <히스테리 연구>, 김미리혜 옮김, 열린책들, 2003) 등을 떠올려보자.

 

이 일련의 발명들과 호명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성’이라는 전쟁-예술”은 국지전인 동시에 전면전이다. 이 투쟁이 성공해야 저 ‘여성이라는 ooo’ 어법들의 전복이 가능하다. 이 전복이 힘 있게 지속되어야 여성들을 ‘oo녀’로 부르곤 하는 관행이 멈출 수 있다. 그러한 관행을 증식시키는, 그러한 관행 속에서 증식하는 여성혐오를 막아낼 수 있다.

 

기적은 일어난다. 기다림은 다시 시작되었다.
드물게 느닷없이 하강하는
천사에 대한 그 오랜 기다림이
-실비아 플라스, 「장마철의 까마귀 떼」, <실비아 플라스 시 전집>(마음산책, 2013)

 

서로 이름을 부르며, ‘서로가 서로의 용기’임을 확인하며, 때론 마주보고 때론 같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나’들이 “‘여성’이라는 전쟁-예술”을 ‘여성’도 ’예술‘도 자유롭고 평화로운 어떤 충만한 표현의 나라, 삶의 시간으로 이끌 것이다, 실비아 플라스가 노래했듯이.

 

여성시의 ‘터’, 특별한 만찬으로의 초대

 

“살면서 종종,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거지? 라는 물음이 떠오를 때가 있다. 지금 내가 갖고 싶은 건 아름다운 책이 아니라, 아름다운 책을 읽던 그 시간이다. 책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 압도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 시절.”(강성은, 「여성이라는 전쟁」, <여성이라는 예술>, arte, 2019)

 

강성은의 이 문장은 나와 내 페미니스트 친구들이 함께 누렸던 ‘아름다운 시간’으로 나를 데려간다. 거의 16, 17년 전 우리는 안티고네로 분장하고 크레온 왕과 설전을 벌였으며, 차학경의 <딕테>와 파울 첼란의 <죽음의 푸가>를 돌아가며 낭송했다. 시어들은 비장하고 검고 치열했지만 서로의 목소리로 그 시어들을 되새기는 ‘우리’는 행복했다.

 

분노와 저항과 희망을, 보장 없는 시도의 담대함을 공유하며 우리는 ‘시스터 아웃사이더’(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 주해연 박미선 옮김, 후마니타스, 2018)의 정체성을 기뻐하고 축하해줄 수 있었다. ‘절망도 저항의 일종’(이영주, 「환상통」, <여성이라는 예술>, arte, 2019)임을 서로 확인해주는 시간이었다.

 

<여성이라는 예술>의 실체를 탐색하는 여성시의 ‘터’는 여성주의 인식이 싹트고 자라나는 ‘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성자아’의 구성과 현실 속 경험을 염두에 두고 있는 여성이라면 누구라도 저자들이 ‘사랑의 마음’으로 불러내고 있는 저 여성뮤즈들과 대화를 나누며 설레었던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특별히 초대받고 특별히 대우받았던, 조촐하면서도 빛나는 그 만찬의 에너지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비명이 날개가 될 수 있도록’(이원, 「시를 쓰면 비명도 날개가 된다」, <최소의 발견>, 민음사, 2017, <여성이라는 예술>에서 재인용) 서로를 경탄하며, 서로의 발걸음을 돕는 만찬은 끝나지 않았다. 점점 더 많은 유령들과 추방당한 자들과 몫이 없는 자들이 이 만찬에 초대받고 있다. 오늘 초대장을 보낸 이들은 강은선, 박연준, 백미선, 이영주. 고마워요, 그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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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04 [21:35] 수정 | 삭제
  • 멋진 시도군요!
  • return 2019/02/28 [19:17] 수정 | 삭제
  • 재밌다.. 글 쓴 시인들의 시도 볼 수 있는지 궁금.. 여성시인들의 작품들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 ㅇㅇ 2019/02/28 [12:02] 수정 | 삭제
  • 매력적인 글이라 미소가 절로 나네요. 만찬에 이미 초대받은 기분이랄까요, 책을 꼭 읽어보고 싶구.. 김혜순, 이원, 실비아 플라스의 책들도 찾아 읽어보고 싶은 독서 욕구가 무럭무럭 나네요.
  • 2019/02/26 [10:41] 수정 | 삭제
  • 제인 캠피온 감독의 영화 내 책상 위의 천사가 생각나는 글이네요. 원작인 재닛 프레임의 자전적인 소설이 나왔길래 읽어봐야지 했었는데, 미루지 말고 읽어야겠습니다. 여성이라는 예술이랑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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