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세와 93년생이 함께…‘여성국극은 영원하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추천하는 영화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변규리 | 기사입력 2025/03/10 [20:32]

93세와 93년생이 함께…‘여성국극은 영원하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추천하는 영화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변규리 | 입력 : 2025/03/10 [20:32]

내가 여성국극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전시한 정은영 작가의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통해서다. 여성국극 프로젝트 시리즈 중에서도 〈유예극장〉(2018)이라는 작품이 인상 깊었다. 〈유예극장〉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매력적이었지만, 그 중 여성국극 남성배우 역의 남은진 씨가 출연한 장면을 보며 한참을 스크린 앞에 서 있던 기억이 난다. 여성국극이 공연한다면, 언젠가 한 번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여성국극의 존재에 대해서는 한동안 잊고 살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보게 된 웹툰 〈정년이〉(스토리 서이레, 작화 나몬, 2019~2022)를 통해 다시 한번 여성국극을 접하게 되었고, 창극 〈정년이〉(연출 남인우, 작창‧음악감독 이자람, 국립창극단 2023)를 선예매하여 보게 될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 ‘현재도 여성국극을 이어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나이브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여성국극 부흥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있다면 지금이 큰 기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드라마 〈정년이〉(2024)로 인해 여성국극은 대중적으로도 큰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때였다. SNS에서 “여성국극제작소”라는 계정이 눈에 들어왔다. 여성국극의 맥을 이어가고자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는 박수빈과 황지영 공동대표의 활동상이 소개되어 있었다. 얼마 후 이들이 무대에 서는 〈벼개가 된 사나히〉(2025, 작 고연옥, 연출 구자혜, 작창 박수빈 황지영) 공연 소식을 알게 됐다. 드디어! 나에게도! 여성국극을 볼 기회가 온 것이다! 공연은 “퀴어니스가 폭주하는 새로운 여성국극의 탄생!”을 알리며 주목받았다. 나 또한 여성국극 1세대와 3세대가 어우러져 여성국극 안에 작동하는 젠더/섹슈얼리티를 전복적으로 고안한 작품을 볼 수 있음에 황홀했다.

 

▲ 다큐멘터리 영화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감독: 유수연, 출연: 조영숙, 박수빈, 황지영, 2024)가 오는 3월 19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여성국극의 현재를 더 알고 싶어진 지금,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시대를 넘어 여성국극 무대를 지켜온 예인들의 흥과 멋을 다룬 다큐멘터리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유수연 감독, 2024)가 오는 3월 19일 개봉한다. 3세대 여성국극인 박수빈과 황지영이 1세대, 2세대 여성국극인들과 함께 전통과 현대의 경계에서 여성국극의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여정을 다룬 영화다.

 

한국 최초의 뮤지컬, 여성국극의 매력 속으로

 

1948년에 만들어진 여성극국은 1950년대 황금기를 누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54년 한국 영화의 제작 편수는 15편인데 반해, 여성국극은 24편의 신작을 발표할 정도였다. 한국 최초의 뮤지컬이라고 불리는 여성국극은 모든 배역을 여성들이 연기한다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특히 남성 역할 배우들에게 형성된 팬덤 문화가 잘 알려져 있다. 그 기세가 어느 정도였냐면, 팬들이 남성 역할을 맡은 배우들에게 가상 결혼식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여성국극 콘텐츠를 접하면서 전성기 시절 여성국극인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1950년대의 그들은 어떤 문화를 누렸고, 어떤 광경 속에서 공연을 올렸을까. 이 영화 또한, 지영과 수빈이 여성국극 전성기에 자신들이 활동했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하는 인터뷰로 시작한다. 지영은 당대 남성주연 배우로 큰 인기를 누린 임춘앵 선생의 공연을 한 번만 보고 싶다는 바람을 말하고, 수빈은 “무슨 소리냐고 내가 가서 씹어먹어야지.”라는 포부를 전한다. 이들은 당시 여성국극단의 합숙생활에 대한 동경, 여성 역할 배우의 팬덤은 어떠했겠느냐는 궁금증 등을 논하며 여성국극을 향한 애정을 표한다. 그리고 이어진 ‘여성국극을 왜 하는가?’라는 감독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여성국극을 부흥시키기 위한 지영과 수빈의 치열한 여정이 시작된다.

 

지영과 수빈은 어린 시절부터 정식 훈련을 받아온 소리꾼이다. 둘은 소리를 시작한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서로가 성장해 온 모습을 지켜본 사이이기도 하다. 그러다 〈여성국극 바우덕이〉(2014)이라는 작품에서 지영이 여성 주연, 수빈이 남성 주연을 맡게 되면서 처음으로 파트너 역할을 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지영과 수빈은 더 가까워졌고, 지금의 한 팀을 이루게 된 것은 아닐까 추정할 수 있다. 둘은 주로 안산에서, 또 지역축제 등에 캠핑카를 몰고 다니며 공연을 한다. 그것이 이들의 생업이자 꿈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대부분 둘이 출연하는 공연으로 수빈이 남성 배우 역할을, 지영이 여성 배우 역할을 맡는다. 이들은 이미 각종 무대에 초대되어 공연하는 프로지만, 여전히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그 선생은 여성국극 1세대 삼마이(가부키 용어로 웃음을 담당하는 조역) 배우로 이름을 떨친 조영숙 명인이다.

 

▲ 영화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유수연 감독, 2024)에서 황지영 여성국극제작소 공동대표와 조영숙 명인의 모습.

 

지영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조영숙 선생에게 여성국극과 판소리를 동일시하며 배우고 자랐다. 지영은 조영숙 선생에 의해 남성 배우로 키워질 뻔했으나, 체격이 크지 않고 소리를 낼 때 목소리가 높은 편이라 자연스럽게 여성 주연 배우로 성장했다. 수빈은 14살에 향단이 역할로 첫 데뷔를 했을 때 춘향 모 역할을 맡은 조영숙 선생을 만났다고 한다. 이후, 여성국극에 매료된 수빈은 조영숙 선생을 찾아갔고, 그때부터 현재까지 여성국극을 배우고 있다. 영화 안에는 수빈과 지영이 조영숙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또한 실제 여성국극이 어떤 방식으로 전승되는지가 기록되어 있다. 아흔이 넘은 조영숙 선생이 공연을 다니며 소리를 자아내는 모습을, 제자를 가르치며 소리를 하나씩 짚어내는 모습을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영화가 지닌 매력 중 하나다.

 

무형유산으로 인정받지 못한 여성국극의 척박한 현실 속에서

1세대부터 3세대까지, 93년생부터 93세까지 ‘레전드’ 공연 만든 여성국극인들

 

하지만 씁쓸하게도, 영화 안에는 이들의 공연을 대중들이 외면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공연 중 등을 돌리고 나가는 사람들, 공연 시간이 가까워져도 텅 빈 객석을 보며 걱정하는 수빈과 지영의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기죽지 않고, 온갖 끼를 부리며 남은 관객들을 위해 분위기를 다시 살려낸다. 그뿐만 아니라 수빈과 지영은 더욱더 여성국극을 잘하고 싶은 마음으로 다까라즈카(1913년에 창단한 일본 여성가극단) 공연을 보러 일본에 가기도 한다. 다까라즈카는 일본의 여성 뮤지컬 극단으로 창단 역사가 100년이 넘은 일본을 대표할 만한 인기 있는 극단이다. 여성국극과 마찬가지로 여성 역할, 남성 역할 모두 여성이 맡는 특징이 있다. 규모 또한 굉장히 크고 대중들에게도 여전히 인기 있다. 하지만 이에 반해 한국의 여성국극은 현재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지 못했다. 이러한 향토 속에서 여성국극의 부활을 꿈꾸는 수빈과 지영의 여정이 탄탄대로 일리는 없다. 둘은 다까라즈카 극단의 공연을 보고 감탄하는 한편, 한국에서도 이런 공연을 올려보고 싶다는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지영과 수빈이 한국으로 돌아와 마주하는 여성국극의 현실은 너무 척박하다. 그런데도 여성국극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감독의 질문에, 수빈은 ‘멋있어서.’라거나, ‘맥을 이어가고 싶어서.’라는 예상할법한 답변이 아닌, “나 닮아서.”라는 의외의 대답을 내놓는다. 수빈은 “여성국극은 평생 자기의 존재를 증명해야 했잖아요. 나도 나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었고, 그게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 아니까. 그럼에도 존재하는 여성국극이 나 닮아서. 그냥 여성국극이라는 걸 기억해 주고 같이 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거 아닐까.”라며 여성국극을 향한 진심을 내비친다.

 

▲ 다큐멘터리 영화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감독: 유수연, 출연: 조영숙, 박수빈, 황지영, 2024) 중에서


그러던 중, 아흔이 넘은 조영숙의 건강을 걱정하는 지영은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다. “선생님이 살아 계실 적에 여성국극으로 큰 무대를 만들어 보자”는 꿈이 생긴 것이다. 수빈 또한 “이렇게 가다가는 여성국극을 했다는 것도 선생님 말씀으로 끝나고, 몇십 년 동안 선생님을 쫓아다니며 여성국극을 배운 제자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끝나버릴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고 말한다. 이를 기점으로 여성국극의 큰 무대를 만들기 위한 수빈과 지영의 험난한 고생길이 시작된다.

 

끼와 실력, 열정 말고는 손에 쥔 것이 별로 없는 수빈과 지영은 서울예술단 지도위원 최병규 연출을 찾아가 무조건 이 공연의 연출을 맡아달라고 요청한다. 여성국극을 올리기 위해 필요한 비용은 최병규 연출 말의 의하면 수십억 원. 그러나 최병규 연출은 둘의 취지에 동감해 이를 승낙한다. 이에 둘은 1세대 다른 여성국극인 이소자, 2세대 여성국극인 이미자와 김옥천, 김성예를 한 명 한 명 찾아다니며 직접 캐스팅에 나선다. 영화는 이들이 한데 모여 올리게 될 〈여성국극 레전드 춘향전〉이 “무”에서 “유”가 되는 과정을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수빈은 자금을 모으기 위해 포스터를 인쇄해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며, 후원단을 조직하고 일일이 그들을 만나 표를 팔고 후원을 읍소한다. 그 과정을 보고 있자면, 속도 쓰리고 마음이 좋지 않다. 후원금을 조직해야 한다는 것만으로 이들의 어려움은 끝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고정된 여성 역할과 남성 역할이 명확해야 한다는 윗세대 여성국극 인들의 조언이 때로는 수빈과 지영을 답답하게 만들기도 한다. 더해서 지영과 수빈은 기대에 부응하고자 맹렬한 연습을 병행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성국극 레전드 춘향전〉 공연을 올리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서로에게 감사하고, 이 과정을 의미 있게 생각한다. 공연은 큰 기대를 모으며, 엄청난 성공을 거머쥔다. 참고로 〈여성국극 레전드 춘향전〉 실황이 영화 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에, 이 공연을 보고 싶다면 영화 관람을 더욱 권하고 싶다.

 

▲ 유수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 중에서


공연 이후 “여성국극제작소”는 안산문화예술의전당 상주단체로 선정되는 또 하나의 결실을 이뤄낸다. 이 사실을 수빈과 지영이 조영숙 선생에게 알리자, 선생은 이 둘을 끌어 안으며 여성국극이 이어질 수 있겠다는 안심과 고마움을 내비친다. 개인적으로는 이 장면이 이 영화를 가장 대표하는 좋은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여성국극제작소”는 “제1기 여성국극제작소 공개오디션”을 열기에 이른다. 이 공개오디션을 통해 함께하게 된 단원들과 만든 공연이 〈벼개가 된 사나히〉 (2025)라고 알고 있다. 계속해서 하고 싶은 것들을 시도하고, 여성국극의 세밀한 연출들을 적극적으로 써 공연을 올리고 싶다는 지영. 벽장 안에 숨어 었던 자신을 균열내서 자극하는 일, 깨고 나올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과정을 겪으며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는 수빈. 이들이 있다면, 여성국극은 그야말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며 사라지지 않고 영원할 것만 같다.

 

2025년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국극인들의 삶과 예술을 느끼고 싶다면,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를 극장에서 만나보면 좋겠다.

 

[필자 소개] 변규리: 2016년부터 ‘연분홍치마’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첫 장편 연출작인 통신설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팟캐스트 방송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Play On〉(2017)을 연출. 두 번째 장편으로 “성소수자 부모”라는 정체성을 마주한 두 여성의 성장 서사를 그린 〈너에게 가는 길〉(2021)을 연출했다.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소개] 2004년 설립된 연분홍치마는 여성주의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소통과 연대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다양한 현장에서 미디어로 연대하며 다큐멘터리, 극영화, 웹컨텐츠 등을 제작하고 있다. pinks.or.kr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 콩콩 2025/03/13 [12:50] 수정 | 삭제
  • 여성국극 진짜 재미져요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