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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3학년 2학기는 어땠지?'
영화를 보고 나와서 처음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는 어수선한 시간. 늘 같은 반에 모여서 같은 밥을 먹던 친구들이 모두 다른 곳을 향해 가는 시간.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는데 미래를 위한 선택을 해야 하는 시간. 3학년 2학기는 누구에게나 어수선한 시기이다. 이란희 감독의 〈3학년 2학기〉는 그 시간대를 살고 있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누군가의 3학년 2학기
〈3학년 2학기〉는 한 학교에서 시작한다. 경인하이테크고등학교의 학생들은 책상에 앉아 있는 대신 공업용 기계를 실습하고 있다. 담임 선생님과 면담을 할 때에도 진학 상담 대신 취업 상담을 한다.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실습을 갈 수 있는 공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준다. 실습을 잘 마치고 채용되면 공장에서 일하면서 주말에는 대학도 다닐 수 있고, 병역특례도 받을 수 있으며, 취업 장려금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주인공인 창우에게는 매력적인 조건이다. 비록 중소기업이고 집에서 멀지만, 대학도 보내주고 병역특례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끌린다. 공장에 견학까지 다녀왔겠다, 다른 더 좋은 선택지도 없던 창우는 이 중소기업에 실습을 신청하기로 선택한다.
하지만 관객들의 걱정과 우려가 무색하게 주인공 창우의 3학년 2학기는 담담하게 흘러간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묘사할 때 흔히 등장하는 욕설, 비행, 폭력과도 거리가 멀다. 창우는 집에 가서 어린 남동생을 돌보고, 일하고 퇴근한 엄마를 마중하는 착하고 다정한 아들이다. 동생의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 핸드폰 게임도 소리를 끄고 하는 사려 깊은 형이기도 하다.
이런 평범한 한 가정의 일상이 한순간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이 대화가 앞으로 벌어질 비극적인 사건의 예고는 아닌지 마음을 졸이게 되지만, 곧 그런 의심을 거두게 된다. 이 영화는 ‘사건’에 집중하는 영화가 아니라 일하며 살아가는 ‘일상’ 그 자체에 집중하는 영화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평범한 사람이 존중받기를 바라는 단순한 진심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관통하는 태도는 ‘평범함’이다. 노동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단순한 진실이 이란희 감독 영화의 전반에 흐르고 있다.
이 태도는 영화 〈3학년 2학기〉가 관객들에게 제안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M&H엔지니어링에서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창우, 우재, 성민이와 다혜는 각자의 성격과 일상, 그리고 꿈을 가진 우리와 닮은 평범한 아이들이다.
이란희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현장실습생들과 청년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찾아 다녔다. 그 사건들을 보면서 감독의 머리 속에 남은 질문은 죽은 이의 친구였을, 혹은 후배였을 아이들은 그 이후를 어떻게 일하며 살아가는지였다고 한다. 현장실습생들을 ‘죽은 존재’가 아니라 ‘살고 있는 존재’로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이 이 영화의 접근 방식이었다.
영화는 이 사건을 깊이 파고들며 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하는 방법을 취하는 대신, 그 사건들의 여파 속에서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자기 삶을 살아가는 창우에게 집중한다. 그 일상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 죽고 다치는 어두운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특별할 것 없지만 소중한 순간들을 만나게 된다. 이 평범한 소년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일상의 기쁨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감독의 말에 남긴 이 문장처럼. ‘부모를 잘 만나지 못해도, 타고난 재능을 찾지 못해도, 꿈이 없어도, 엄청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빛나는 성취를 이루지 못해도, 운이 좋지 못해도, 성실하게 노동하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구나 인간으로서 평등한 권리를 인정받으며 살 수 있다면 좋겠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창우와 우재가 처음 실습을 나가는 날, 이들은 익숙한 학교를 벗어나 처음으로 공장으로 출근을 한다. 영화는 출근부터 퇴근까지 이들이 학생에서 노동자로 거듭나는 최초의 순간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이른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면서 출근을 하고, 첫 번째 업무를 배정받고, 일을 잘못해서 사수에게 혼이 나고, 눈치를 보다가 공장 구석에 기대어 졸고, 구내식당에서 처음으로 점심을 먹고,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시선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자괴감 속에서 눈치 보다가 어영부영 하루가 지나가 버린다. 최초의 일터에서 느끼는 긴장감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는 경험이다.
창우는 특출나게 잘하는 게 있지도 않고, 자기 주관이 뚜렷하지도 않고,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적당한 곳에서 실습을 하고, 적당히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하며, 적당히 졸업하고 대학도 가서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은 아이다. 공장에 가서도 창우는 잘 모르는 게 있어도 다들 바빠 보여서 물어보지 못한다. 혼자서 해보려다가 실수를 하고, 그 실수를 몰래 수습해 보려다가 걸려서 혼이 난다. 그가 처음 일터에 적응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에게도 언젠가 저런 순간이 있었지 싶어서 공감이 가기도 한다.
그러던 창우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 용접을 배우는 장면이다. 용접을 하면서 처음으로 선임들의 칭찬을 받기도 한다. 용접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일하는 재미를 느낀다. 그렇게 조금씩 일이 주는 기쁨과 성취감을 경험한다. 이렇게 일터에서 일을 배우고 익혀가는 노동은 우리의 중요한 일상의 일부다.
이 공장에서 3학년 2학기를 보내고 있는 4명의 아이들, 창우, 우재, 다혜, 성민이는 이 실습 시간을 경험하면서 각자만의 선택을 한다. 이 영화는 아이들이 이 나이 대에 감당할 수 있는 크기만큼의 현실만 보여준다. 크고 작은 여러 사건을 겪으며 두 명의 아이들은 스스로 공장을 떠나고, 두 명의 아이들은 공장에서 계속 일하는 것을 선택한다.
이 영화는 실습을 포기하고 공장을 떠난 아이들이 그 이후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에도 소홀하지 않다. 우재는 비록 아빠의 편의점이지만 시급을 받으면서 알바를 하고, 성민이는 배달 라이더 일을 새로 시작한다. 첫 번째 일터는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곳이고, 이곳을 때려 치운다고 하더라도 큰 일이 생기지 않는다. 어디에나 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모든 사회초년생들에게 꼭 필요한 노동 교육이라는 생각이 든다.
3학년 2학기를 마치며…
11월은 수능의 계절이다. 모두가 수능 시험장으로 향할 때 일터에 출근하는 이들이 있다. 영화 속에도 수능 날이 나온다. 주인공들은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수능 뉴스를 보고 있다. 누구나 한 번쯤 보는 수능을 자기도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이들. 〈3학년 2학기〉가 끝나도 평범하게 살아가는 게 꿈인 이들이 무탈하게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필자 소개] 권오연: 2024년부터 ‘연분홍치마’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2015년 강남역 사건에서 시작된 페미니즘에 대한 대화를 담은 단편 다큐 〈X에 대하여〉와 한국과 일본에 살고 있는 네 명의 페미니스트가 나누는 우정을 담은 〈순간이동〉을 공동연출했다 10.29이태원참사 미디어팀으로 활동하며 이태원참사 다큐 〈별은 알고 있다〉를 만들었다.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소개] 2004년 설립된 연분홍치마는 여성주의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소통과 연대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다양한 현장에서 미디어로 연대하며 다큐멘터리, 극영화, 웹 콘텐츠 등을 제작하고 있다. pink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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