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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내가 활동지원 서비스하는 이용인)과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지하철 출근길 투쟁’을 동행하지 못한 날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유튜브 라이브로 지하철 행동을 지켜본다. 오늘도 역시 아수라장.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소장인 형숙 님이 지하철 출입구에 휠체어를 대고 시민들의 고함을 그대로 받고 있고, 약간 비켜선 뒤쪽에 Moon의 얼굴이 보였다.
저녁에 Moon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에서 집으로 내려가는 길인데, 저녁에 와달라는 요청이었다. 현관에 들어서는 Moon을 보니, 휠체어 머리 받침대가 부러진 채 손잡이에 걸려있고, 텀블러 받침대도 떨어져 나가고 없다. 씻으면서 보니, 몸 여기저기에 푸른 멍자국이 있다. “오늘 힘들었나 봐요.”
“오늘 500명이 왔어요! 대단했어요!… 서교공(서울교통공사)이 과하게 (진압)하더라고요. 형숙샘에게 고함치고, 잡아당기고... 뒤에서 OO샘이랑 형숙샘 지켰어요. 학익진(학이 날개를 펼친 모양처럼 부채꼴 형태로 포위하는 전술)인 셈이지요!” 서울교통공사, 그리고 경찰과 격렬하게 맞붙은 투쟁의 현장은 실은, 안간힘을 쓰며 서로를 지키고 보살피는 시간이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피로에 지쳐있던 Moon이 ‘학익진’을 묘사하며 웃는다. 활짝 피어난다.
가끔 나는 통탄한다. 내가 사진을 찍는 사람이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닌 것을.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들, 핸드폰으로라도 찍어보지만, 찍히는 건 그저 뇌병변 장애인의 몸일 뿐, 내 카메라 화소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이런 장면 앞에서.
지난 여름 ‘서울역 사건’도 그런 순간이었다. 그날도 전장연 시위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고 있었다. 4호선 서울역 지하철에서 내려 열차를 타기 위해 부지런히 달렸다. 휠체어 이용자에게 4호선에서 내려 서울역으로 가는 길은 복잡하고 길다. 나는 그저 Moon을 쫓아간다. 부지런히 달린 덕분에 서울역에 조금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1박 2일의 고단한 투쟁 후 황금 같은 20분이라니! 달콤한 차 한 잔 마실 곳을 찾는데, 외국인 휠체어 이용자와 동행인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동행인이 회현역이 도착지인 핸드폰 길찾기 화면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영어로 물어왔다. 방향 설명을 영어로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내가 4호선으로 가는 길 자체를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난감했다.
그 순간, Moon의 휠체어가 방향을 바꿔 달리기 시작했다. 4호선 지하철역 쪽으로. 셋이 쳐다보는데, Moon이 손을 들어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제야 우리 셋이 따라나섰다. 이들을 4호선 열차의 회현역 방향 플랫폼 입구까지 데려다주었다. 허니문 여행을 한국으로 온 부부는 헤매는 중이었다고, 고맙다고 거듭 말했다. 20분을 그렇게 보내고 기차를 놓칠세라 다시 서울역을 향해 뛰는데, Moon이 나를 위로하듯 말한다. “그거는 한국말로도 설명 못 해요.”
우리는 모두 ‘어느 엄마의 아이’ 신생아는 산모에게 의존하지만, 산모 역시 ‘둘리아’가 필요하다
페미니스트 철학자로 장애학과 돌봄이론 분야의 석학이자, 중증 인지장애를 가진 딸 ‘세샤’의 어머니이기도 한 에바 키테이(Eva Feder Kittay)는 『돌봄: 사랑의 노동』이라는 책에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이성, 자율성, 합리성 같은 속성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어느 엄마의 아이(some mother’s child)’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두 취약한 존재이며, 서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서로를 돌보는 것은 인간됨의 전제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신생아와 산모의 상황을 가져온다. 신생아의 절대적이고 끊임없는 의존 상황에서 산모 역시 취약하다. 산모가 아이를 걱정하며 살피는 동안, 역시 돌봄을 받아야 하는 산모의 욕구와 필요는 억압된다. 그래서 키테이는 ‘둘리아(doulia) 원칙’을 말한다. 그리스에서 둘리아는 그리스 시대 산모가 아이를 돌볼 때, ‘산모를 돌보는 의무’를 칭하는 말이었다. 즉, 둘리아는 아이를 직접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산모를 돌봄으로써 산모가 아이를 잘 돌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사람’이었다.
이 개념은 돌봄이 돌봄인과 돌봄의존인의 단순한 의존 관계를 넘어서 더 깊은 수준의 의존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돌봄이 개인 간의 것이 아니라 ‘공적 윤리의 의무’임을 깨닫게 한다.
이 엄연한 사실이 누락되고 은폐되고, 공적 윤리로서 돌봄의 정의가 지연되었을 때 누가, 어떻게 고통받는지, 그 결과가 터져나오는 곳이 바로 출근길 지하철,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 현장이다. 장애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승객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은 아무런 돌봄을 받지 못한 채, 돌봐야 할 아이가 울어대는 곳으로 시간에 맞춰 가야 하는 ‘산모’ 승객들은 멈춘 지하철에서 고함을 지른다. 이들이 장애인에게 지르는 고함은 사실은 이 사회를 향한 비명일 것이다. 자신도 돌봄을 받아야 한다고.
지난 달 출근길 지하철 투쟁을 할 때, 장애인 시위대를 향해 온갖 비난과 고함이 쏟아지는 중에 한 시민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좀 합시다. 그럴 만하니까 하겠죠.”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인데도 모든 사람이 정확히 들은 모양이었다. 지하철 안이 일순 조용해지더니, 일제히 비난의 화살과 시선 폭력이 그 시민을 향해 퍼부어졌다. 장작더미에 기름을 붓는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이어 격한 지하철 즉석 토론이 벌어졌다. 어딘가에서 이 시큰둥 목소리에 합세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어찌나 뜨거웠는지, 승객들은 자체적으로 불을 껐다.
하지만, 그 짧은 5분여의 시간. 혐오의 뭇매를 맨몸으로 감당하고 있던 장애시민들은 잠시 쉬며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 시민은 ‘어느 엄마의 아이’ 장애시민들의 둘리아였다.
내가 찍고 싶은 순간은 이런 것이다. 과격해 보이지만 실은 필사적으로 서로를 보살피는 시위의 현장, 돌봄을 받아야할 때 오히려 능숙하게 둘리아로 변신하는 Moon의 손짓, 장애시민에게 잠시의 쉼을 선사했던 둘리아 시민의 목소리... 내가 셔터를 누르지 못하는 것은 화소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어느 엄마의 아이’고, 동시에 어머니이고, 둘리아이므로. 언제라도 자리 바꾸어 이동할 것이므로. 설사 오늘 이동을 못했다 하더라도, 이 아비규환의 지하철이 기어이 우리 사회를 둘리아의 사회로 이동시킬 것이므로.
[필자 소개] 호미. 장애활동지원사이며 동화 집필 노동자. 한국양성평등교육원 농촌성평등 전문 강사, 전국귀농운동본부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장애활동서비스 이용인’ Moon을 돌보고 Moon으로부터 돌봄을 받으며 하루하루 연명합니다. 일하고 사랑하며, 투쟁하고 놀며 새로운 몸으로 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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