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소개] 김다영. 매체에 실리는 여성의 이야기와 매체에 실리지 않는 여성의 이야기의 간극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이 모이는 공간과 연결에서 이야기를 만드는 문화콘텐츠 기획자입니다.
시집의 마지막에는 종종 해설이 달린다. 본 시의 구절을 큰따옴표 따위로 따가면서 시를 더 파고드는 글들이다. 서한나 작가의 글을 읽으면 자주 답을 하고 싶었는데, 그건 어떤 감각에서 온 것이다. 응답하고 싶은, 나를 말하게 하는, 원동력 같은 감각.
정말로 원하면 오히려 어렵다. 서한나 작가의 글을 읽을 때면 속에 말이 차오르는데도 결국 그 말들은 임시 보관함에 넣어두기만 하고 정작 그를 만나면 “좋았다”고 했다. 그러면 그는 뭐가 좋았는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했다.
말하기 시작한 여자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이후로 친구들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익숙하게 여기는 것이 사실은 이상하지 않은지, 왜 그리고 무엇이 불편한지, 어떤 걸 진짜로 원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 사이에서 나도 입을 떼기 시작했다. 몇 년간 여자들의 말과 글, 영상, 흔적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세상에 기어코 흔적을 남기는 여자들이 같이 일을 하겠냐고 물으면 일단 하겠다고 했다.
그즈음 같은 강의실에서 공부하면서도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서한나 작가를 BOSHU(대전 페미니스트 문화기획자 그룹)에서 만났다. 대전 지역에서 여성주의 잡지를 만들며, 처음 여자들과 일을 시작했다. 여자들과 모여 일을 하면 편안함, 안정감을 느낀다. 그뿐만 아니라 자극도 받으면서, 서로의 영감이 된다.
여자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전하고 이어 붙였다. 나는 나와 화해해야 했으므로. 말하지 않고, 남들이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간편히 생각하던 때의 나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수많은 말을 듣고, 기록하고, 편집하는 날들이었다. 그리고 여자들의 말이 정확하게 전해지길 기다렸다. 축소되거나 확대되지 않길 바라며.
교문을 뛰어넘은 여성들
여성창작집단 페이즈(Faze)의 기획자로 참여한 이번 〈교문을 뛰어넘은 여성들〉전시에서도 무엇보다 여성 청소년의 말이 축소되거나 확대되지 않길 바랐다.
여성인권티움이 여성 청소년의 자립을 돕기 위해 운영하고 있는 ‘그냥공방’이 있다. 성착취 피해 및 생계형 범죄 예방을 목적으로 안전한 일 경험 활동, 생계비 지원, 관련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그곳에 다니는 여성 청소년은 가정환경의 어려움이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려움 등, 여러 이유로 도움을 필요로 한다. 학교를 그만둔 청소년도 있고, 드문드문 학교를 가는 청소년도 있으며, 열심히 학교에 다니면서 동시에 아르바이트 자리가 필요해 그냥공방을 찾은 이도 있다.
<교문을 뛰어넘은 여성들> 프로젝트를 기획한 이유는 청소년이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여러 편견을 깨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주했던 청소년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 했고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냥공방’ 자립 여성 청소년과 페이즈(Faze)는 지난 7월부터 만났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꺼내보는 작업을 하며, 나를 가로막고 있던 벽을 마주한 순간부터 청소년자립지원 공간 ‘그냥공방’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들을 돌이켜봤다. 〈교문을 뛰어넘은 여성들〉 전시는 각자의 이유로 학교 또는 가정에서 벗어나 자립을 시작한 여성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전시는 “왜 그냥공방에 오게 됐어?”, “사실은 말야 (심층 인터뷰)”, “그냥공방이 왜 필요해?”, “내가 살고 싶은 삶” 총 4개의 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는 일자리가 필요해서 그냥공방에 왔지만, 그 안에서 관계 맺는 방법도 배우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마다의 목표를 잡아가며 성장해 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모두의 자립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나’답게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곱씹을 수 있는 전시가 되길 바라며 다다(필자 김다영), 딴뚱, 산호, 이안 네 명의 팀원이 함께 기획했다.” -전시〈교문을 뛰어넘은 여성들> 프롤로그 중에서
“왜 그냥공방에 오게 됐어?”라고 청소년들에게 물으면, 돈이 필요해서 왔다는 대답이 먼저 돌아온다. 전시 오프닝에서 여성인권티움 활동가 후추는 “우리도 돈을 벌려고 직장에 가잖아요.”라고 말했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이상의 극적인 이야기를 기대하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닐까? 예상할 수 있는 이유로 청소년들은 그냥공방을 찾는다. 그러면서도 청소년들은 예상치 못할 정도로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나누어주었고, 용기를 내어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있었다. 어쩌면 임금을 떼이지 않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다른 대우를 받지 않으며, 일하는 사람으로 안전한 환경에서 일해보는 경험만으로도 청소년들은 자립을 시작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 사이에 내가 있다’
여성 청소년들이 가감 없이 남겨준 이야기 속에서 『드라마』를 읽었다.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인 동시에 나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봐주는 사람을 만났다. 이것이 하나로 합쳐지자 정말로 사는 것 같았다.”(서한나, 『드라마』, 184쪽)라고 말하는 작가의 글과,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공방과 다락을 다닌 후 날 이해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여성 청소년 화월 작가의 그림이 겹쳐 보였다.
친구들이 남긴 흔적들을 더듬어가며 내가 서 있는 곳의 지형을 파악한다. 우리는 많이 변해왔다. 서 있는 곳이 변하기도, 우리가 옮겨가기도 했다. 주변 사람이 보내는 물결에 요동치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모양이 불안정해 보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흐른다. 흐름에 몸을 맡기고 여전히 이동한다. 흔들려도 넘어지지 않으며, 파도가 높고 거칠 때는 혼자 같아도, 옆을 돌아보면 꼭 누군가가 있다.
“통하는 게 없고 엇박자라고 느꼈던 사람들과 보낸 시간이 실은 그런대로 괜찮았으며, 그 속에서 우정을 느끼기도 했다는 것. 내 공허감과 관련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과 예상하지 못한 순간 엇박자로 통할 때, 나는 공상을 깨고 그들을 만나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 사이에 내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한나, 『드라마』, 186~187쪽)
이 마지막 단락을 읽고 책을 덮는 순간, 전시장 문을 열고 책 속에 등장했던 우정4가 걸어들어왔다. 그게 전시와 책의 완성이었다. 나의 발화로 끝나지 않고 다른 화자와 이어지는, 말을 주고받는, 그리고 비로소 만나는 일들. 내가 땅에 발 붙이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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