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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구네 커플의 아이를 보러 갔다. 태어난지 아직 100일도 안된 아기는 카페에서 여자 넷에 둘러싸여 꽤 의젓하게 시간을 보냈다. 돌아가며 아기를 안고 흔들며, 엄마 둘의 우당탕탕 육아 스토리를 들었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인력이 필요한지 새삼 느끼게 되는 시간이었다. 육아의 무게를 아주 조금 느끼는 한편 ‘아이를 키운다’는 경험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한국 사회의 기준에서 ‘이상한’ 형태의 가족으로서 임·출·육을 오롯이 감당할 자신은 없다. 그럴 바엔 여러 명이 함께 아이를 키우는 일이라면 그나마 도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뜬구름 잡는 생각만 해봤을 뿐이다. 그런데 며칠 후, 일본 드라마 시리즈인 〈우리들이 선택한 집〉(원제: ぼくたちん家)을 보게 됐다.
드라마는 50세인 겐이치가 ‘패밀리 사이즈’의 아이스크림을 혼자 먹다가 결혼상담소를 찾아가는 걸로 시작한다. 게이인 그가 원하는 건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어줄 남자다.
그런 와중 자신의 직장인 동물원에 버려진 거북이와 강아지들, 거기다 앵무새까지 입양해 키우고 있던 겐이치는 반려동물 금지였던 집에서 결국 쫓겨나게 된다. 급박하게 이사하게 된 곳은 60년된 낡은 빌라지만, 함께 쓸 수 있는 마당이 있고 반려동물 입주도 가능한 집이다. 그 곳에서 겐이치는 호타루라는 중학교 3학년인 소녀를 만나게 된다.
알고 보니 호타루는 양육자 없이 집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으며 신주쿠 카부키쵸의 신주쿠 토호 빌딩 근처를 배회하는, 소위 ‘토요코 키즈’다(トー横よこキッズ, 학교 밖 청소년, 탈가정 청소년, 홈리스 청소년 등으로 다양한 범죄에 노출되거나 휘말리기도 해 ‘문제 집단’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당연히 그들의 경험은 각기 다르다).
호타루의 양육자들은 호타루가 9살 때 이혼했다. 아버지는 재혼 후 새로운 가정을 꾸렸고, 호타루를 비롯한 이전의 가족에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도 호타루는 엄마와 잘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엄마로부터 “당분간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으니 혼자서 잘 지내고 있으라”는 전화가 오기 전까진 말이다. 그 전화 이후 경찰이 집에 들이닥쳤고, 호타루의 엄마 토모에가 회사 돈을 횡령했다는 사실이 뉴스에 나왔다. 횡령 금액은 32,261,570엔이었다.
호타루는 자신을 시설로 보내려는 사회복지사를 속이고 혼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던 호타루는 겐이치를 만나게 되고, 겐이치가 게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겐이치에게 “정말 게이인 거예요? 남자를 좋아하시는 거예요? 키스는요? 키스는 평범하게 해요?”라는 무례한 질문 세례를 쏟아내긴 하지만, 호타루는 이내 겐이치에게 어떤 ‘연결됨’을 느낀다. 사회에서 ‘이상한’ 존재로 여겨지는, 외로운 이들의 동지애 같은 무언가.
그러다가 중3인 호타루는 담임 선생님인 사쿠로부터 ‘진로희망서’ 제출과 부모님 면담을 통보 받는다. 사쿠 또한 토모에의 횡령과 도주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아빠인 진과 면담하겠다고 한 것이다. 호타루는 진을 찾아가 보지만, “내가 무슨 부모 면담이야. 무리야 무리~”라고 거절하는 진에게 설득할 의지도 생기지 않아 그냥 말을 접는다. 그리고 호타루는 얼렁뚱땅 겐이치에게 아빠 행세를 요구하고, 겐이치는 거기에 휘말리고 만다. 이후 호타루는 손수 적은 “부모-자식 계약서”를 겐이치에게 들이민다. 가짜 아빠 행세를 해준다면 계약금 32,261,570엔을 주겠다고 쓰여 있다.
드라마를 보면서 처음 횡령금액이 등장했을 때부터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1억 혹은 10억이 아니라 32,261,570엔이라니. 분명 어떤 목적이 있는 숫자였다. 과연 이 숫자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리고 토모에는 왜 횡령을 한 걸까? 이 드라마를 볼 독자를 위해 약간의 힌트만 주자면, 토모에가 그 회사에서 계약직 여성으로 줄곧 일해왔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토모에에게도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사랑과 혁명
호타루의 사연을 알고 난 후, 겐이치는 대담하고 황당한 “부모-자식 계약”에 동참하기로 한다. 단, 돈은 그냥 보관해주기만 하는 걸로. 물론 이 계약이 순조롭게 전개될리 만무했다. 겐이치는 호타루의 담임인 사쿠와 사랑에 빠지고, 호타루의 친아빠 진은 전처의 횡령금을 뺏기 위해 딸에게 접근한다. 거기다 겐이치와 호타루가 머무는 빌라의 관리자이자 주인인 쿄코, 사쿠의 전 남친 료타, 결혼상담소 직원 마도카, 겐이치의 친구이자 부동산 직원 세이지 등... 예상치 못한 사람들까지 점점 ‘호타루와 겐이치 둘만의 비밀이어야 했던’ 이 계약에 연루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들이 선택한 집〉은 토요코 키즈, 게이, 계약직 싱글맘, 이혼남, 중년 비혼, 청년 비혼 등 ‘정상성’의 기준에서 뭐 하나가 탈락된 사람들이 모여, 사회가 인정하지 않지만 자신들이 선택한 공동체를 만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남들이 보기에 멋지고 근사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더불어 〈우리들이 선택한 집〉의 주요 서사 중 하나는 게이서사다. 여전히 사회적 차별 속에서 살아가는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극 중에서 사쿠는 남자친구와의 미래가 그려지지 않아서 헤어짐을 선택했다. 연애하는 건 좋지만 이 연애의 끝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결국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에 의지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쿠는 겐이치를 만나고 호타루와의 관계에도 엮이게 되면서 다시금 목표를 갖는다. 집을 사겠다는 것. 집이라는 울타리가 생기면 게이인 나도 파트너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사쿠와 겐이치의 꿈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극 중에서 몇 번이고 인용되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라는 말은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스포일러 유포 없이 나의 소감을 말하자면, 서두에 말했던 “뜬구름 잡는 일도 혁명이 될 수 있을지도?!”이다. 무슨 말인지 궁금하시면 드라마를 보시라.
소수자 서사 다루는 ‘인클루시브 프로듀서’의 등장
이 작품에 관해 하나 조금 특이한 점을 덧붙인다. 이 드라마 제작진엔 “인클루시브 프로듀서”(Inclusive Producer)라는 새로운 직업이 포함되어 있다. 인클루시브(포용성) 프로듀서를 담당한 시라카와 다이스케 씨는 일본 공중파 채널 중 하나인 NTV 소속으로, 보도국 젠더부에 소속되어 있다.
인클루시브 프로듀서는 단지 대본을 감수하는 정도의 일만 하는 게 아니다. 제작팀 소속으로 현장에서 배우와 소통하고, 미술팀이나 소품팀과도 논의한다. 작품이 전반적으로 소수자의 서사를 제대로 담아내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극 중에 커밍아웃 장면이 있다면, 대사 뿐만 아니라 음악과 연출이 어떻게 그 장면을 표현할 것인지 함께 논의한다. 어떻게 장면을 구상하는지에 따라 커밍아웃이 슬프게 혹은 행복하게 그려질 수 있다.
일본 드라마에서 성소수자 관련 이야기가 나올 때면 엔딩크레딧에 ‘LGBT 감수’가 나오는 건 종종 봤지만 “인클루시브 프로듀서”라는 직업까지 생겼다는 것에 꽤 놀랐다. 소수자 이야기를 제대로 담아내기 위한 방송사/제작사의 노력이 어디까지 나아가고 있는지 볼 수 있어서 중요한 사례라는 생각도 들었다.
또 한 해가 바뀌었다. 알게 모르게 세상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새해에는 조금 더 뜬구름 잡는 생각을 많이 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게 언젠가 혁명이 될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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