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여성’을 연기하는 존재들에 바치는 헌사다큐멘터리 감독이 추천하는 영화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8년, 미국 보스턴의 아파트에서 한 여성이 흉기에 찔려 잔인하게 살해당한 채 발견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리타 헤스터(Rita Hester). 흑인 트랜스젠더 여성이었던 그녀는 보스턴의 퀴어 커뮤니티에서 잘 알려진, 사랑 받는 퍼포머이자 동료였다. 당시 보스턴에서는 연이은 트랜스 여성 살해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명백한 트랜스젠더 혐오범죄였다.
경찰은 끝내 리타를 살해한 범인을 잡지 못했다. 보스턴의 퀴어 커뮤니티는 이듬해인 1999년 11월 20일, 트랜스젠더 혐오로 세상을 떠난 리타와 또 다른 희생자 여성들을 기억하기 위한 추모 집회를 열었다. 그 후로 매년 11월 20일은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이 되었다.
그 시기에, 스페인의 영화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 개봉했다. 이 영화는 칸 영화제 감독상과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며 주목 받았다. 영화는 무엇보다도 트랜스젠더 인권 운동에 있어 중요한 해에 등장한, 트랜스 여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자막이 뜬다.
“모든 여배우, 연기하는 남녀 모두, 여자가 된 남자들, 어머니가 되고자 한 여자들 그리고 내 어머니께 바칩니다.”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두 도시로 나뉜다. 영화는 마드리드에서 시작한다. 간호사인 마누엘라는 고등학생인 아들 에스테반과 함께 영화 〈이브의 모든 것〉(조지 큐커 감독, 1950)을 보며 대화를 나눈다. 에스테반은 자신의 공책에 연필로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라는 제목을 적는다. 그는 엄마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에스테반의 생일을 축하하며, 두 사람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연극 〈욕망이라는 전차〉를 보러 간다. 연극을 보고 나와서 에스테반은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 우마의 사인을 받고 싶다고 말한다. 배우들이 공연장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며, 에스테반은 엄마에게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해달라’고 요청한다. 마누엘라는 복잡한 표정으로, ‘네가 원한다면 모두 말해줄게.’라고 결심한 듯 답한다.
하지만 그 직후, 에스테반은 배우 우마가 탄 택시를 쫓아 뛰어가다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다. 영화가 시작한 지 20분 만에, ‘아들을 위해서 뭐든 할 수 있었던’ 어머니는 아들을 잃는다.
아들을 잃은 마누엘라는 아들이 궁금해했던 과거의 공간, 아들이 태어나기 전 자신이 살던 도시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지난 17년 동안 한 번도 찾은 적이 없었던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롤라’라는 이름의 여성이다.
마누엘라를 포함해 이 영화에 나오는 중요한 인물들은 모두 ‘여성’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비정상적’이고, 몸과 마음이 병들었고, 가혹한 현실 앞에서 슬퍼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각자의 불행을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서로의 곁에서 힘이 되어 준다.
마누엘라가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첫 번째 여자 아그라도는 거리에서 일하는 성노동자 트랜스젠더 여성이다. 과거에 롤라와 아그라도, 마누엘라는 셋이서 절친한 친구였다. 아그라도는 갑자기 사라졌다가 17년 만에 나타난 옛 친구 마누엘라를 반겨주며, 그녀가 다시 이 도시에 정착하는 것을 돕는다. 아그라도는 “그 샤넬 진짜야?”라고 물으면 “나한테 진짜인 건 실리콘과 내 감정들 밖에 없어.”라고 대답하는 재미있는 사람이다. 아그라도 이름의 뜻은 기쁨을 주는 사람이라고 한다.
아그라도는 마누엘라에게 수녀 로사를 소개해준다. 트랜스젠더 성노동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는 로사는 부유한 집안의 딸이다. 안락한 집과 부모님의 품을 벗어나 트랜스젠더들과 성노동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던 그녀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로사는 마누엘라에게만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 아이의 아빠는 마누엘라가 찾고 있는 롤라이다. 롤라와의 관계에서 에이즈에 걸렸을 수도 있다고 말하며, 집으로도 수녀원으로도 갈 수 없는 자신을 도와달라고 한다. 마누엘라는 아픈 로사의 새로운 보호자가 된다.
마누엘라가 만나는 마지막 여자는 롤라다. 롤라는 마누엘라의 남편이었지만, 돈 벌러 파리로 떠났다가 돌아올 때는 자기보다도 더 큰 가슴을 달고 나타난 트랜스 여성이다. 추정컨대 롤라는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트랜지션 이후 술과 도박에 빠졌고, 마누엘라는 아이를 임신한 후 그런 롤라를 버리고 도망치듯 이 도시를 떠났다. 지금 롤라는 에이즈에 감염되어 죽어가고 있다. 영화는 에스테반의 아버지인 롤라를 찾아가는 영화이지만, 롤라가 트랜스 여성이라거나 에이즈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충격 반전’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마침내 롤라가 등장했을 때,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짧지만 강렬한 장면이다.
아들을 잃은 엄마, 성노동자 트랜스 여성, 임신하고 에이즈에 걸린 수녀, 마약중독자 애인을 둔 레즈비언, 그리고 아들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트랜스 여성. 이들은 자신의 결핍과 상실, 슬픔을 누구에게 털어놓지 못해 속이 곪아 있다. 우연히 서로를 만나고 본능적으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비밀을 서로에게 공유한다. 그리고 도와주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만, 서로에게 친절을 베푼다. 우마의 연극 대사 중에 “낯선 이의 친절에 제가 의지하네요.”라는 대사가 나온다. 연극 속에서는 이 대사가 허울뿐이었지만, 이 여성들은 실제로 낯선 서로에게 친절을 베푼다. 서로를 향한 친절은 세상으로부터 빗겨나간 이들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준다.
연기(act)하는 여자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라는 제목 때문에 이 영화가 말하는 여성성이 모성일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영화가 말하는 여성은 오히려 연기하는(acting) 존재에 가깝다. 여기에서 연기(act)는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려는 본질주의자의 폭력으로부터 우리의 존재를 해방시키는 행위다.
이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인 아그라도의 스탠드업 코미디 쇼 역시 극장에서 벌어진다. 마누엘라를 대신해 우마의 매니저가 된 아그라도는 배우들의 펑크를 메우기 위해 무대에 오른다. 앞서 마누엘라가 배우의 펑크를 메우기 위해 배역을 연기했던 것과 달리, 아그라도는 무대 위에서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펼친다. 그녀는 트랜스젠더 여성으로서의 자기 몸을 소재로 농담을 하며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아그라도가 무대 위에서 펼치는 연기는 우리의 진짜 모습도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펼치는 연기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더 나아가서 여성성 그 자체도 연기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연극 무대 위에서 진짜와 가짜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인생도 역시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은 없고, 우리는 자신이 연기할 배역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탐색해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당당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무대를 꿈꿔야 한다. 이런 깨달음이 트랜스 여성인 아그라도가 전하는 메시지다.
이 영화의 중심에는 내가 살아보지 않은 인생을 함부로 단정 짓지 않는 존중의 태도가 있다. 서로를 존중할 줄 아는 그 친절함은 상처받은 비극적인 세상에서 서로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된다.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을 보내며, 다시 묻는다.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인정하고, 낯선 이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 함께할 영화다.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소개] 2004년 설립된 연분홍치마는 여성주의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소통과 연대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다양한 현장에서 미디어로 연대하며 다큐멘터리, 극영화, 웹 콘텐츠 등을 제작하고 있다. pink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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