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에서 광주에서 ‘광장의 예술’을 기획하는 사람[공연예술 독립기획자 고주영이 만나다] 앞서서 나간 이, 임인자5월 말일은 마지막 다닌 직장의 퇴사일이었다. 직장인의 가욋일로 시작했던 프로젝트가 갑작스런 퇴사와 함께 혼자서 하는 첫 기획이 되어버렸고, 13년을 ‘공연예술 독립기획자’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소개하며 살아왔다.
퇴사 후 몇 년쯤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함께 하고 싶었던 예술가들과 작업하는 재미, 내가 그린 설계도인 기획서가 얼마간의 시간과 과정을 거쳐 눈앞에 현실로 모습을 드러내고 그걸 보러 오는 관객들과 만나는 일이 신났다. 그러다가 3~4년 지나자, 무엇을 어떻게 누구와 어디서 할 지를 매번 맨바닥에서부터 몸을 부딪히며 시작하고 끝을 내야 하는 프로젝트의 서클이 압박처럼 다가오기 시작했다.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고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는 세상, 만나는 사람은 늘어가고, 연극과 예술의 역할에 대한 나름의 관점과 신념도 갖게 되었지만, ‘독립’인 내가 가진 자원(기회, 예산, 공간, 사람)은 뭐 하나 쌓이지 않은 채 여전히 또 맨바닥. 여전히 “연출과 뭐가 다르냐, 왜 직접 연출 안 하냐?”는 질문, “세무, 회계, 그런 거 잘 알겠다.”라는 기대(대행 맡김). 수많은 사람이 프로듀서를 자처하고 기획자를 자처하는 판 안에서 명함도 없이 살아온 나라는 사람의 ‘기획자’로서의 쓸모를 질문한다.
그리고 아주 최근에는 ‘여기까지 아닐까,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로 시작된 회의가 (다행히도) ‘정말 이것밖에 없을까, 어디로 이어져 있을까’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몇 나보다 앞서 곁길로 나간 동료들이 떠올랐다.
기존의 무대 관습을 버리고자 한 ‘변방’이라는 플랫폼
임인자 씨와의 관계를 뭐라 불러야 할까? 예술지원기관 직원과 그 지원을 받기도 하고 사업에 참여하기도 하고 현장의 소중한 정보와 의견을 나누던 동료 사이였지만, 지금은 서로 다른 지역과 현장에 있고 이제는 엮일 일이 별로 없다. 친구라 하기엔 개인적인 이야기를 썩 많이 알지는 못하고, 둘 다 살갑게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그래도 일 년에 몇 번쯤 같이 밥을 먹는 사이도 아니다. 그렇지만 인자 씨가 대학로의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며 일을 할 때 야식을 싸 들고 간 적도 있고, 몇 번쯤 우리집에 와 하루를 묵고 간 일도 있으니, 그냥 지인이라고 하기에는 좀 서운하다. 여튼, 처음부터 지금까지 “감독님”, “팀장님” 이런 호칭이 아닌 “인자 씨”, “주영 씨”로 서로를 불러 다행인 사이이다.
“연극동아리 활동이 너무 재미있어서 대학에 재입학해 들어간 연극학과에서, 서양연극사 첫 시간에 그리스 비극을 배우면서 아고라극장의 사진을 보는데, 광주의 5.18민주광장 분수대 모습과 연결됐고, 거기에 바로 ‘꽂혔’어요. 처음부터 연기나 연출의 ‘기술’로서의 연극이 아니라 광장으로서의 연극에 관심이 있었어요. 마당을 무대로 하는 민족극동아리 활동도 하면서, 극장에서 나오자, 무대를 벗어나자, 이런 생각이 강했던 것 같아요. 당시 유행했던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에도 영향을 받았고요. 뉴욕의 최신 실험극을 공부하면서도 그 토대가 된 삶의 환경에 더 관심이 갔고, 인도의 한 마을이 일시적으로 축제공간으로 변화되는 것 같은 현상에 흥분했어요. 제가 광주에서 자라며 광장에서 봤던 것을 연극의 언어로 변환하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인천에서 태어나 ‘인자’이지만 광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직접 보고 겪은 5월의 최루탄 가스, 의문사 사망자의 사진, 광장의 걸개그림은 이미 다른 연극, 새로운 연극을 만드는 기획자로서의 코스를 밟은 것이었다.
인자 씨가 예술감독을 맡아 만들었던 2010년부터 2015년까지의 서울변방연극제는 기획자인 나에게도 굉장히 의미 있는 축제다. 독립기획자가 되기 직전과 직후까지 관객으로, 축제 내 프로젝트로 입봉한 기획자(〈움직이는 집@서울〉, 2012)로, 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였다. 그 경험을 통해 당시의 변방연극제가, 혹은 임인자 예술감독이 바라보고 있는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간과했던 사회의 일각을 만났다. 어떤 사유가 어떤 예술형식으로 관객과 만날 수 있는지 여러 사례를 소개해준 좋은 참고자료였다.
“서울변방연극제라는 젊은 연출가들이 만든 기존의 무대 관습을 버리고자 하는 플랫폼에 합류해, 경력과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기회를 갖지 못했던 젊은 창작자들을 한 명 한 명 만나 설득하고 머리를 맞대고 작품이 가져야 할 의미와 방향을 탐색하고 시장, 서울역, 탑골공원, 광화문사거리 같은 곳을 극장 삼아 기지촌 할머니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 재일한국인들이 말하게 하는 공연을 만들었어요.”
작업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판을 까는 본연의 역할 외에도 내가 아는 한 창작자(연출자, 미술작가 등)와 가장 밀접하게 협업하는 기획자가 인자 씨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때때로, 어떤 시기에는 꽤 종종 인자 씨를 떠올렸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 하고 있는 작업의 방식이 어쩌면 벌써 몇 년 전에 인자 씨가 이미 지났던 길이랑 닮았다는 걸 깨달았던 탓이다.
그 중에서도 주로 같이 작업하는 창작자와 이견이 있을 때, 결국 서로 다른 길을 가기로 했을 때, 이런저런 이유와 경로로 외압을 받았을 때, 그리고 공연을 앞두고 불안과 긴장으로 혼미할 때, 할 수 있는 모든 걸 걸고 작품을 만들어 선보였는데 기획자의 이름은 삭제되고 연출자의 이름으로만 작품이 기록되고 기억될 때, 무엇보다도 이 모든 상황에서 그러한 고민과 걱정을 나눌 상대가 없을 때. 나는 겨우 일 년에 한두 작품 만들면서도 이런데, 임인자는, 지금의 나보다 더 어렸을 임인자는 어땠을까? 어떻게 버텼지? 어떻게 살았지?
“작업을 둘러싸고 창작자들과의 갈등보다는 오히려 같이 작업의 좌표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예산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니 재원 조성도 같이 하고요. 같이 작업하던 젊은 창작자가 어느 시기가 지나 독자적인 길로 떠나는 것도 저에게는 오히려 즐거움이었어요. 기회도 공간도 없었던 창작자들이 저와 함께 작업하고 어딘가로 다시 자기의 길을 찾아가니 산파가 된 느낌이랄까? 저나 변방이라는 플랫폼의 미션을 그렇게 정하고 있었으니까요.”
인자 씨가 임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변방연극제 예술감독 자리를 그만둔 계기는 뭘까?
“저의 예술적 미션은 예술의 새로운 형태와 언어를 찾는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저의 작업들이 너무 사회적 목소리로만 포획되어버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 다음 단계의 예술형식을 찾고 싶은데, 현실이 너무 힘들었어요. 민간의 소규모 예술축제에서 월급을 받을 수 있을 리 없으니 다른 일을 해야 하는데, 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그마저도 끊기고... 다른 사람을 써서 일을 나누기는커녕 사무실 월세도 못 내 카페를 전전하며 일하는 상황이 되어서, 이 상태로 가다가는 제가 망가지고 연극제가 망가질 것 같더라고요. 건강도 안 좋아지고, 총체적 피폐 상태였어요. 죽을 것 같더라고요. 죽기 전에 빨리 후임자를 찾아야 된다, 이런 생각이 진짜 컸죠.”
‘소년의 서’ 책방지기, 5.18 민주화운동 해설사
변방연극제를 넘기고 광주로 돌아가 서점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광주에 갈 때마다 찾아가 봤다. 하지만 제대로 영업을 시작한 기미는 보이지 않고, 인자 씨는 서울에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2016년 1월에 광주로 돌아와 『살아남은 아이』(1987년부터 12년간 인권유린이 자행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에서 피해자 한종선 씨의 증언이 담긴 책)를 팔 생각으로 ‘소년의 서’(독립서점)를 시작했거든요. 근데 ‘블랙리스트’가 터진 거죠. 이 검열 문제가 저에게는 진짜 고문처럼 느껴져서, 할 수 있는 걸 다 했어요. 잠도 거의 안 자면서 서명운동에 블랙텐트 운영에. 다른 연극인들 다들 바쁜데 저는 이미 변방연극제를 다음 예술감독에게 넘긴 자발적 백수였으니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니 서점은 개점 휴업 상태였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자행된 문화예술인 표적 검열 사건으로, 정권에 비판적인 문화예술인들 명단을 만들어 정부 지원 배제, 작품 검열, 활동 제한 등 광범위한 불이익을 줌)의 주범인 김기춘, 조윤선에 대한 1심 유죄 판결이 나온 후, 인자 씨는 드디어 광주에 안착했다. 독립서점 ‘소년의 서’도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다.
“전에는 정주하지 않고 돌아다니는 삶이었어요. 지금은 (손님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삶이 된 게 제일 다른 것 같아요. 처음에는 적응이 어렵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으면 운영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도 했고. 광주에 있는 독립서점 책방지기들하고 동네책방 네트워크도 만들어 서로 도우며 지내요. 연극할 땐 같은 시기에 공연이 있으면 경쟁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랬는데, 한 줌의 손님을 갖고 있는 건 독립서점도 마찬가지지만, 이젠 그런 경쟁의식 같은 건 안 들어요. 같이 연대해서 독립서점이 처한 불합리한 상황을 바꾸려고도 하고, 정책 제안도 하고.”
주말이라 젊은 여성 손님들이 서점을 많이 찾았다. “회사 그만두고 너무 힘들어서 여행 왔는데, 무슨 책 읽으면 좋을까요?” “환경 관련된 책 있어요?” 다양한 손님들의 요청에 정성스레 응하며 탄핵 촉구 집회 스티커도 잊지 않고 배포했다. 인자 씨가 광주에 정착하여 하는 일 중 또 하나는 5.18 민주화운동 해설사다.
“제가 광주 태생이 아니고 80년에 광주에 있지 않았던 이방인이기도 했고, 5.18에 대해 말할 수 없던 시기에 광주에서 학교를 다닌 거라 5.18에 대해 정말 아는 게 없었어요. 나 같은 이방인,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잘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해설사 일을 하게 됐어요. 변방 때 국제교류 열심히 한 덕에 영어 해설도 합니다, 하하하하하.”
예술계 블랙리스트, 연극계 성폭력…그럼에도 사랑하는 연극
얼마 전에 인자 씨는 자신의 SNS에 “연극하고 싶다.”는 글을 올렸다. 변방연극제를 그만뒀다고 해서, 광주에 내려왔다고 해서, 연극을 그만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나.
“블랙리스트 이후에 극장에 가는 게 무서워졌어요. 자꾸 봐야 기획도 하는데, 기획의 회로가 끊긴 느낌이랄까. 그리고, 제가 광주에 와서 여기에서 활동하는 젊은 연극인들과 만난 적이 있는데, 시립극단 예술감독의 전횡, 광주 연극계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들이었어요. 이 사건에 함께 대처하면서 싸웠거든요. 그러다 보니 여기에서 연극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연극을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장 치열한 연극계의 최전선에 있던 사람이 연극계를 떠나와 꿈꾸는 것이 연극하기라니, 그놈의 연극 참 대단하기도 하지.
기획자로서 신나게 작업을 했고, 지금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그에 집중하면 걸맞는 형식이 자연스레 따라온다는 것도 경험상으로 알고 있지만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하는 기획의 방식이 습관이 되었고, 그 습관에 스스로 가로막힌 것 같기 때문이다. 인자 씨는 그런 순간에 변방이라는 플랫폼을 뒤로 하고 광주로 돌아왔다. 나 역시 지금, 억지로 쳐진 몸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다른 길을 찾거나 새로 내야 할지 모른다.
“서로가 서로에게 비빌 언덕이면 좋겠어요. 블랙리스트가 나빴던 큰 이유 중 하나가 한때 서로의 비빌 언덕이기도 했던 공공과 민간을 완전히 등 돌리게 만든 거. 근데 나도 그랬고 지금도 다 각자 너무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 같아요. 혼자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우린 알잖아요. 후배 기획자들이라도 더 이상 우리처럼 일하지 않게끔 언니들이 뜻을 모으면 좀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요?”
인자 씨는 한때 싸움꾼(positive)으로 명성을 날렸지만, 결코 사람을 미워하진 않는다. 길고 긴 미운 업계 사람 리스트를 늘 업뎃하고 있는 나와는 인성의 레벨이 좀 다르다.
요즘 인자 씨에게 문화예술 생활은 어떤 거냐고 묻자, 바로 옆 ‘빵과 장미’에서 빵 나오는 시간에 사서 먹고, 서점에서 손님을 기다리며 책을 읽고, 옆옆집 광주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아주 가끔 연극을 보고… 그리고, 이번엔 책을 써볼 계획도 갖고 있다고.
“자서전일 리가 없잖아요. 제가 어떤 연극을 해 왔는지를 한 번 정리해 기록해 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살짝 들어요. 더 늦기 전에. 요즘 제일 지키고 싶은 거요? 손님과 매상!”
[필자 소개] 고주영. 몇몇 예술 축제와 지원기관을 거쳐 2012년부터 공연예술 독립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안산순례길 프로젝트](2015~2019), [플랜Q 프로젝트](2018~2023) 등을 기획/제작했으며, 2018년부터는 연극의 확장과 새로운 연극의 발생을 시도하는 [연극연습 프로젝트](페이스북/인스타그램)를 기획/제작하고 있다. 연극과 연극 아닌 것, 극장과 극장 아닌 것, 예술과 예술 아닌 것 사이에 있고자 한다. 2007년부터 〈일다〉의 일본 제휴 매체인 〈페민〉 기사의 번역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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