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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화제의 영화였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다니엘 쉐이너트, 다니엘 콴 감독)는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중국계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다. 미국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가족들과의 관계마저 놓쳐버린 에블린과, 대학을 중퇴하고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딸 조이의 관계는 이 영화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서사이다.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가 서로에게 부채감을 지닌 채 갈등하는 아슬아슬한 대치는 영화 속에서 세무조사 대상으로 압류되기 일보 직전인 위태로운 세탁소의 상황으로 인해 더 심화된다. 말썽을 부리거나 민원을 넣는 손님들, 자꾸만 고장 나는 세탁기, 그리고 끝없이 들어오는 더러운 빨래들로 가득 차 있는 곳. 혼란 그 자체인 세탁소의 상황은 에블린의 현실을 은유한다. 한때 세탁소는, 그리고 딸 조이는 에블린의 꿈이었지만, 이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었다. 세탁소에서 조이와 에블린이 다투는 동안, 서로 다른 종류와 색깔의 옷들이 뒤엉킨 채 물들고 다시 씻겨나가길 반복한다.
세탁소는 혼돈과 얼룩이 있는 것이 당연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정체성을 둘러싼 서사를 풀어놓기에 더없이 훌륭한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를 보며 세탁소에서 펼쳐지는 이민자 서사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오래된 영화를 떠올렸다.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새로운, 정체성에 관한 재현을 보여주는 영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My Beautiful Laundrette,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 1985)이다.
이민자 서사의 고전이라고 언급했지만, 이 영화는 고정된 소수자 정체성에 균열을 내는 파격적인 시도의 고전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전히 새롭다는 건, 이 영화가 선택한 재현 방식이 인종차별과 경제적 계급주의, 동성애 혐오와 이주민 차별이 지속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쉽지 않을 시도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군다나 TV전용 콘텐츠라면 말이다.
현재 대중 영화에서 다루는 이민자 서사가 대부분 가족관계나 인종차별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비교해 봐도, 파키스탄계 이민자 2세이며 유색인종인 오마르와 영국 백인 노동자 계층인 조니의 동성애를 다룬 이 영화는 지금 봐도 놀랄만한 명장면들이 많다. 설명을 위해 유색인종 혹은 백인, 파키스탄계 이민자 사업가 혹은 영국 백인 노동자로 부득이하게 등장인물의 인종, 계급, 젠더 정체성을 대립시켜 설명했지만, 실제 이 영화를 보면 몇 개의 정체성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인물들의 복잡성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일례로 오마르는 차를 타고 가던 중 오랜만에 만난 조니가 반가워 길 한복판에 차를 세워두고 달려가는 순수한 면모를 지녔지만, 자신이 조니보다 경제적 지위가 높다는 점을 이용해서 그에게 명령하기도 하는 권위적인 모습도 갖고 있다. 삼촌 나세르가 자신과 정략결혼을 시키려는 그의 딸 타니아가 자신에게 키스하는 걸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조니를 사랑한다. 또, 돈이 최고라고 말하는 삼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세속적 삶을 비판하는 아버지로부터도 인정받길 원하는 다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오마르는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그리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솔직하게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으며, 후회할지라도 순간순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역동적인 인물로 형상화되어 있다. 오마르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고정되지 않으며,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도 않는다. 그리고 오마르뿐만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도 특정 정체성의 전형 같은 것에 들어맞지 않는 뒤섞인 모습으로 세탁소를 드나든다.
두 달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텔레비전 방영용으로 빠르게 만들어진 저예산 영화라는 점을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거친 장면 전환과 연극 톤이 남아있는 배우들의 연기는 그 자체만으로 매력적이다. 이 영화는 하니프 쿠레이시(Hanif Kureishi)가 각본을 쓰고 스티븐 프리어스(Stephen Frears) 감독과 함께 만들었다. 하니프 쿠레이시는 아버지가 파키스탄인이고, 어머니가 영국인인 이민자 2세 작가이다. 영국에 살아가는 이민자들에 관한 고정관념에 도전하며, 문화적 혼종성의 긴장감을 반영하는 그의 작품들에는 자신의 경험이 잘 반영되어 있다.
영국의 문화 이론가 안젤라 맥로비(Angela McRobbie)는 1980년대 후반 영국에서 다양한 인종적 주체가 등장하던 시기에 나온 세 편의 중요한 영화로 〈랭스턴을 찾아서〉(1989), 〈젊은 영혼의 반란〉(1991)와 함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1985)를 꼽은 바 있다. 보수적인 대처리즘을 배경으로 영국 사회 내에서 이민자, 유색인종, 소수민족, 노동자들의 삶을 교차시켜 보여주는 이 영화는 단순한 이분법적 선악 구조로 인종주의를 이야기하던 기존의 영화들과 단절하며 권력과 돈, 사랑, 특히 동성애의 문제를 복잡하게 다룬다고 평가 받는다.
지금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영화로 상찬받는 작품이지만, 등장했을 당시에는 영국의 우파 지식인과 파키스탄 이민사회 양쪽에서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영국인다움’에 속물적으로 적응하고 인종차별적이며 때로는 동포를 배신하기도 하는 이민자들의 모습 또한 보여주는 이 영화가 한쪽에서는 영국에 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든다는 이유로, 다른 한쪽에서는 파키스탄 이민자에 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든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자메이카 출신 이민자이자 흑인 정체성을 지닌 영국의 대표적인 문화연구자였던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은 당시 이 영화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그는 이 매력적인 영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가 논쟁이 된 이유는 영국에서 유색인이라는 경험을 긍정적이고 올바른 이미지로, 다시 말해 “격려성 허구적(cheering fictions)” 존재로 재현하길 단호히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혐오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소수자 공동체가 자신들의 문제와 복잡한 욕망을 바깥으로 드러내기란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려운 과제이다.
이 영화는 당시 영국 주류 사회에서도, 이민자 공동체 내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캐릭터들을 미디어 안에 새롭게 형성해 내고 있었다. 그것은 현실에는 존재하지만, 재현의 영역에는 등장하지 못했던 얼굴들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백인 영국 영화에 대항하며 ‘바람직한 흑인 영화’ 중심의 재현물들이 구현되던 흐름 속에서, 여전히 비가시화되었던 파키스탄 이민자 남성의 얼굴을 드러내고, 백인 노동자 계층 남성과의 동성애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이중으로 가려진 욕망의 영역을 열어젖혔다.
자본주의와 영국 주류 사회에 적응하며 부당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이민자, 자신의 성공을 위해 동포를 배신하는 이민자, 백인 남성과 사랑에 빠진 유색 인종 남성 이민자는 당시로서는 깨끗한 영국 사회를 위해 그리고 깨끗한 이민자 사회를 위해 양쪽에서 세탁되어야 할 대상들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깨끗한 정체성’이라는 판타지야말로 이 사회에서 지워져야 할 더러운 얼룩이라고 말한다.
여성들의 작은 비눗방울 같은 이야기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는 각자의 꿈을 위해 연대하는 남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오마르의 삼촌 나세르의 집에는 친척들과 파키스탄 이민자 공동체 남성들이 영국 사회에서의 계급적, 경제적 성공을 위해 그리고 서로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자주 모인다. 나세르의 아들인 샬림은 사촌 오마르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마약과 수상한 비디오테이프 거래로 오마르를 테스트해 보고 그가 쓸모 있다고 판단되자 손을 잡는다.
오마르와 조니는 자신들만의 공간을 위해 손을 잡는다. 조니 주변에는 영국 노동자 계층 백인 남성이라는 연대감과 부유한 이민자에 대한 열등감, 인종 혐오로 똘똘 뭉친 스킨헤드(영국 사회에서 유행했던 노동자 계층의 하위문화이지만, 백인 우월주의 성향과 영국 극우 정당 국민전선의 정치적 이용으로 네오나치로 변질되기도 한다.) 친구들이 있다. 젊은 시절 오마르의 아버지는 가난한 노동자 계층인 어린 조니를 아껴주었지만, 조니가 극우 나치의 행진 속에서 이민자를 혐오하는 목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조니는 과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수치심을 지니고 있기에 오마르의 아버지에게 사과하며 관계를 회복한다.
이렇듯 서로의 욕망을 이해하는 남성들 주위에는 금세 터져버릴 듯한 작은 꿈을 안고 현실과 충돌하는 여성들이 있다. 그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영국 사회에 순응하고 저항하고 독립하고 실패한다. 그것은 오마르와 조니가 꿈과 우정, 사랑을 키워가는 세탁소 한 켠에 남아있는 작은 비눗방울 같은 이야기들이다.
카메라는 오마르가 지나가는 기차를 보며 베란다에서 빨래를 치우는 뒷모습을 비추고, 술을 따르는 아버지의 손을 비춘 뒤, 방을 청소하는 오마르의 뒤로 작은 액자들을 잠시 비춘다. 액자 속에는 곱슬거리는 밝은 색 금발에 안경을 쓴 백인 여성의 초상 사진이 보인다. 그녀는 이 가족의 부인이자 어머니이다. 파키스탄 이민자 가족의 단칸방에 등장하는 의외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사실이며, 당연히 이들의 아내이자 어머니가 파키스탄계 여성일거라 생각했던 나의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레이첼이 있다. 오마르의 어머니와 비슷하게 생긴 금발의 백인 여성이며 중년인 그녀는 나세르의 애인이다. 그녀는 나세르의 조카인 오마르와 그의 애인인 조니 사이를 편견 없이 대하고, 주변 사람에게 친절한 부드러운 성격을 지니고 있다. 레이첼은 나세르가 운영하는 세차장에서 밀회를 즐기고 자주 드라이브를 다닌다. 나세르는 레이첼에게 많은 돈과 시간을 쓰는 듯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는 사랑이 가득하다. 하지만 오마르가 새롭게 오픈한 세탁소의 개업식 날, 레이첼은 그곳에서 나세르의 딸 타니아와 마주치는데, 타니아는 아버지의 불륜 상대인 레이첼에게 의외의 말로 비수를 꽂는다. 레이첼의 슬픈 표정과 흔들리는 타니아의 눈빛은 내가 이 영화에서 기억하는 가장 슬픈 장면이다.
“아빠에게 애인이 있어도 전 상관없어요. 당신에게 돈을 뿌려도 난 상관없어요. 당신이 아빠와 함께 지내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남자나 등쳐먹는 여자는 질색이에요. 더러운 기생충 같은 일 아닌가요?”(타니아)
“넌 누구한테 붙어서 살지? 우린 세대도 다르고 계급도 달라. 넌 모든 걸 할 수 있겠지만 내가 기댈 곳은 네 아빠밖에 없어.”(레이첼)
빌퀴스의 증오가 아내와 딸 그리고 연인에게 상처를 준 나세르가 아닌, 레이첼을 향해있다는 점은 안타깝지만, 그것은 당시에 그녀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영국 사회에서 파키스탄 이민자 1세대 여성이 남편과 가족 그리고 파키스탄 공동체 없이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저주에 걸려 나세르를 떠난 레이첼이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증오를 견딜 힘이 없다고 말하며 떠나는 레이첼의 뒷모습이 증오에 무너진 남편으로 인해 죽음을 선택한 오마르 어머니의 모습과 중첩된다. 파키스탄 이민자 공동체와 얽히는 영국 백인 여성들의 삶에 관한 긴 이야기 또한 남겨져 있다고, 침묵으로 말할 뿐이다.
마법의 힘으로, 혹은 스스로의 결단으로 퇴장하는 여성들
그리고 타니아가 있다. 타니아는 아버지 나세르와 어머니 빌퀴스의 통제 아래 사는 삶을 갑갑해하는 자유로운 성향을 감추지 않는다. 오마르가 처음 삼촌 나세르의 집에 방문했을 당시, 오마르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며 이 집에서 나가기 위해 오마르를 이용하려고 하기도 한다. 아버지와 오마르를 비롯해 파키스탄 이민자 공동체의 남성 친척, 지인들이 방에 모여 술과 담배를 피우며 떠들 때, 창문 밖에서 몰래 방안을 들여다보며 오마르와 눈이 마주치자 윗옷을 들어 올려 가슴을 보여주는 대담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타니아는 가족들이 없는 방에서 오마르를 유혹하기도 하며, 정략결혼일지라도 가족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여준다. 물론 그때마다 어머니 빌퀴스가 매섭게 뒤에서 감시하고 있다.
하지만 오마르와 조니 사이의 관계를 알게 된 타니아는 자신과 오마르를 결혼시키려는 아버지의 가부장주의로부터 탈출하려 했던 자신의 계획이 조니와 오마르의 동성애를 숨기는 장막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세르와 조니, 조니와 오마르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타니아의 자유로운 삶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타니아는 자신이 원하는 걸 줄 수 없는 남성들만의 공동체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타니아의 아버지 나세르가 자신의 형과 화해하기 위해 오마르의 집에 방문했을 때, 저 멀리 기찻길 위에서 타니아는 여행 가방을 들고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다. 기차는 빠르게 지나가고, 타니아는 사라진다.
타니아는 주술의 힘을 사용하여, 그런 힘을 사용하지 않아도 자신다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계로 이동한 건 아닐까.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당시로서는 재현하지 못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있다는 한계로 느껴졌지만, 다시 볼수록 ‘마술적 힘으로 혹은 자신의 결단으로 영화가 끝나기 전에 퇴장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본 것 같아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나세르는 형과 눈물로 화해하고, 조니와 오마르는 세탁소 뒷방에서 서로의 몸을 씻겨준다. 상상할 수 있을 법한 뒷이야기를 남겨둔 채 남성들이 영화 안에 남겨져 있다면, 여성들은 영화가 끝나기 전에 자신의 힘으로 퇴장을 선택했다. 현실 혹은 영화가 자신의 본 모습을 재현해 주지 않는다면 사라져 버리겠다는 여성들의 뒷모습을 목격한 우리는, 이제 어떤 다음 이야기로 사라진 그녀들을 불러낼 수 있을까?
[필자 소개] 전솔비. 시각문화 연구자. 정체성과 수행성의 문제를 연구하며 전시와 책을 만들어왔다. 동시대 현장에서 생산되는 이미지의 정치성과 예술적 실천을 탐구하며 예술가, 연구자, 활동가 동료들과 여러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난민캠프라는 현장을 만나며 〈연약한 기록들의 춤〉(신촌문화발전소, 2022), 〈캠프 사운드 커뮤니티〉(2023)를 함께 만들고, 『춤추고 싶은데 집이 너무 좁아서』(파시클, 2024)라는 책을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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