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주류 질병 서사를 비판하고, 새로운 질병 서사를 쓰며 질병권(잘 아플 권리) 운동을 하는 ‘다른몸들’에서 미디어 속 질병과 장애를 이야기합니다.
이 영화를 본 건 꽤 오래 전의 일이다. 극심한 통증과 그로 인한 세상과의 물리적 단절,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온갖 종류의 폭력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몰라 쩔쩔매고 있었던 때였다. 아침마다 다시 눈뜨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던 나날들 중 하루였다. 나와 같은 질병(류마티스 관절염)을 앓고 있는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냈는지, 또 살아가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모종의 극복 서사를 기대하고 영화를 선택했던 것 같다. 질병의 고통을 이겨낸 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 확인해야 했다.
영화 포스터 속 모드는 파스텔 톤의 아름다운 배경 속에서 에버릿과 함께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영화를 ‘오해’하기엔 충분했다. 당시의 나는 간절히, 아주 간절히 행복하고 싶었다.
그런데, 영화 〈내 사랑〉(원 제목 Maudie[모디], 에이슬링 월쉬 감독, 2016)은 역설적이게도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영화를 한 번에 이어 보지 못했다. 영화 속 모드는 포스터 속 모드처럼 행복해 보이지도, 사랑받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 필사적이었다. 영화가 ‘모드의 생존기’를 그리면서도 파스텔톤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해석한 것에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다시 한 번 현실로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주체성이 박탈된 ‘몸’
주인공 모드는 선천적 장애와 진행형 질병을 가진 여성이다. 어릴 때부터 중증의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았던 모드는 신체 변형과 통증으로 누군가의 돌봄이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다.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모드의 몸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생존을 위한 노동도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으므로 그녀는 자기 돌봄도 불가능하다. 돌봄은 가족들에게 오롯이 맡겨지고, 가족들에게 모드는 짐과 같은 존재가 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오빠는 부모님의 유산을 멋대로 처분하고 모드는 숙모집에 맡겨버린다.
“못 데리고 있겠다.”
숙모가 모드의 오빠에게 건네는 이 말은 가족 내에서의 모드의 위치를 아주 잘 보여준다. 모드의 오빠도 “제 몸도 건사 못하는 애가”라는 말로 모드의 주체성을 차단해버린다. 사회가 질병과 장애를 가진 이들을 대하는 태도다. 그렇게 가족 안에서 모드는 그저 ‘돌봄을 당해야 하는 몸’으로 남겨진다. 모드가 자립을 위해 떠나던 그 순간에도 숙모는 “제 앞가림도 못하는 애가”라는 말로 모드를 주저앉히려 한다. 하지만 숙모에게 작별인사를 남긴 모드는 닫힌 문을 열어젖히고 그곳을 떠난다.
모드는 ‘사랑’이 아닌 ‘자립’을 선택했다
그녀는 자립을 위해, 함께 살면서 가사노동을 해줄 여성을 구하는 에버릿을 찾아간다. 이 구인광고의 문구만으로도 에버릿이 여성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모드가 “하우스메이트를 찾는다고 해서 왔어요”라고 했을 때, 에버릿이 “여자를 찾는다고 했죠”라고 답한 데서도 유추할 수 있다. 에버릿에게는 ‘입주 가사지원사’와 ‘아내’가 별다르지 않은 개념이었던 것이다.
에버릿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드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모드가 집안의 가축들보다도 못한 존재라고 모욕하며, 일을 하러 온 모드에게 한 침대에서 잘 것을 강요한다. 이런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모드는 그곳에서 일하기로 결정한다. 에버릿에게 쫓겨날 때마다 모드는 굳은 입술로 다시 그곳으로 돌아온다. 영화는 모드가 에버릿에 대한 호감 때문에 그 집에 남은 것처럼 묘사하지만, 나는 모드가 선택한 것은 에버릿이 아닌 ‘자립’이었다고 생각한다. 자립을 위해 다른 선택지가 없던 그녀가 에버릿의 폭력을 견디기로 선택한 것이다.
장애와 질병을 가진 여성이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모드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선택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 선택은 과연 그녀가 오롯이 원했던 바일까? 면접 자리에서 모드가 에버릿에게 한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당신은 도움이 필요해요.” 나는 처음에 그 말을 “나는 도움이 필요해요.”로 들었다. 모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사실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에버릿과 모드의 관계의 내용은 폭력과 순응이었다. 친밀한 관계 속에서 폭력에 익숙해지는 것은 비단 모드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몇 년 전, 폭력에 순응한 채 살고 있는 여러 여성노동자들을 만났다. 남편의 폭력에 의해 질병에 이르고 그로 인해 투병하다 돌아가셨다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자신 역시 남편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딸들을 만났다. 그들의 어머니는 폭력으로 인해 질병이 생기고, 그 질병 때문에 더 심한 방임과 학대에 노출되었다. 그들 안에서 나와 나의 엄마가 겹쳐 보였다.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같이 오래 울었다. 인터뷰이와 인터뷰어의 관계를 넘어서서 서로를 위로하며 울었다.
여성들은 취약할수록 더 자주 폭력을 경험한다. 나 역시도 그랬다. 원래도 폭력적이었던 애인은 내가 류마티스 관절염 진단을 받자 폭력의 강도가 높아졌다. 관계도 급격히 전환되었다. 질병이 생긴 내 몸은 애인에게 짐이었다. 애인의 폭력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돌보는 애인에게 고생한다는 말을 건네곤 했다. 당시 내가 살던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2층이었고, 애인의 도움 없이는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애인의 도움을 구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점차 상황에 순응했다. 폭력에도 익숙해졌다. 자신 없이는 못 살아갈 것이라는 애인의 말도 내면화했다. 점차 나 스스로도 내 몸을 짐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모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평생에 걸쳐 이 순응의 과정에 익숙해지면서 모드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지점들을,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방안들을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해냈다. 매번 애버릿에게 돌아갔지만 그 관계 안에서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제목 ‘내 사랑’은 에버릿의 시선이다. 본 제목 ‘모디’ 역시 모드의 애칭이다. 하지만 영화 속 에버릿은 모드에게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모디’라는 애칭도 사용하지 않는다. 모드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에버릿이 모드에게 속삭인 말도 “나는 왜 당신이 부족하다고만 생각했을까.”이다.
이렇게 견고하고 높은 벽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모드는 포기하지 않는다. 벽 바깥의 세상을 보기 위한 창을 끊임없이 낸다. 나중에는 자신이 살아내고 싶은 세상을 창 안 곳곳에 새기기 시작한다. 하늘과 바다를 누비는 새와 배, 그리고 동물들, 가족들의 단란한 한 때, 아름다운 도시의 풍경처럼 통증이 심해 이동할 수는 없었지만 그림 속에서 그 모든 장면을 살아냈다. 질병이 점차 진행되고 합병증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지만 꾸준히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일상을 단단히 유지한다. 그녀는 자신이 포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았다.
에버릿과 모드의 관계 역시 오롯이 모드의 인내로 유지된다. 개나 닭보다도 서열이 아래라고 말하는 에버릿에게, 당신과 성관계를 하느니 나무토막이랑 하겠다며 그녀의 아픈 몸을 비하하는 에버릿에게 모드는 집을 나오는 것으로 항의한다. 다른 선택지가 없는 모드는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지만, 그녀는 단지 사랑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지 않았다.
대중들이 이 이야기를 ‘사랑 이야기’라고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이유 중 하나는 모드의 장애와 질병 때문이다. 이 영화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몇몇 글에서 등장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그것을 설명해준다. 모드의 질병에도 불구하고, 모드가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함께 부부로 살아간 것은 사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지 않느냐는 시선이다. 영화의 시선과 정확히 겹치는 부분이다. 이 사회가 장애와 질병을 가진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누구도 묻지 않았다
모드가 화가로 이름을 날리면서 밥값(?)을 하자 에버릿의 태도도 다소 변하기 시작한다. 모드는 최소한의 돌봄만 보장된다면 자신도 주체적인 삶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녀는 가족들이 자신을 평가한 것처럼 나약하지도, 무능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시종일관 자신을 폭력적으로 대해온 에버릿에게, 그리고 가족들에게 존중의 태도를 잃지 않았을 만큼 강한 사람이었다. 모드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도 이런 확신에서 나온 것일 테다.
“나는 사랑받았어요.” 나는 이것이 에버릿에게 건네는 이야기이기보다,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확신에 대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다시금 영화의 제목으로 돌아가 본다. 왜 감독은 모드가 사랑받았다고 확신했을까.
내가 데이트폭력 가해자와의 관계 속에서 불행하고 끔찍하기만 했느냐면 그렇지 않다. 행복한 순간도 있었고 정말 사랑받는다고 느꼈던 순간도 있었다. 그것이 문제다. 그것이 그 끔찍한 관계를 견디게 했다. 그리고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던 내게 가해자는 거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그는 나를 돌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그라는 것을 반복해 인식시키면서 나를 지배했다. 나도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만 같았다. 이 영화에도 에버릿이 모드를 위하는, 혹은 돌보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이 영화가 ‘사랑 영화’로 그려진, 혹은 평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관계가 정말 그것으로 충분한 걸까. 그 몇 안 되는 순간들이 ‘폭력’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뒤덮을 수 있는가.
에버릿이 모드를 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가. 모드는 사랑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아무도 그녀에게 묻지 않았다. 당신 정말 괜찮은 것이냐고, 정말로 행복하냐고. 나는 모르겠다. 취약한 상태의 여성이 이 사회에서 스스로를 지켜내며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인가. 오래 전 내가 이 영화를 보며 절망했던 이유다. 그건 오로지 스스로가 끝없이 인내하며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관계 폭력을 견디면서, 혹은 주체성을 차단당하면서도 그저 생존하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것인가.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돌봄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삶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질병과 장애를 가진 여성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방식에 대해 수많은 고민거리를 던지는 영화다. 그리고 묻고 싶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사랑을 원하는가.
[필자 소개] 이혜정. 성폭력피해생존자이자 전업활동가. 2011년 류머티즘 진단을 받았다. 때때로 문고리를 돌리지 못할 정도로 통증에 시달리곤 하지만, 겉으로 잘 보이지 않는 질병인 탓에 아프다는 사실을 의심받곤 했다. 질병을 삶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현재는 느려진 삶의 속도에 맞게 일상을 꾸려가고 있다. 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있다. ‘아프다고 말하기를 포기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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