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온기를 유지시키는 노동”을 합니다

[나의 노동기] 베테랑 재가 요양보호사의 호소

김필순 | 기사입력 2025/11/28 [11:07]

“생명의 온기를 유지시키는 노동”을 합니다

[나의 노동기] 베테랑 재가 요양보호사의 호소

김필순 | 입력 : 2025/11/28 [11:07]

아파트 벨을 누르면, “딩동댕” 하는 소리 뒤에 어김없이 붙어서 들리는 소리가 있다.

“오지 말라는 데 왜 또 왔어!”

이 댁의 벨을 누른 지 4개월 차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르신은 매일 오전 11시, 내가 현관 벨을 누르자마자 왜 또 왔다며 성이 난 목소리로 답하신다. 나는 씩씩하게 “오늘도 인사드리러 왔습니다.”라는 말로 비위 좋게 넘긴다.

빨래집게를 갖고 갔다며 도둑으로 몰려도, 이제는 허허 웃을 수 있는 나름 베테랑 8년 차 요양보호사이다. 하지만 이 직업은 경력자나 신입이나 시급이 똑같다.

 

어르신이 오늘은 무슨 일로 또 화가 나셨는지 내내 욕설을 한다. 못 들은 척, 모르는 척하며 어르신 식사 준비를 한다. 식사를 마치시면 업무 매뉴얼 대로 색칠 놀이나 숫자 채우기를 해보지만, 어르신은 시시하다며 싫증을 낸다. 색연필과 스케치북을 나에게 던져 버린다. 이렇게 씨름을 하다 보면 3시간이 훌쩍 간다. 이런 날은 퇴근하는 발걸음이 녹은 파김치같다.

 

알츠하이머 어르신들과 밀고 당기기가 쉽지 않다. 그분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곳일까?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일까, 세상에 시달린 찌꺼기가 모여 앙금이 된 세계일까. 그 세계가 궁금하지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나는 그저 매일 같은 농담을 하셔도 처음 들은 것마냥 박수치며 웃어 드린다.

 

“내일부터 오지 마” 한마디에 수시로 실업자 되는 노동

 

원래 내 꿈은 파독 간호사였다. 20대에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땄다. 독일 가는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어쨌든 간호조무사 자격증으로 평생을 일했다. 10년 전에는 왕복 3시간 거리의 산골 요양원에 취직했다. 가족경영으로 목사님이 원장이었고, 교회도 같이 있어서 주일예배 드리며 요양사들과 당직도 서며 하루 3교대 쉼 없이 일했다.

 

산골 요양원은 버스를 놓치면 지각이고 퇴근도 불규칙해서, 시내 산후조리원으로 옮겼다. 산모들이 나이 지긋한 간호조무사를 꺼리는 게 눈치로 보였다. 다시 이직했다. 100 베드의 병원 4층 담당 간호조무사로 3년을 근무하던 중, 암 투병 중이던 남편의 증세가 심각해져서, 실업급여를 받으며 눈물의 사표를 썼다.

 

▲ 1968년 후배 간호조무사와 함께. 오른쪽이 필자. (제공-김필순)


그리고, 60이 넘은 나이에 재가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했다. 처음 모셨던 95세의 남자 어르신은 고령에도 목욕도 혼자 하시고 점잖으셨다. 병원 동행도 하고 산책도 하고 이발소도 모시고 다녔다. 식사도 잘하시고 잠도 잘 주무셨다. 노쇠한 몸이 힘들다고 하셨지만, 그 연세를 생각하면 건강한 편이었다. 어린 손녀딸과 둘이 사셨는데, 나는 손녀딸의 생리 묻은 팬티도 말없이 처리해 주었다.

 

내 전임으로 일했던 요양보호사 분은 그 손녀딸이 철없이 요구하는 게 많다고 투덜댔다 한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대상자 가족들의 신변 처리는 요양보호사 일이 아니니까. 그런데 아직 어른의 손길이 필요한 10대인데, 95세 할아버지의 보호자 역할도 해야 하는 손녀의 처지가 눈에 밟혔다. 철없는 손녀딸이라고 수군대는 이웃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 눈에는 그저 안타까웠다.

 

요양보호사 일을 하다 보면 집집마다 안타까운 사연을 많이 보게 된다. 남의 사생활이라 못 들은 척 모르는 척하면서,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만한 사소한 것을 조용히 해주기도 한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연민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95세 어르신이 투석으로 병원에 가셨다가 요양원에 입소하셨고, 곧바로 나는 실업자가 되었다. 그 이후에도 몇 번 비슷한 일을 겪었다. 돌봐 드리던 어르신이 요양원이나 병원에 입소하면 나는 실업자 신세가 되어서, 다음 어르신과 매칭이 될 때까지 어정쩡하게 몇 주를 보낼 때가 많았다.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아픈 기색을 보이면 금세 이런 목소리가 들린다. “병원에 가. 안 와도 돼.” 당연히 날 위하는 말이 아니다. 아프거나 더워도, 추워도 힘들다는 표현을 아낀다. “내일부터 오지 마.”라는 한마디로 가볍게 해고를 당할 때의 황당함도 참아야 한다. 재가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은 수시로 실업자가 되는 일이다. 혹은 언제나 내일은 실업자가 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일이다.

 

노인들의 일상과 생명을 유지하는 일, 누가 하든 해야 하는 일

돌봄노동의 보람과 긍지를 느끼며 일할 수 있기를

 

“아줌마, 와서 휠체어 좀 밀어.” 큰 소리가 들린다.

“어르신. ‘아줌마’가 아니라 ‘요양보호사’나 ‘선생님’으로 부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어르신은 다시 큰소리로 “선생은 무슨 선생, 학교선생님도 학생한테 맞는 세상인데.” 며칠 전 학생이 교사를 구타한 사건을 뉴스에서 보신 모양이다.

 

이 어르신은 ‘본인이 내는 분담금으로 요양보호사의 월급이 지급된다’며, 요양보호사들에게 무례하기로 유명한 분이었다. 우리 월급의 상당 부분은 장기요양보험제도에서 지급된다고 말씀드렸지만, 비웃는 눈빛만 돌아왔다. 그때 느낀 모멸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 요양보호사가 된 뒤 앞치마가 나의 작업복이다. 평일에는 앞치마를 입고 일하고, 주말에는 다른몸들의 돌봄노동자생애사 모임에서 글을 쓰는 노년이 기쁘다. (제공-김필순)

 

내 노동 현장의 부당함과 불평등은 사막의 모래알만큼 많다. 노인들의 일상생활과 생명을 유지하는 일은 누가 하든 계속되어야 한다. 돌봄노동자의 삶은 언제쯤 공평한 바른 정책으로 나아질까. 그래서 누구나 하고 싶은 노동으로, 어르신을 돌보면서 보람과 긍지를 느낄 수 있게 될까? 우리는 도대체 언제쯤 인권과 노동권이 제대로 인정받는 요양보호사로 살아 볼 수 있을까? 70대 요양보호사인 나의 간절한 마음이다.

 

내가 번 돈으로 손주들에게 용돈을 쥐어줄 때는 나름 좋았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노동의 대가는 적다. 그러니까, 정말로 너무 적다. 통장을 언제 새것으로 바꿔볼 수 있을까? 언제 실업자가 될지 모르는 불안정한 직업이라 통장이라도 단단히 쥐고 있어야 하는데, 통장은 늘 너무 얇다.

 

맑은 눈망울을 흐리게 하며 누더기 같은 세월을 함께한 자식들이 말한다. 요양 받을 나이에 요양일 한다고, 대단하고 멋지다고 말이다. 그 격려에 힘입어 몸과 마음을 잘 추스르며 더 가보려 한다. 내 작은 목소리가, 몇 줄의 글이 얼만큼의 울림을 줄지는 몰라도 돌봄은 계속될 것이고, 우리는 현장에서 노동의 꽃을 피울 것이고, 이기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부당함에 조금씩 저항하는 목소리를 낼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를 유지시키는 필수 노동을 하는 사람이다. 정부가 인정하지 않고 보호자들이 무시해도, 우리는 생명에 온기를 유지시키는 돌봄노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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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르 2025/12/05 [22:44] 수정 | 삭제
  • 보석같은 글과 생각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 나난 2025/11/30 [08:48] 수정 | 삭제
  • 생명의 온기를 유지시키는 노동... 정말 멋지고 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돌봄노동을 앞두고 있는데, 선생님에게 그 노하우 배우고 싶네요.
  • 2025/11/29 [10:58] 수정 | 삭제
  • 감사합니다. 김필순 선생님. 그 이름 기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
  • YJ 2025/11/28 [15:42] 수정 | 삭제
  •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노동기입니다. 오늘 하루 나의 노동을 돌아보게 되네요. 글이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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