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소중한 녹지, 뻐꾸기 우는 천문대 숲 지킨다

‘천문대의 자연을 지키는 모임’ 대표 곤도 이츠코

나카무라 토미코 | 기사입력 2024/10/04 [17:08]

도쿄의 소중한 녹지, 뻐꾸기 우는 천문대 숲 지킨다

‘천문대의 자연을 지키는 모임’ 대표 곤도 이츠코

나카무라 토미코 | 입력 : 2024/10/04 [17:08]

일본 도쿄도 미타카시(三鷹市)에 올해로 개관 백주년을 맞이하는 국립 천문대가 있다. 10만 평 부지에는 잡목림이 펼쳐져 있는 이곳. 봄에는 오래된 벚꽃 가로수가 무서울 정도로 아름답고, 뻐꾸기가 우는 여름에는 몸을 서늘하게 식혀준다.

 

그런데 이 숲을 앗아가는 재개발이 지금, 주민 부재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다. 학교를 통폐합하고 의무교육학교(2016년 도입된 초중고 통합교)를 여기에 지으려고 한다고. 한 명의 교장 밑으로 상명하달 방식으로 업무가 추진되는 등 교육적으로도 문제가 많은 계획을 왜, 소중한 생태계를 파괴하며 만드는 것일까.

 

▲ 일본 도쿄도 미타카시에 있는, 개관 백주년을 맞은 국립 천문대. 10만 평 부지에 오래된 잡목림이 펼쳐져 있는 이곳에 재개발이 진행 중이다. [구글맵 캡쳐]

 

천문학자 남편과 천문대 부지 내 관사에서 오래 생활해온 곤도 이츠코(近藤伊津子) 씨는 재개발 계획의 중단을 요구하며 작년 6월, 동료들과 ‘천문대의 자연을 지키는 모임’을 만들었다.

 

시민에게 정보를 제공하지도 않고, 목소리를 듣지도 않고, 환경을 파괴하여, 공공공간을 경제공간으로 바꾸는 재개발. 도지사 선거의 쟁점이기도 한 도쿄 메이지신궁 외원(外苑) 재개발(수령 100년 이상의 나무를 1천 그루 가까이 베고 야구장, 럭비장 등을 새로 짓겠다는 계획으로, 시민들의 반대 여론에 부딪힘)이 그 대표적인 사례로, 유네스코의 자문기관인 이코모스(ICOMOS,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도 외원 계획을 철회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규모는 다르지만, 실은 일본 전역에서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올해 6월, 각지의 주민운동을 횡으로 연결하는 ‘커먼즈(commons, 많은 이들이 함께 사용하는 개방된 땅)의 녹지를 지키는 전국 네트워크’가 발족되었고, 곤도 씨가 이끄는 ‘천문대의 자연을 지키는 모임’도 참여했다.

 

천문대는 다마강 지류가 깎아낸 무사시노 고원의 절벽(고쿠분지 절벽선) 위에 있다. 희귀한 수목과 작은 동물들도 많다. 남측 절벽 아래로는 용수가 솟아 귀한 재래종인 미타카 오사와 고추냉이도 현존한다. 학교는 북측 지구에 짓는다고 하지만, 개발로 인해 용수가 마르게 되지는 않을까. 전문가들도 생태계 전체를 두고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미타카시는 침수 시 긴급 대피경로를 근거로 재개발 계획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지질학적으로는 문제가 있는 근거입니다. 생태계 전체에 대한 영향도 고려하지 않았고요. 불필요한 학교를 신설하기 위해 귀중한 수목을 쓰러뜨리고, 작은 동물의 거처를 빼앗고, 용수를 잃을 수도 있는데 말이죠.”라고 곤도 씨는 반박한다.

 

재개발의 배경에는 국립 천문대의 재정난도 있다. 2004년에 국립대학과 연구기관 등이 법인화 되면서 효율화의 명목하에 운영 교부금을 매년 삭감해온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인 것이다. 곤도 씨는 분개한다.

 

“돈을 군수산업에만 쓰고 있다. 이 나라는 마침내 전쟁을 향해가고 있다. (군사적) 이용 가치가 있는 천문대는 태평양전쟁에 대한 반성에 입각해, 군사와는 손을 잡지 않겠다고 정한 바 있다.”

그 맹세조차 뒤흔들어버린 재정난 때문에 천문대는 2019년, 시에 매각을 제안했고, 그것을 받아들인 시가 이 계획을 세웠다.

 

백 년이나 지켜져 온 숲이라면 그것을 보호하고 보존해서, 보다 좋은 상태로 자연공원을 만들어 후대에 넘겨주는 것이야말로 시의 사명이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천문대의 자연을 지키는 모임’에서는 후지이 에이지로(藤井英二郎) 치바대학 명예교수(환경식재학)을 비롯한 전문가를 초빙해, 천문대를 걷고 배우며 독자적으로 생태계를 조사하고 있다.

 

▲ ‘천문대의 자연을 지키는 모임’을 만든 곤도 이츠코(近藤伊津子) 씨. 1939년 조선 출생, 패전 후 네 살 때 일본으로 돌아왔다. 도쿄도 미타카시 거주. 약제사로 오랫동안 병원에서 근무한 후, 약국을 개업해 운영. 일하면서 28년에 걸쳐 ‘뻐꾸기 문고’를 자택에 개설했고, ‘생명의 전화’ 상담원, 국립암센터 자원봉사 등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사진: 오치아이 유리코 ©落合由利子)


직장과 지역에서 일으키는 변혁

 

시민운동은 처음이라는 곤도 씨지만, 직장과 지역에서 작지 않은 변혁을 일으켜왔다.

 

약제사로 일하던 국립도쿄제일병원(당시)에서는 간호사가 중심이 되어 원내의 낡은 기숙사를 탁아소로 개조했다. 덕분에 간호사도 안심하고 출산하고 계속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일하면서 자택에 ‘뻐꾸기 문고’를 열어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을 읽고 만화 『맨발의 겐』을 가지고 원폭과 전쟁을 함께 생각했다.

 

그리고 마을에 약국을 열자, 사회로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이 곤도 씨를 찾아와 약국은 상담실이 되었다. 한번은 네팔인 모자가 찾아와 “의사가 일본어를 배운 다음에 일본에 오라.”고 말했다며 울먹였다.

“어머니가 일본어로 아이의 증상을 잘 설명하지 못했던 거예요. 그래서 12만 엔이나 하는 번역기를 샀어요.”

 

코로나19 시기도 힘들었다.

“‘곤도 씨, 다음에 봐요.’하고는 그날 밤에 자살한 분도 있었어요. 지금도 휴대전화에서 그분 연락처를 지우지 못했습니다.”

기업의 임원이었던 그 남성은 밤낮이 뒤바뀐 생활로 인해 직원들과 아이들에게 면목이 없다며 괴로워했었다.

“사회의 규범에서 벗어나도 괜찮잖아요. 현재 상황을 긍정하는 삶을 용납하지 않는 환경이 이상한 거죠. 하지만 밤낮이 뒤바뀐 일상을 바꿔보겠다고 마지막까지 센 약을 처방받으셨던 분이었어요.”

 

여성의 자립이 당연하지 않았던 시대에,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자라온 곤도 씨. 사회를 향한 시선도 공정하고 곧다. 식민지 하의 조선에서 태어나, 많은 아랫사람을 둔 집에서 풍요롭게 자라던 시절을 이야기할 때는 항상 “현지 분들의 희생으로 누렸던 생활”이라고 부연한다.

 

네 살 때 일본으로 귀환한 후에는 가난과 괴롭힘의 삶이었다. 험난한 삶을 살아낸 아버지의 입버릇은 “의사나 약사가 되라, 세계 어디에 가도 먹고 살 수 있다고 하셨어요. 딸을 대학에 보내다니, 도둑에게 돈 주는 꼴이라는 소릴 듣던 시대였어요.”

 

괴로움을 괴롭게 생각하지 않는 베짱이라며 웃지만, 곤도 씨는 항상 서로 나누는 사회를 그린다.

 

“이 쌀알만한 일본은 자연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요. 그러기 위해서 이 할머니가 싸우고 있는 겁니다.” [고주영 번역]

 

-〈일다〉와 제휴 관계인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기사를 번역, 편집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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