뭄바이의 세 여성이 빚어낸 위대한 시작과 가능성다큐멘터리 감독이 추천하는 영화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어떤 영화는 제목만 보더라도 전율이 인다. 무언가 자꾸 확인하고 싶게 만드는 느낌. 열감이 느껴지는 포스터. 이 영화의 구성 요소 중 어떤 것이 나를 건드릴 것만 같다는 예감. 이런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영화는 안 볼 수가 없다. 영화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이 그랬다. 이번 연재에서는 이 영화 추천 글을 쓰려고 한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나에겐 만든 사람이 궁금해지는 영화다. 인도에서 활동하는 여성 영화인 파얄 카파디아 감독이 각본/연출했다. 파얄 카파디아 감독은 다큐멘터리 연출로도 이름을 알린 감독이다. 뭄바이 출신인 감독은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꾸준히 인도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다.
개인적으로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작업하는 감독들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 다큐를 하다가 극영화로 진출한 감독의 작품 케이스를 공부하는 것도 재밌지만,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작업하는 감독의 작품 스타일은 늘 호기심의 영역이다. 파얄 카파디아 감독의 이력이 그러하다. 그래서 이 영화의 형태가 궁금했다. 다큐멘터리를 다루는, 여성인 감독이, 여성에 관한, 자신의 출신지를 배경으로 한 극영화를 만든다면 어떤 형태일까. 다큐에서 훈련된 연출방식이 극영화에 어떻게 묻어 있을까. 반대의 경우를 볼 때도 마찬가지로 궁금하다.
이런 잡다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영화가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곧 깨닫게 됐다. 내 여러 질문은 현재 다 무용하다는 것을. 내 질문을 확인하며 이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왜냐하면 나는 이 영화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 기사의 다음 내용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 주]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기차에서 내려다 본 뭄바이의 거리 전경이 펼쳐지면, 그 거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 위에 익명의 사람들이 나레이션을 한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듯 자신이 뭄바이로 온 이유를 들려준다. 이들은 각기 돈을 벌기 위해, 억압적인 집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꿈을 이루기 위해 뭄바이에 찾아왔다고 말한다.
이후 영화는 뭄바이 기차역에 몰린 엄청난 인파로 이미지를 점점 확장해 나간다. 앞선 이미지, 나레이션의 결합을 통해 관객은 인파의 의미를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뭄바이에는 사람이 많다는 정보를 뛰어넘어, 그들은 꿈을 갖고 있고, 돈을 벌고 싶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이곳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영화 시작한지 얼마 안 되고, 수많은 인파가 등장하는 한 컷의 의미를 이렇게까지 끌어올린 연출에 압도당할 무렵, 영화는 다시 기차 안으로 향한다.
기차 안으로 들어오자, 카메라는 익명의 사람들에서 개개인의 사람들로 시선을 좁힌다. 그 중에서도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여성 전용칸에 탄, 어딘가로 향하는 여성들의 일상적 모습이다. 여성들은 열띤 대화를 하기도 하고, 배고픔을 달래고자 요기를 하기도 하고, 이른 출근 길에 몸을 뉘어 잠이 들기도 한다. 잠시 후, 영화는 정확히 말한다. 지금부터 이 영화는 뭄바이로 향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개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곤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의 첫 등장 컷이 너무나 고혹적이어서 잠시 생각이 흐리멍텅 해질 무렵,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막을 내린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인공. 뭄바이에서 사는 세 여성. 프라바, 아누, 파르바티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한다. 모두 뭄바이로 이주한 여성들이다. 이들은 한 병원에 근무하는 동료들이다. 하지만 각기 다른 배경과 고민을 갖고 있다.
영화는 프라바를 중심으로 아누와 파르바티의 이야기를 함께 전개한다. 프라바는 함께 사는 아누가 자유연애를 하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그녀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또한 프라바는 남편이 죽은 후 20동안 살았던 집에서 실거주를 입증할 서류가 없어 강제퇴거 위기에 놓인 파르바티를 챙긴다. 최측근도 살뜰하게 챙기고 수련생들을 교육하는 멋스런 간호사 프라바는 점잖고,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일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매사 신중하고 자신의 할 몫을 다 하는 프라바는 자신이 돌보는 할머니 환자의 망상에 생각이 많아진다. 환자는 의사에게 집에 보내달라고 애원한다. 남편이 자신을 보러 집에 왔을 때, 자신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에 대한 묘사를 듣다 보면 그것은 환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말들이 망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프라바는 할머니의 이야기에 동요한다. 자신도 할머니처럼 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프라바는 결혼 후, 독일로 일하러 간 남편과 연락이 두절된지 1년이 지났다. 하지만 프라바는 결혼한 여자의 도리를 다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다른 만남, 유혹은 애초에 차단한다. 프라바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자신도 호감이 가는 같은 병원 의사의 계속되는 고백에도 결코 솔직해질 수 없다. 의사는 프라바에게 시 대회에 출품할 거라며 자신이 쓴 시집을 건네며 읽어봐 달라고 한다. 프라바는 그 시집을 지니고 있다, 컴컴한 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어두운 시간에 혼자 핸드폰 후레쉬를 밝히며 시를 읽어 내려간다. 그것이 프라바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일탈이랄까.
그런 프라바에게 뜬금없이 빨간색 밥통이 배달된다. 보낸이의 이름조차 써져있지 않은 밥통이 독일제라는 것을 확인한 프라바는 더 심난해진다. 연락도 없는 남편이 보낸 밥통인 걸까. 어느 어두운 밤. 프라바는 아누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몰래 일어나 빨간 밥통을 꺼내놓고, 밥통을 끌어안으며 고독한 마음을 토해낸다.
하지만 프라바가 이 지긋지긋한 고독에서 벗어날 기회가 없던 것은 아니다. 프라바에게 관심을 둔 의사는 병원과 계약이 종료되었지만, 프라바와 함께한다면 이 정이 들지 않는 뭄바이도 의미 있을 거라며 자신이 남는 것이 어떻겠냐고 정확하게 고백한다. 하지만 프라바는 결혼했다는 자신의 처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그의 고백을 거절한다. 프라바에게도 밤은 혼란이고, 결혼은 허울뿐인데도 말이다. 그런 프라바를 계속 건드리고 자극하는 것은 함께 사는 동료 아누이다.
프라바에 비해 욕망에 솔직하고 자유분항한 아누는 ‘자유연애’를 하고 있다. 지금, ‘자유연애’라는 단어가 참 어색하지만, 아누가 사는 세상에서는 만나고 싶은 사람과 연애를 하는 게 금기를 넘어서는 일이다. 집안에서 점지한 남성이 아닌 남성과 데이트를 하거나 교제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아누의 집안에서도 지속적으로 점지한 남성과의 결혼을 강요하지만, 아누는 그런 풍습 따윈 일절 무시하며 일단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있다.
직장 동료들까지 아누의 연애에 대해 쓴소리를 해댄다. 모든 것에서 공격받는 아누. 그래도 사랑이 최고라며 꿋꿋이 사랑을 실천하는 아누. 그러다가 시아즈 삼촌의 지인 결혼식 참석으로 집이 비는 날. 시아즈는 자신의 집이 빈다는 희소식을 아누에게 전한다. 대신, 여성의 몸을 가리는 베일, 부르카를 쓰고 와야한다고 한다. 보수적인 동네이기 때문에 평소 아누의 옷차림으로는 이 동네에 올 수 없다는 것이다. 한껏 기대를 안고 시장에 간 아누. 싫지만 부르카를 써야 한다면 개중에도 예쁜 부르카를 쓰고 싶던 아누는 부르카를 사서 쓰고 가던 길에 크게 실망한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결혼식이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문자를 받은 아누는 큰 실망을 하며 부르카를 벗는다. 시아즈와 함께 할 순만을 상상했던 아누인데. 그것마저도 자유롭지 못하다.
파르바티는 자신에게 강제퇴거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집이라며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나 법적 상담을 해보니, 실거주를 해왔다는 서류가 없는 이상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해석을 듣는다. 프라바와 함께 온 집안 서류들을 뒤져보지만, 이 공간에 파르바티가 살아왔다는 것을 입증할 서류는 있을 리 없어 보인다. 대신, 오래전에 프라바가 파르바티에게 주었던 예쁜 카드 편지를 발견할 뿐이다. 그런 파르바티는 누군가 일자리를 알아봐 주기로 했다며 결국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선언한다. 적어도 그곳엔 집이 있다며 말이다.
1년 째 연락두절. 밥솥만 띡 보내온 남편과의 결혼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괜찮은 남자를 떠나 보낸 프라바. 정략결혼을 강요받고도 사랑에 최선을 다하면 괜찮지 않을까 했지만, 그것도 제대로 할수 없어 눈치만 봐야하는 아누. 20년 거주가 무색하게 집 잃고 쫓겨나게 생긴 바르바티. 정착하기 어려운 도시 뭄바이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세 영혼은 파르바티가 고향으로 떠나는 날. 다 함께 여행길에 나선다.
그러다 우연히 아누와 시아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프라바는 아누를 단속하고자 이곳을 뜨려고 한다. 하지만 시아즈는 바닷가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한 남성을 구해내고, 프라바는 그 남성과의 육체적 교감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얻게 된다. 그 경험을 통해 프라바는 아누를 이해해 보기로 결심한다.
결국 프라바와 아누, 파르바티, 시아즈가 시골의 어느 술집에 모인다. 그들은 서로에게 인사한다. 아직은 인사를 할 뿐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 공간에서 관습도, 제도도, 어떤 것도, 무언가도 아닌, 오로지 자신으로 서로를 대면한다. 서로의 존재와 욕망은 이제 어둠을 통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통해서 빛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 위대한 시작과 가능성이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이라는 영화에 담겨있다.
[필자 소개] 변규리: 1989년생. 관찰과 기록하는 것을 좋아해 왔고, 그 습관이 발전해 다큐멘터리라는 툴을 탐구하게 됐다. 지역공동체 라디오 구로FM에서 프로듀서로 일하며 다큐멘터리를 시작했다. 2016년 퀴어 페미니스트 미디어 그룹 연분홍치마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다큐가 더 좋아졌다. 다큐는 관객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하고, 공동의 경험을 감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세상에 미치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지금은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한국성소수자인권단체연합 무지개행동에서 집행위원으로도 함께하고 있다. 대표작으로 〈Play On〉(2017 연출), 〈너에게 가는 길〉(2021 연출)이 있다.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소개] 2004년 설립된 연분홍치마는 여성주의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소통과 연대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다양한 현장에서 미디어로 연대하며 다큐멘터리, 극영화, 웹컨텐츠 등을 제작하고 있다. pink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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