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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말경, ‘더위가 가신다’는 처서(處暑)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폭염주의보가 계속되고 있는 일본 도쿄로 향했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가 진행하는 ‘성소수자 나이듦 프로젝트’에 함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는 2021년과 2023년에 한국 성소수자 당사자들의 노후 인식조사를 진행해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2023년엔 〈아시아 성소수자 컨퍼런스 -네팔, 대만, 일본, 태국, 한국 성소수자의 노후 준비 어떻게 하고 있나?〉도 개최했다.(관련 기사: 성소수자, ‘나이듦’을 이야기하다 https://ildaro.com/9725) 이후에도 ‘성소수자 나이듦 수다회’ 및 강연 개최 등 꾸준히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올해는 아시아 국가 일부를 방문해, 그 나라의 성소수자가 어떻게 나이 들어가고 있으며, 성소수자 운동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그 첫 방문이 도쿄다. 일본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혼인평등’을 위한 소송이 진행되고 있으며, 법 체계가 비슷한 점 등 유사한 부분이 꽤 있다. 그리고 도쿄는 서울과 마찬가지로 성소수자 운동 단체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번 방문을 통해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퀴어여성을 만났다.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한국과의 유사점, 그리고 차이점을 발견했다. 그 모든 과정이 흥미진진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차례차례 전해보고자 한다. 시작은, 70대 레즈비언이 전한 일본 레즈비언 운동의 역사다.
1947년생, 78세인 와카바야시 나에코 씨는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자랐다. 그리고 일본에서 ‘우먼 리브 운동’(1960대 말부터 1970년대에 전개된 급진적 여성해방운동)이 한창 뜨거운 시기였던 1970년, 대학을 졸업했다. 당시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대학을 바꾸고자 하는 학생운동인 ‘전공투 운동’(전학공투회의)도 활발했고,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도 전개됐다. 이런 분위기는 와카바야시 씨의 생각을 바꿨다. “사회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됐죠.”
대학 졸업 후, 일을 시작했지만 곧 그만뒀다. 그러다 신문에서 ‘그룹 투쟁하는 여자들’(ぐるーぷ闘う女)의 집회 기사를 보게 됐다. “기사에 ‘엄마, 결혼해서 행복해?’라는 피켓을 든 여성들의 사진이 있었어요. 기사 자체는 남성 기자가 쓴 거여서 여성혐오적인 내용이었지만, 어쨌든 그걸 보고 ‘이것이 내가 계속 찾고 있던 거다!’ 생각했어요. 우리 엄마도 시집살이로 엄청 고생했거든요. 결혼이 여성의 행복이라고 하던 당시의 가치관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어요. 그랬기 때문에 ‘엄마, 결혼해서 행복해?’라는 피켓에 공감했죠. 다음 날 신문사로 전화해서 그 데모를 주최한 단체의 정보를 얻은 후 사무실에 찾아가게 됐고, 우먼 리브 운동을 만나게 되었죠.”
와카바야시 씨는 1살 때 소아마비를 겪어 오른손 사용에 불편함이 있다. 그래서 부모는 와카바야시 씨를 과보호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도쿄에 살면서 도쿄에 있는 집을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만해도 딸들이 집을 나오는 방법은 ‘(이성애) 결혼’뿐이었다. 그러나 와카바야시 씨는 그 선택을 하고 싶진 않았다.
우먼 리브 운동을 하면서 만난 여성들 중엔 공동생활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성애 중심의 결혼과 가족제도는 절대적으로 잘못되었으며, 근본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했다. 와카바야시 씨는 그 생각에 동의하며, 돈을 모아 2년 후 집을 나왔다. “우먼 리브 운동을 만난 건, 내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경험이었어요.”
질 내부를 본 적 있어? 미국 ‘페미니스트 헬스 센터’에 가다
1975년, 와카바야시 씨를 포함한 ‘리브 신주쿠 센터’(1970년대 초 우먼 리브 운동의 도쿄 거점)의 활동가 3명이 미국으로 향한다. 1년 간 미국과 일본의 여성운동을 교류하자는 취지였다. 마침 유엔 1차 세계여성대회가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해이기도 했다. 세계여성대회에 참여한 뒤,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엔 LA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버클리도 가게 됐다. 와카바야시 씨는 “히피도 많고, 자유로운 느낌”이었던 버클리의 진보적인 분위기가 좋았다고 했다.
버클리에 머물면서 근방인 오클랜드 근처에 ‘페미니스트 우먼스 헬스 센터’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 헬스 센터는 1973년 미국 대법원이 임신중지를 합법화한 후 생긴, 페미니스트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거기서 ‘우먼스 초이스 클리닉’을 진행하고 있었다. “여성이 선택하는, 여성을 위한 클리닉이었죠.” 스펙큘럼(질경) 사용을 여성 스스로 해보게 하는 게 특징이었다. LA의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이 운동은, 여성이 직접 손전등과 거울 그리고 스펙큘럼을 이용해 자신의 질 내부를 들여다 보는 것이었다.
“대단하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사가 커튼 뒤로 비밀스럽게 여성의 몸을 보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몸을 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거죠. 친구들을 불러서 ‘다같이 해보자’고 하고 부엌 테이블에 누워 해 봤어요. 다른 여성들도 모두 감격하더라고요.”
“사실 이전엔 탐폰조차 사용하지 못했어요. 내 몸인데도 직접 보는 게 두렵고, 어렵더라고요. 하지만 헬스 센터에서 일하면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내 몸은 더럽거나 두려운 것이 아니다. 소중한 것이다’라는 생각이 자리잡았어요.”
나도 레즈비언이구나!
그곳에서 와카바야시 씨는 처음으로 “나는 레즈비언”이라는 자각을 하게 됐다. 여성을 좋아하게 된 거다. “사실 일본의 ‘리브 신주쿠 센터’에 있을 때도 자신을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고 밝히는 사람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땐 내가 여성에게 끌린다는 생각을 못했고, 오히려 레즈비언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어요.”
하지만 미국 생활에선 레즈비언이 주변에 가득했다. 헬스 센터에서 일하는 사람도, 룸메이트도 알고 보니 레즈비언이었다. “’나도 여성을 좋아할 수 있구나’하는 감정을 아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여자와 연애를 시작했다. 와카바야시 씨는 그 관계를 통해 “나의 가능성을 아주 강하게 느꼈다”고 했다.
예정했던 1년 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와카바야시 씨는 리브 신주쿠 센터에서 활동하는 레즈비언들과 함께 1976년 11월, 일본 첫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잡지로 알려진 〈멋진 여자들〉(すばらしい女たち)을 발행한다. 그리고 미국에서의 경험을 살려 ‘여성의 몸을 가르치는 그룹’을 만들어, 스펙큘럼으로 자신의 질을 보는 방법을 알려주거나, 유방암 자가검진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 활동을 6년동안 하면서 늘 자신에 대해 “레즈비언입니다.”라고 소개했다.
1984년엔 친구들과 함께 5명이 ‘레구미의 고마메’라는 그룹을 만들어 〈레구미 통신〉이라는 미니 잡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손글씨를 써서 복사본을 만들고, 직접 발송까지 하는 작업을 돌아가면서 담당했고, 22호까지 발간했다.
1985년엔 사이타마의 국립여성교육회관에서 열린 국제페미니스트 회의에서 “레즈비언과 자립”이라는 이름의 분과 회의를 진행했다. 이날 예상치 못한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걸 보고, “그럼 레즈비언들만 모이는 회의를 해 보자!”라고 결의해 11월에 진행했다. 이 회의는 형태를 조금 바꿔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매년 열리고 있다. 처음엔 레즈비언만 참석하게 했지만, 이후 바이섹슈얼 여성 그리고 2014년부턴 트랜스여성의 참여도 가능해졌다. 올해는 논바이너리의 참석도 있었다고 한다.
‘여자를 사랑한 여자들’ 이야기를 기다렸던 사람들
일본 레즈비언 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와카바야시 씨 외에도, 또 다른 70대 사와베 히토미 씨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1952년생으로 73세인 사와베 씨 역시 1975년에 약 3개월 동안 미국에 체류했을 때, 다양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을 만났다고 한다. 전통적 여성의 역할을 넘어 소방관, 변호사, 예술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레즈비언들과 교류했다. 이 경험은 사와베 씨가 레즈비언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온 사와베 씨는 페미니즘 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관련 정보가 없었다. 당시 파트너와 함께 소책자를 발간하기도 했지만, 2호까지 내는데 그쳤다. 이후 교사로 일하던 사와베 씨는 1986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레즈비언 국제대회(ILIS, International Lesbian Information Service)에 참가했다. 약 700~800명의 인원이 참여한 이 대회를 통해 ‘아시아 레즈비언 네트워크’(ALN)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국제회의로 꼽힌다.
사와베 씨는 이 대회에 참석한 후기를 쓴 후, 유명 잡지 중 하나였던 『부인공론』(婦人公論, 여성 대상 잡지로 1916년에 창간했으며 현재도 월 1회 발행되고 있다)에 기고한다.
“그 기사가 나간 뒤, 팬레터라고 해야 하나… 감상과 피드백을 담은 편지가 전국 각지에서 100통 넘게 왔어요. 많은 사람이 레즈비언의 이야기를 알고 싶어했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죠.”
1987년 초판이 출간된 이 책은 사와베 씨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자신의 성정체성은 언제 알게 됬는지, 연애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 만들게 된 책이다. 인터넷도 없던 시기였기 때문에 책의 반향은 꽤 뜨거웠다. 이 책은 여전히 일본에서 레즈비언, 바이 여성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매체형 르포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사와베 씨 또한 와카바야시 씨 등과 함께 ‘레구미 스타지오 도쿄’ 오픈에 참여했지만, 이후엔 독립된 길을 간다. 2007년 퀴어여성을 위한 단체 ‘파프스쿨’(pafschool.net)을 만들고 지금까지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와카바야시 씨가 이끄는 ‘레구미 스타지오 도쿄’ 사무실은 2013년에 문을 닫았는데,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활동가들이 나이를 먹어가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당시 와카바야시 씨는 65세 즈음이었다. 하지만 단체 자체를 없애진 않았다. “매달 한번씩 교류회를 열자”고 했던 것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와카바야시, 사와베 씨와의 만남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로 살아온 이들의 삶의 궤적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더불어 70대 활동가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길을 가고 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또한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던 나의 미래가 조금씩 상상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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