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규모의 ‘노동시간 단축 실험’ 그 효과아이슬란드 톺아보기④ 주 4일제와 ‘부모휴가’라는 이름의 육아휴직올해 추석 연휴, 역대급으로 많은 사람들이 해외를 오갔다. 엿새 동안 인천국제공항을 드나든 사람만 122만 5천여 명으로,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추석과 작년 추석보다도 12% 이상 증가한 수치다. 해외여행 수요가 증가한 데다, 이틀만 더 휴가를 내면 최장 9일까지도 쉴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연휴에나 겨우 쉴 수 있거나, 연휴여도 쉴 수 없는 사람들은 일과 삶에 대한 어떤 바람을 품고 있을까.
코로나 이후 원격 근무나 하이브리드 워크(원격 근무와 사무실 출근을 혼용), 주 4일제나 4.5일제 등 다양한 근무 방식에 대한 시도와 상상력이 확대되었다. 올 초, 시민사회단체와 노동조합, 연구단체 등을 중심으로 출범한 ‘주 4일제 네트워크’(4daynet.co.kr)에서도 ‘과로와 장시간 노동 해소, 노동시간 단축, 일과 삶의 균형, 성평등과 돌봄,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4일제 법제화와 노동시간 체제 전환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금은 전체 근로자의 80% 정도가 주 5일제로 일하고 있지만, 앞으로 최대한 많은 이들이 줄어든 노동시간만큼 삶의 다른 영역들도 잘 돌보며, 연휴가 아닌 때에도 자유롭게 휴가를 즐기는 날도 상상해 본다.
아이슬란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 ‘노동시간 단축 실험’ 주 4일제 정착 직장 관리자와 직원들, 노동시간 어떻게 단축할지 소통해가며 결정
그날이 현실이 된 아이슬란드에서는 전체 근로자의 90% 정도가 주 4일 또는 35~36시간 일하고 있다. 2014년부터 2021년까지 실시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노동시간 단축 실험’으로 정착된 결과다. 일주일에 노동시간을 4~5시간 단축하자, 생산성과 서비스는 유지되거나 향상됐고, 아이슬란드 사람들의 웰빙과 일상에도 여러 긍정적 효과가 생겨났다.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진 것만으로 가정에서의 스트레스가 감소했고, 싱글 부모는 자녀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으며, 근로자 본인과 직계가족뿐만 아니라 실험 참가자와 접촉하는 조부모와 친구 등에게도 유익한 영향을 미쳤다.
시범사업 시작 전부터 관리자는 ‘가족은 우리가 가진 전부’라는 태도로 근로자에게 좋은 조건을 제공할 의향이 있었고, ‘일과 가정생활의 균형을 잘 맞추지 않으면, 직장에서 불만이 생기고, 직장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노동시간 단축은 관리자에게도, 직원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실험 과정에서 직장 관리자와 직원들은 노동시간을 어떻게 단축할지 소통해 가며 결정했고, 사회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의 전환이라는 점에 동의하며 사회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유서 깊은 의회 민주주의와 정책 실현을 위해 협력이 필수적인 비례대표제, 다당제의 정치 체제는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창구가 되어주었다.
무엇보다, 지금 한국의 상황과 가장 큰 차이라 한다면, 의사결정 과정에 모든 이해당사자가 참여해 이념보다는 실용적인 관점에서 타협을 도모했고, 정부에 대한 높은 신뢰가 이 타협을 촉진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한국 부모가 미취학 자녀와 하루 함께하는 시간 평균 48분, 아버지는 교감시간 단 6분, 부모의 퇴근 기다리며 학원 전전하는 아이들
반면 한국의 경우, 장시간 노동문화와 성 불평등, 치열하고 경쟁적인 생존 환경은 결국 출산과 육아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연간 합계출산율 0.72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에 달한 건, 어쩌면 이러한 환경에서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과다. 더욱이 문제의 원인이라 제시된 것들을 바꾸어나가려는 움직임은 미미하고 감감하다.
한국 부모가 미취학 자녀와 하루에 함께 하는 시간이 평균 48분, 아버지가 아이와 교감하는 시간은 단 6분이라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최근 CPBC(가톨릭평화방송)에서 방영한 특집다큐 ‘시간제 엄빠의 나라’에서 여름방학임에도 부모의 출근 시간에 맞춰 일어나 태권도, 피아노, 공부방, 영어학원 등 2~3개 이상의 학원을 전전하며 저녁 7~8시까지 부모의 퇴근을 기다리거나, 주중에는 아예 부모의 돌봄이 불가해 할머니 집에서 지내는 아이들의 모습이 소개되었다.
아이들이 혼자 어느 정도 생활할 수 있는 정도로 자란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다음엔 미래 자녀에게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경쟁적인 교육 시스템이 도사리고 있다. (관련 기사: 한국 청년 50% “한국 교육 시스템, 자식이 겪게 하긴 싫어”, YTN, 2023년 4월 27일자)
청소년들의 주당 평균 학습 시간은 40~60시간으로 어른들의 노동시간보다 훨씬 긴 데다, 10대가 70대보다도 체육을 덜 할 정도로(문화체육관광부 2023년 국민생활체육조사) 신체를 쓰고 움직이는 시간도 부족하다. 작년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사교육비로 지출된 금액만 아이슬란드 GDP와 맞먹을 정도니, 자녀를 더 원하는 이들도 쉽사리 마음먹기 어렵다.
따라서 돌봄 정책도 “부모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아이를 키우고 싶은지, 아이들에게는 어떤 방식으로 돌봄을 받고 싶은지 적극적으로 물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육아휴직’ 제도를 만들었다고 해서 절로 실효성이 생겨나는 게 아니라, 제도를 운용하고 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을 관심 있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한국 남성이 쓸 수 있는 육아휴직 기간은 52주로 OECD 국가 중 가장 길지만, 실제 육아휴직 사용률은 가장 낮고, 부부의 고용 형태에 따라서도 큰 격차가 있으니 말이다.
어떻게 하면 남성도 육아휴직을 사용하도록 할 수 있을까? ‘사용하거나 잃거나’ 방식 도입, 90% 이상 아버지들 육아휴직 사용
사람들의 피부로 체감되는 살아있는 정책과 제도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아이슬란드의 육아휴직 제도가 자리 잡기까지의 섬세한 설계와 명확한 지향점을 살펴보자. 일과 삶, 그리고 가족의 공존을 위해 필요한 ‘육아휴직’ 제도는 아이슬란드에서 ‘부모휴가(Parental Leave)’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동성 커플이 차별받지 않도록 성 중립적인 문구를 사용하자는 요구가 반영되어 2006년부터는 법에 ‘아버지(father)’나 ‘어머니(mother)’라는 표현 대신, ‘부모(parent)’라는 단어가 사용된다고 한다.
아이슬란드는 한국보다 6년 빠른 1981년 육아휴직 제도가 생겼다. 당시 최대 5개월의 유급 육아휴직 중 일부라도 쓴 남성 양육자는 0.2~0.3%에 불과했다. 어떻게 하면 남성도 육아휴직을 사용하도록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몇 차례 법을 개정한 끝에, 2021년 ‘사용하거나 잃거나’(use it or lost it) 방식을 도입해, 현재는 90% 이상의 아버지들이 육아휴직을 사용하고 있다. 부모 각각 6개월(180일)씩 유급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고, 이 중 6주(42일)에 해당하는 기간만 서로에게 양도할 수 있다. 즉, 한 부모가 자신의 육아휴직 기간 중 최대 6주만 상대에게 이전할 수 있다. 두 양육자의 육아휴직 사용 독려를 위해, 이전 가능한 기간 외에는 각자가 사용하지 않으면 소진되도록 설계되었다.
남성 양육자에게도 동등한 조건의 육아휴직이 없다면, 여성이 가족과 커리어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거나, 사실상 1차 보호자(primary carer) 역할을 맡게 될 수 있다. 적절한 보상을 받고 함께 쓰는 육아휴직은 일하는 부모가 자녀의 생애 초기부터 보다 평등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중요한 관문이 된다. 한 남성은 “아기가 아침밥을 먹는 데 한 시간이나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초보 부모는 모든 루틴에 익숙해질 시간이 정말 필요한데, 풀타임으로 일한다면 불가능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How Iceland invested in parental leave, and lessons the UK can learn, i, 2023년 1월 8일자)
양도 불가능한 육아휴직 제도에 대한 일부의 불만도 물론 있다. 남성 양육자가 여성 양육자보다 소득이 월등히 높을 경우, 여성이 남성의 6개월까지 합쳐서 1년 동안 육아휴직을 쓰고 남성은 계속 일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합리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부부간 큰 소득 격차로 인해 자녀 양육 과정에서 퇴직하는 여성이 많은 우리나라라면 더더욱. 그러나 아이슬란드 육아휴직 제도를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목적은 자녀가 부모 모두로부터 보살핌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고, 여성과 남성 모두가 가정 안팎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부모가 모두 육아휴직을 사용하면서 어떤 변화가 생겨났을까? 북유럽 국가의 성공적인 공공정책에 관한 연구(de la Porte, Caroline, and others, 2022)에 따르면, 유급 육아휴직이 끝난 이후에도 자녀 출생 첫 3년 동안 부모의 돌봄 분담이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육아휴직은 부모의 일과 돌봄 참여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고, 부부의 안정성 또한 높아져 법 시행 전과 비교해 이혼 가능성이 상당히 낮아졌다.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제도 시행 전에 태어난 청소년보다 이후 자라난 청소년이 아버지와 의사소통하기가 훨씬 쉬워졌다고 밝혔다.
아이슬란드의 부모휴가 제도에서는 부모 모두가 자녀를 양육할 수 있는 권리와 성평등이 최우선적인 가치로 고려되었다. 이는 아버지도 자녀와 보다 친밀한 관계를 맺도록 하고, 직장에서 여성이 육아로 인해 차별받을 확률을 크게 낮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양육자가 함께 부모휴가를 나누어 쓰도록 한 설계는 출산율을 늘리려는 정책이라기보다는, 출산 전후 여성이 감당해야 할 부담을 사회가 함께 짊어지고자 하는 성평등 정책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성공한 제도와 정책의 핵심에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바람을 담아낸 가치와 철학이 있었다.
아이슬란드는 좁아 든 격차에 안주하지 않는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나아갈 길의 청사진을 다 같이 그려나간다. 그러면서 모두의 행복을 위해 되묻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타협하지만, ‘많이 왔으니, 이 정도쯤은 괜찮아’라는 타협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함께 만들어온 변화가 자랑스러우면서도, 여전히 바꾸어 갈 것투성이다. 여성에서 멈추지 않고, 논바이너리와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위해 법을 제정하고, 아이슬란드에 정착해 살아가는 이민자의 삶과 권리에도 시선을 둔다. 함께 만든 변화는 충분히 만끽하고 기념한다. 올해로 40회째를 맞은 아이슬란드의 가장 큰 유소녀 축구대회 ‘시마모이디드’(Símamótið)에서처럼. ‘평등’과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모두에게 유익으로 돌아온다는 경험은 이토록 강렬하고 귀하다.
옷으로 상징되는 지위와 상징 벗고 일상에서 공동체 감각 일깨우는 장
다시 한국으로 눈을 돌려본다. 더 빠른 배송, 더 많은 선택지, 더 편리한 서비스가 차고 넘친다. 조금 자란 아이를 데리고 키즈카페에 간다. 몇 시간만 놀아도 10만 원이 훌쩍 넘는데,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키즈카페는 예약도 쉽지 않다. 소방관, 요리사, 파일럿 등 장래 희망을 탐색하는 데에도 티켓 발권이 필요하다. 아이가 좀 더 크면, 학원 말고도 공부한다고 스터디카페에도 갈 터다. 가랑비에 옷 젖듯 익숙해진 풍경이다. 놀이터는 예약하지 않아도, 동전 한 개 없어도 언제라도 놀 수 있었는데, 어느새 익숙한 많은 것들이 상품이 되어 팔리고 있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건네거나, 물건을 두고 와 사는 대신 빌리는 것도 누군가에겐 낯선 일이 되고 있다. 놀이와 돌봄과 사랑이 상품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소비 외의 방식에 대한 상상력이 가파르게 좁아진다.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인식하고 발견해 간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갈수록 더 알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묻고 그에 맞는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맞지만, 그 전에 사람들이 충분히 본인의 욕구나 지향점을 탐색하고 알아갈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져 있는지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중요시하는지 충분히 경험해 보고, 나다움을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타인의 다름을 존중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모두가 사회 구성원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 감각할 수 있을까. 타인과 온전히 연결되어 볼 기회, 타인에게 기여하며 공동체 안에서의 나를 인식해 볼 수 있는 기회, 서로의 다른 생각과 관점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기회가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하다.
끝으로 아이슬란드인들의 일상에 공동체의 감각으로 스며 있는 공공 온천과 수색구조대를 소개한다. 아이슬란드 동네마다 위치한 공공 온천 '쉰드뢰이그'(sundlaug)는 대부분 무료거나 입장료가 저렴하다. 이곳에선 누구든 옷으로 상징되는 사회의 모든 지위나 상징을 내려놓고 서로를 마주한다. 쉰드뢰이그에서 이민자들은 지역의 관습을 배우고, 초보 부모들은 유경험자의 조언을 구하며, 지방의회 의원들은 유권자들을 만난다. 세대와 계층의 경계를 넘어 누구와도 연결되고 소통할 수 있는 장이 되어준다.
함께 살아간다는 감각을 부러 의식하려 하지 않으면 금세 잊힐 것 같은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인간다움을 잃기 쉬운 시대가 되어가는 가운데,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어떤 세상을 살고 싶은지,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 질문과 생각을 나누어 볼 때다.
[필자 소개] 정이예슬. ‘함께 배우는 사람’. 나에게도, 지구에게도 다정한 삶의 방식을 배우고 지속해갈 수 있도록 돕고자 클라이밋(Climeet)을 창업했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지역사회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하는 사회적경제·기후환경·ESG 교육 콘텐츠를 개발하고 교육 워크숍을 진행한다. 2023년에는 울산 남구 장생포에서 지역문화기획단을 조직하고, 마을축제 ‘2023 다이버-시티(Diver-city) 장생포’를 열었다. 기후위기, 젠더,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탈성장과 다양성, 시민정치로 관심사를 넓혀가고 있다.
이 기사 좋아요 17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