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가 더이상 숨겨지고, 수치스러운 일 아닌”딸을 잃은 슬픔을 변화로 옮겨낸 키티 웨스틴 인터뷰(하)섭식장애 관련해 외국 관계자들에게 한국적 의료 상황에 대해 설명할 때마다 내가 서두로 쓰는 구절이 있다. “한국에는 국민건강보험 제도가 있지만∙∙∙”이다.
섭식장애의 치료·지원·인식 면에서 ‘황무지’ 같은 한국 국가 정책 마련하라…서명운동 현재 진행
짧게 요약해서 말하면, 섭식장애 치료는 현재 대부분 비급여 항목으로 분류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비급여 진료 방식으로 섭식장애 치료를 진행해 온 소수의 정신과의사들은, 놀랍게도 섭식장애와 관련된 의료행위가 수가체계 안으로 들어가는 데에 발끈하거나 최소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주로 이런 논리다. ‘영국이나 일본 같은 사회주의적 제도를 만들면 섭식장애가 낫는다? 영국과 일본에서 섭식장애가 사라졌나요?’
호주, 캐나다 같은 곳의 체계적이고 풍부한 섭식장애 치료·지원 시스템을 언급하면, ‘하지만 거긴 대기가 길잖아요.’라는 말이 돌아온다. 그러나 한국은 대기자 명단에라도 들어갈 치료 기회조차 없는 경우가 다반사이며, 심지어 현 체제에서도 대학병원이나 일부 클리닉은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하는 저 선진국들에서만큼 대기해야 한다.
현재의 행위별수가제(fee-for-service)를 유지한 채로는 변화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지금의 시스템에서,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 섭식장애 환자가 별도의 공간 혹은 소아청소년과 입원병동에 머물며 제대로 된 통합적 섭식장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은 전국 어디에도 없다.
병원은 3차 병원급 입원치료 수가를 받으며 거식증으로 위험한 상태에 이른 열네 살 여자아이를 (1)내과 병동에 입원시키고, 세끼 병원 밥을 먹지 않으면 영양 주사를 놓아주는 것 이상의 조치는 하지 않으며, (2) 일반 정신과 폐쇄병동에 입원시키고, 식사시간 규칙만 그 아이에게 단독으로 적용한다. 어떤 곳에서는 아이의 식판에 하루 처방된 칼로리를 써 붙이기도 하고, 밥을 먹고 두 시간 동안 칼로리를 태울 만한 움직임은 금지시키기도 하며, 실수로 떨어뜨린 음식도 일부러 버린 것일 수 있으니 주워서 직접 물에 헹궈 먹으라고 지시하기도 한다.
2025년 8월 현재,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들로 구성된 단체 ‘잠수함토끼콜렉티브’는 섭식장애 국가 정책 마련을 촉구하는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일차적으로 어린이와 청소년 섭식장애 환자 보호에 초점을 맞춰, 1)섭식장애 치료를 위한 공공 전문치료기관 및 입원시설 마련, 2)가족 돌봄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한 지자체 기반 지원체계 구축, 3)국가 차원의 실태조사 및 종합 대응 전략 수립, 4)섭식장애에 대한 국민건강보험 적용 및 표준 진료가이드라인 제정, 5)섭식장애를 살아낸 이들의 목소리와 지식이 배제되지 않도록 ‘당사자 경험 기반 전문성’(lived experience expertise)의 제도적 참여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한국적 상황에서, 비록 섭식장애로 딸을 잃었지만 이후 투쟁을 통해 미국 의회에서 딸의 이름을 딴 초당적 법안을 만들어 수많은 당사자와 가족이 필요한 치료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도운 키티 웨스틴(Kitty Westin)과의 인터뷰는 큰 힘이 되었다. 그녀는 한국 정부에 섭식장애와 관련한 제도적 노력과 변화를 요구하는 우리에게 절대적 지지와 공감을 보내주었다.
“섭식장애를 암, 심장병 같은 생명 위협하는 질환으로 인정하도록”
질문: 한국 독자들에게 ‘애나 웨스틴 법’(Anna Westin Act)을 소개해 주시겠어요? 그 핵심 요소는 무엇이며, 왜 그 조항들이 꼭 포함되어야 했나요?
키티 웨스틴: ‘애나 웨스틴 법’은 두 가지 매우 중요한 성과를 이루어냈습니다. 첫째는 훈련과 조기 개입, 둘째는 ‘정신건강 형평성’ 명확화입니다.
①훈련과 조기 개입(Training & Early Intervention) 우리는 자금을 확보해 ‘국가 섭식장애 우수센터’(NCEED, National Center of Excellence for Eating Disorders)를 설립할 수 있었고,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와 물질남용·정신건강 서비스청(SAMHSA) 자금을 사용해 보건의료 전문가, 정신건강 제공자, 학교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조기 경고 신호를 발견하고 섭식장애가 악화되기 전에 개입하는 훈련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NCEED(국가 섭식장애 우수센터)의 사명과 목표: -의료 제공자를 위한 교육과 훈련을 강화한다. -섭식장애의 조기 발견과 개입을 촉진한다. -다양한 인구 집단에서 근거 기반 치료 접근성을 향상한다. -섭식장애를 둘러싼 잘못된 통념을 깨고 낙인을 줄인다.
NCEED가 제공하는 것: -선별검사, 문화적 민감성, 동반 질환 등 주제에 관한 임상의 대상 웨비나(온라인 세미나). -1차 진료 의사가 환자를 식별하고 의뢰할 수 있도록 돕는 임상 도구. -치료 선택지를 탐색하는 방법에 대한 안내를 포함한 개인·가족 대상 자료 및 정보. -유전, 트라우마, 신체 이미지 등 주제의 연구 성과 확산. (공식 웹사이트 nceedus.org)
②정신건강 형평성(Mental Health Parity) 명확화 우리의 목표는, 집중적 낮병원 치료, 부분 입원치료, 그리고 입원치료가 ‘정신건강 형평성 및 중독 형평성 법(MHPAEA)’의 적용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 거였습니다. 우리는 보험사가 섭식장애를 암이나 심장병과 다르지 않은, 생명을 위협하는 의학적 질환으로 정당히 인정하도록 싸웠습니다. 이 ‘형평성’을 강화함으로써, 우리는 본인 부담금을 줄이고, 보험사의 부당한 거절을 막으며, 개인과 가족이 불필요한 장벽이나 지연 없이 필요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고자 했습니다.
질문: 지금 이 순간, 섭식장애로 힘들어하는 딸을 둔 한국의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가장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그들 중 많은 분이 고립된 채 불안과 절망에 빠져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해하고 있습니다.
키티 웨스틴: 저는 확신을 갖고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섭식장애는 당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고요.” 도움과 지지, 그리고 당신 편에 선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가능한 최고의 치료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요. 적절하고 효과적인 의료는 시민의 권리입니다. 암이나 심장병의 치료비를 보험이 보장하듯, 섭식장애 치료비도 보장되어야 합니다.
당신에게는 목소리를 내고, 일어서고,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치료 시설의 부족, 훈련된 전문가의 부재, 그리고 극도로 제한된 치료 접근성”이라는 문제를 정부가 해결하도록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치료 시설 부족, 훈련된 전문가 부재, 극도로 제한된 치료 접근성’…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와 공동체의 목소리를 들어라
질문: 섭식장애 환자를 위한 활동 여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포기하고 싶었던 때도 있었나요? 다시 의미나 동력을 찾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키티 웨스틴: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은 물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질 때였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저는 희망을 결코 놓지 않았습니다. 이 일에는 시간이 걸리고, 끈기와 집요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노력이 반드시 결실을 맺을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저는 미국 전역에서 온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 한 팀을 꾸려 워싱턴에서 캠페인을 벌일 때마다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우리는 아주 작고 점진적인 성취도 함께 축하하려 노력합니다.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목소리를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여야 하고요. 작든 크든 모든 참여는 힘이 됩니다.
질문: 이 운동에서 다른 가족들이나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분들은 어떤 역할을 했나요? 어떤 공동체가 선생님을 지탱해 주었을까요?
키티 웨스틴: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지지하며, 돕게 하는 일에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운동’에는 섭식장애를 겪었거나 현재 겪고 있는 사람들, 그 가족과 친구들, 전문가, 연구자, 그리고 그 외 많은 이들이 함께합니다. 개별적인 목소리는 다른 목소리들과 합쳐질 때 더욱 커집니다. 그리고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팀으로 일하는 것은 매우 큰 힘을 줍니다. 정책 결정자들은 ‘실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며, 그 이야기들은 그들을 움직입니다.
질문: 의료체계, 보험사, 정부 기관처럼 변화에 저항하는 제도(관료)와는 어떻게 맞섰나요? 무시당하거나 무관심에 직면한 적은 없었나요? 그런 위계적 관계 속에서 어떻게 길을 찾으셨나요?
키티 웨스틴: 물론 우리의 활동은 반발에 많이 부딪혔습니다. 하지만 결코 물러서진 않았어요. 누군가 들어줄 때까지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지요. 그 결과 초당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모든 정당에 ‘애나 웨스틴 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섭식장애가 인종, 나이, 성별, 계층, 경제적 지위,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누구든 잠식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했고, 계속 모습을 드러냈으며, -이미 얘기했듯이-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키티 웨스틴: 애도는 매우 개인적인 것이며, 애도에 옳고 그름은 없습니다. 저는 여전히 슬퍼하고, 언제까지나 애나를 그리워할 거예요. 하지만 슬픔의 모습은 변했습니다. 애나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결코 멈추지 않겠지만, 저는 평화를 찾았고 다시 행복과 충만함을 느낍니다.
저는 애도가 저를 행동으로 나아가게 한 요인 중 하나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분노했고, 슬픔에 잠겨 숨을 쉴 수 없었고, 붕괴되어 있었죠. 그 강렬한 감정을 어떻게든 다루고 밖으로 표출할 방법이 필요했고, 그건 곧 제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섭식장애와 싸우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습니다.
질문: 지금, 선생님께 희망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요? 긴 여정을 돌아보며, 무엇이 변화를 여전히 가능케 한다고 느끼게 하나요?
키티 웨스틴: 제가 강연에서 자주 인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들이 제게 희망과 계속 나아가도록 북돋는 힘을 줍니다. 하나는 미국의 하원의원이자 민권운동가였던 존 루이스(John Lewis)의 말입니다. “절망의 바다에 빠지지 마십시오. 신랄함과 적대감에 스스로를 잃지 마십시오. 희망을 가지십시오, 낙관적이 되십시오. 절대, 결코, 목소리를 내고 ‘좋은 말썽’, 꼭 필요한 말썽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길이 없어 보여도 길을 만들어낼 방법을 찾을 겁니다.”
또 하나는 제가 하는 모든 강연에서 말미에 인용하는 애나의 말입니다. 애나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일기에 쓴 글인데, 저는 그것이 그 애가 제게 남긴 메시지라고 믿습니다. 애나는 제가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고, 우리 두 사람의 목소리로 섭식장애와 싸우기를 원했던 거에요. “지나온 모든 말과 행동이 마음속에 몰려와 새로운 도전이 시작된다. 너의 모든 사랑과 기쁨과 고통, 모든 두려움과 욕망이 너만의 약속으로 너를 이끌게 하라. 네 꿈이 끝나지 않고, 네 목소리가 결코 사라지지 않기를.”
변화는 가능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빠르지도 않습니다. 때로는 매우 절망스럽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고, 정의와 공정함, 품위를 요구하며 함께 목소리를 내는 데에는 힘이 있습니다. 들어줄 사람들이 있고, 도와줄 수 있고 도와줄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섭식장애가 더 이상 숨겨지고, 비밀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게 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에서 그 일을 해냈고, 여러분도 한국에서 해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전 세계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여러분이 목소리를 내고 부당함에 맞서 싸울 때, 세계의 수백만 사람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면, 그 모든 목소리는 합쳐져 “가장 강력한 억압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희망의 물결”이 됩니다.
[필자 소개] 박지니. 섭식장애 회고록 『삼키기 연습: 스무 해를 잠식한 거식증의 기록』(글항아리, 2021)을 쓰고 2023년부터 3년째 ‘잠수함토끼콜렉티브’라는 이름으로 섭식장애 인식주간(EDAW)을 기획, 진행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rabbitsubmarinec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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