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나가면 새로운 걸 만나게 되더라”

[공연예술 독립기획자 고주영이 만나다] 문화예술기획자·댄스박스 공동대표 요코보리 후미

고주영 | 기사입력 2026/01/22 [16:32]

“밖으로 나가면 새로운 걸 만나게 되더라”

[공연예술 독립기획자 고주영이 만나다] 문화예술기획자·댄스박스 공동대표 요코보리 후미

고주영 | 입력 : 2026/01/22 [16:32]

운이 좋게도 2011년과 2023년, 두 차례 일본에서 2개월 가량을 머물며 리서치할 기회를 가진 적이 있다. 3.11 동일본 대지진 직후였던 2011년에 나의 리서치는, 장르나 전형적인 창작 문법에서 벗어나 ‘근본 없이(positive)’ 자기 욕망에 충실하게 만드는 컨템포러리 예술이 주제였고, 2023년에는 ‘사회적 소수자와 예술’이라는 주제로 리서치를 진행했다.

이 두 리서치 레지던시는 12년의 간극 동안 내가 기획자로서 무엇을 경험했고 예술에 대해 어떻게 갱신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 같기도 하다.

 

리서치를 진행할 때, 땅이 넓은 일본의 지역별로(간토, 간사이, 규슈 등) 매개자를 소개받아, 그 지역의 사람과 현장을 둘러보는 방식은 공통적이었다. 2011년과 2023년, 주제의 차이만큼 각 지역의 매개자도 크게 달라졌는데, 단 한 사람, 간사이 지역을 안내해준 사람만은 동일했다.

레이더가 어쩌면 나와 같은 곳에서 같은 곳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한 동갑내기 동료. 현재 고베의 신나가타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기획자 요코보리 후미(横堀ふみ).

 

▲ 고베 신나가타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문화예술기획자이자 ‘댄스박스’(동명의 극장을 운영하는 예술단체)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요코보리 후미(横堀ふみ). [사진=이와모토 준페이(Iwamoto Junpei) 제공]

 

중간중간 다른 곳에서 잠깐씩 보기는 했지만, 2023년 리서치 때 고베에서 간만에 둘이서 따뜻한 소바를 후루룩거리며 후미가 나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이제 공연장에서 잘 빠진 공연 만드는 거 재미없어.”

 

찌찌뽕. 2011년 고베와 오사카에서 개항 당시 외국인 공관을 활용한 음악 스튜디오이자 공연장, 지하철 역사에서 진행하는 공연을 소개해주던 후미. 2023년에는 고베의 자이니치코리안(이 글에서는 재일[자이니치]조선인, 재일[자이니치]한국인을 구분하지 않고 이 둘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로, 일본에서도 통용되는 단어인 ‘자이니치코리안’을 쓴다.) 어르신을 위한 데이케어센터인 〈고향의 집〉, 국적, 체류자격, 성별, 장애 유무를 불문한 다세대 돌봄 셰어하우스인 〈해피하우스〉, 자이니치코리안의 역사를 아카이빙하고 공유하는 〈고베코리아교육문화센터〉 등으로 나를 이끌었다.

 

“이제 극장일 그만하고 싶다”던 동갑내기 동료, 지금은

 

후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가 지금 어디에, 왜, 서 있는지를 오히려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온라인 대화를 청했다.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묻자 주말이나 화요일 오전이면 괜찮다는 답이 돌아왔다. 화요일 이외의 평일 오전에는 2년째 동네에 있는 중학교에서 일하고 있다고.

다양한 국적과 혈통을 가진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인근의 중학교가 다문화정책학교로 지정되어 여러 이유로 학교에 오기 싫어하거나, 적응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지원학급 설치가 의무화되었고, 그 학생들을 지도하고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임을 해도 되고, 자율학습을 해도 되고, 그날 뭘 할지를 같이 정하기도 하는데, 아무튼 10분이라도 학교에 오도록 해 생존과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장치이다.

 

함께 소바를 먹으며 “이제 극장일 그만하고 싶다”고 토로하던 후미가 이제 정말 다른 길을 내딛기 시작한 걸까 싶지만, 얼마 전 극장의 창립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며 극장의 공동대표를 맡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댄스박스(극장을 운영하는 동명의 비영리단체)가 문을 연 지 30주년이고, 내가 여기서 대학 4학년 때 자원활동을 시작했으니, 27년차. 대표가 떠났으니 (나까지) 떠나기는 어려웠어.”

 

돌아가신 대표는 후미를 공연계로, 〈댄스박스〉로 이끈 사람이기도 하다. 공연에 관심이 생겨 이런저런 강의를 들으러 다니다가 만난 것이 그 대표였으니. “현대무용에는 문외한이었지만, 대표가 돈만 밝히는 구린 사람 같진 않았거든.”

 

▲ 극장일 그만하고 싶다고 토로하던 후미는 얼마 전, 오히려 극장(댄스박스)의 대표가 되어버렸다. 극장 ‘밖’을 바라보는 대표가 있는 극장에서는, 혹은 그런 극장을 품은 지역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인터뷰이 제공 사진)


“보는 사람의 내장에 가닿는 공연을 만들고 싶었어”

 

후미는 대학에서 인도네시아어를 전공했다. 인도네시아의 다양한 부족들의 전통무용이 세계 컨템포러리 댄스씬에서 각광받는 지금이야 굉장히 개연성 있는 전공이지만, “외고를 나왔지만, 나랑 잘 안 맞는 영어 말고 공부하는 사람이 적은 아시아권 언어를 공부하고 싶었는데, 내가 나고 자란 나라시에 한 종교가 포교를 위해 다양한 언어 전공을 설치한 대학이 있어서” 선택했을 뿐이라고.

 

“집안 사정으로 졸업을 못했지만, 아버지가 미술대학 디자인학과 출신이고 재학 중에 연극 무대디자인 작업도 하고, 피터 브룩 같은 대가의 작품도 챙겨봤었대. (열여섯에 세상을 떠난) 남동생이 시각·지적장애가 있었고, 나중엔 신장질환도 심해져서, 교사였던 엄마도 일을 그만두고 두 분이 외가의 청과물가게를 도우면서 동생을 돌봤거든. 가게일을 하면서 아빠는 틈틈이 그림을 그렸는데, 친척들이 그 그림을 사주면서 예술작업을 이어간 셈이지. 그리고 돌봄과 일상에 지치면 기분전환하러 공연장에 가시곤 했는데, 방패막 삼아 나를 꼭 데려갔어. 기억에 남는 건 니나가와 유키오가 연출한 연극, 아빠가 좋아하던 바로크음악 연주회. 그게 예술, 공연장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지.”

 

〈댄스박스〉는 2002년에 오사카에서도 험지로 꼽히는 신세카이에 있는, 건물에 청룡열차가 붙어 있는 곳에 극장을 마련했다. 마침 문을 연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으로만 사람들이 몰려 파산 직전이었던 복합문화시설에서 실험적인 예술활동을 하던 서너 개 단체가 지원을 받아 마련한 공간이었다. 아티스트들이 극장 스태프로 함께 일했고, 술 마시다가 아이디어 내고, 직접 사다리 타고 올라가 조명 달고 하는 식으로 공연을 만들었다.

“너무 즐거웠어. 가내수공업형 공연을 만드는 것이 대표의 철학이었고, 나 역시 그 기간 동안 수행을 했던 것 같아.”

 

그렇게 공연장, 창작작업에 익숙해지면서 이 예술가와 저 예술가가 함께 작업하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하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고, 요코보리 후미의 ‘기획’이 시작됐다.

“보는 사람의 내장에 가닿는 느낌의 공연을 만들고 싶었어.”

 

신나가타로 이사한 댄스박스, 지역의 필요에 맞게 새로운 기획이 발굴되고

 

댄스박스는 5년간 오사카부의 지원을 받아 활동을 하다가, 지원이 끊긴 후 몇 군데를 거쳐 극장의 활동을 눈여겨보던 고베시 문화담당 공무원(!)의 권유로 고베로, 최종적으로는 지금의 자리인 신나가타(新長田)에 자리를 잡았다.

 

“신나가타는 1995년에 있었던 한신 아와지 대지진 당시 복구가 제일 늦어진 지역이라더라고. 처음 이사를 왔는데, 극장이 있는 상점가에 빈 점포도 많고 텃세도 있고…. 왜 여기로 이사를 온 걸까 싶었지만, 일단 「신나가타 댄스 사정」이라는 작업을 기획해 극장 밖으로 나가 주민들을 만나기 시작했어.”

 

아티스트와 함께 지역을 돌아다니며 지역의 역사를 알게 되면서 이해가 깊어졌다. 이 지역 건물들이 대부분 목조건물이라 지진의 타격이 심했고 복구도 늦어졌다는 사실, 이곳이 자이니치코리안들이 모여 사는 곳이고, 과거엔 피차별부락(전근대 시절 ‘천민’ 계급의 집단거주지)도 존재했다는 사실, 일본의 외딴 섬에서 집단 이주한 주민들의 취락이라는 사실 등.

「신나가타 댄스 사정」은 굳이 정의하자면 커뮤니티댄스 프로젝트였지만, 극장이 지역을, 지역이 극장의 존재를 알게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사카 같은 대도시에 있을 때는 이 극장에서 공연하고 싶어 하는 아티스트도 많았고, 뭘 해도 보러오는 기본 관객층이 있었지만, 신나가타로 이사를 오니 일단, 〈댄스박스〉에서 공연을 하려는 아티스트가 없었고, 보러 오는 관객도 없는 거야. 그래서 이 동네에 거주하면서 무용예술가가 될 수 있도록 기획한 게 ‘신나가타 국내 무용 유학 프로젝트’야. 우리가 가진 무용 전문성과 네트워크를 활용해 체류할 공간과 교육받고 역량을 쌓을 수 있는 장을 제공하고, 극장을 매개로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하며 극장과 무용을 알리고, 최종적으로 결과발표 공연을 할 때면 외지에 사는 아티스트들의 지인들은 물론 주민들이 관람을 하러 신나가타를, 〈댄스박스〉를 찾게 되는 거지.”

 

▲ 신나가타역 앞 광장에서 진행한 베트남의 전통예술 ‘수상인형극’ 공연 모습. 신나가타(新長田)는 자이니치코리안을 비롯해 아시아 이주민들이 많이 산다. 크지 않은 지역이지만 곳곳에 한국 식당이나 베트남 식당이 있는 아시안 미식 격전지이기도 하다. (인터뷰이 제공 사진)


이런 기획이야말로 필요가 기획을 만든다는 명제에 대한 입증 아닐까. 이 프로젝트 덕에 신나가타에서 창작자로 입문해 성장한 안무가들이 늘어났고, 급기야 이곳에 정착해 창작을 하고 지역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고, 메이드인 신나가타 무용 작품을 일본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선보이는 사례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후미가 가진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해외 네트워크를 활용해, 해외 (무용뿐 아니라 여러 장르의) 아티스트들 역시 신나가타에 와서 체류하며 영감을 받아 창작을 한다.

 

랑토이(우리동네라는 베트남어) 작은 도서관을 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가족형태, 다양한 세대가 사는 ‘우리 마을’을 보여주는 공연들

 

댄스박스는 후미의 동남아시아에 대한 관심과 네트워크에 기반한 활동도 이어왔는데, 그 중 후미 인생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 일본 외무성의 초청으로 베트남에서 온 방문단이 극장을 찾았던 일이었다. 이때 방문단의 일원이었던 현재의 남편을 처음 만났고, 결혼을 하고 출산을 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워낙 자이니치코리안 등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동남아시아 이주자들, 특히 베트남인들이 다수 신나가타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신나가타는 또 하나의 색깔을 갖게 되었다. 신나가타는 크지 않은 지역이지만 눈을 돌리는 곳마다 한국 식당이나 베트남 식당이 있는 아시안 미식 격전지이기도 하다.

 

▲ 후미는 집 1층에 랑토이(làng tôi)라는 이름의 공간을 마련했다. 베트남어로 ‘우리 동네’라는 뜻이다. 베트남어로 된 책을 비치한 작은도서관도 있고, 베트남 문화를 즐기는 공부방을 열기도 한다. (인터뷰이 제공 사진)


후미는 남편과 함께 집 1층에 랑토이(làng tôi, 베트남어로 ‘우리 동네’라는 뜻)라는 공간을 마련하고, 한켠에 작은도서관을 열어 베트남어 책을 비치하는 것은 물론, 베트남 문화를 배우고 즐길 수 있는 공부방을 열고, 여름방학이면 베트남의 전문가를 초청해 수상인형극 워크숍을 진행하고 전철역 앞 광장에서 공연을 한다.

 

극장이라는 장소를 통해, 일상 안에서 ‘다른 시간’을 만들기

 

신나가타에 오면서 후미의 기획도 달라졌다. 〈고향의 집〉(자이니치코리안 어르신을 위한 데이케어센터) 행사에 가면 다양한 춤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갔다가, 행사 마지막에 아리랑이나 도라지 같은 민요가 흘러나오자 할머니들이 어깨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아름다운 공연을 본 적이 없었다”고.

 

그때부터 연출자와 함께 매주 〈고향의 집〉에 다니며 체조를 맡아 진행하며 인터뷰도 하고 친분도 쌓았다. 결과적으로 할머니들을 통해 그들이 어디에 살든 변하지 않을 문화로서 ‘제사’를 알게 됐다. 공연 전반부에는 실제로 제사를 지내는데, 하다가 모르는 걸 객석의 할머니들에게 물어보며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고향의 집〉에서처럼 함께 노래하고 춤을 췄다. 제목은 〈물드는 삶〉.

 

▲ 자이니치코리안 어르신들을 위한 주간보호센터 〈고향의 집〉을 방문하며 영감을 얻어 제작한 〈물드는 삶〉 공연. 전반부에 실제로 제사를 지내는데, 모르는 게 있으면 객석의 할머니들에게 물어보며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사진=이와모토 준페이(Iwamoto Junpei) 제공]


한 번은 신나가타에 사는 베트남분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공연을 기획하고 참여자를 모집했는데, 아무도 신청을 하지 않아서 또 매일 무작정 베트남식당으로 출근했다. 얼마간 다니다 보니 베트남분들이 노래방을 참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베트남분을 포함한 심사위원단을 꾸리고 상금도 내걸어 노래자랑대회를 열어 무대를 베트남 이주민들에게 내어줬다.

 

일본인, 재일조선·한국인, 베트남인 등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가족형태, 다양한 세대가 우리 마을에 함께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가족사진전〉을 기획해 전시하기도 했다.

 

작년에 대규모 국제행사인 오사카만국박람회로 나라가 들썩할 때, 고베에서 ‘이오고베 만국박람회’를 열기도 했다. ‘이오고베’는 예전 조선학교 건물에서 운영되는 자이니치코리안 데이케어센터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가는 행사여도 어르신들이 가기는 쉽지 않은 데다, 고베, 신나가카에는 이미 여러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는 데 착안한 기획이었다.

 

“신나가타 지역의 역사 안에서 일본의 한국, 베트남에 대한 가해성을 뼈저리게 느껴. 일본인 예술가와 작업을 위해 자이니치코리안 분을 찾아갔을 때, ‘우리 문화를 빼앗아 갈 때는 언제고 뭘 새로 만들겠다고 하는 거냐’는 일갈을 들은 적도 있어. 아이치트리엔날레 평화의 소녀상 검열 사건(2019년 나고야시에서 열린 국제예술제에서 평화의 소녀상 전시를 중단한 사건으로, 우익세력에 의한 전후 최대의 예술검열 사건으로 꼽힌다) 때, 고베코리아교육문화센터에 혐오세력들의 전화가 쇄도했었고…. 그것들과 어떻게 마주할까, 여기에서 나는 뭘 하고 있나, 뭘 해야 하나, 라는 질문을 받는 느낌이야.”

 

▲ 후미가 기획한 〈물드는 삶〉 공연 모습. [사진=이와모토 준페이(Iwamoto Junpei) 제공]


예술 바깥의 예술

 

“‘예술’ 작품 만드는 게 더이상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건, 굉장히 가깝게 오랫동안 같이 작업했던 안무가가 돌아가신 게 계기였어. 그분의 작업을 국제무대에도 소개했고, 댄스 유학 프로그램도 지역에서 자리를 잡으니 무용이라는 틀 안에서 하고 싶은 건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할까. 마침 결혼해 출산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현실의 삶은 이렇게 무거운데, 비교적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공연과 삶의 차이를 느낀 것 같아.

 

반면에 밖으로 나가면 새로운 것을 계속 만나게 되더라고. 저 사람들과 잘 만나려면 어떤 방식이나 형식이 더 좋을까를 고민하다 보니 연극, 무용 같은 틀도 상관없게 됐고.

 

2017년에 지주막하 출혈로 생사의 기로에 섰다가 살아나니 내 안의 감정이 다른 것으로 교체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 말로 잘 설명은 안되지만, 감정이 좀 옅어졌다고 할 수 있으려나. 그래서 극장 안 공연을 봐도 별 감흥을 느끼지 않는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달라진 스스로가 싫지 않아.”

 

호기심, 알고 싶은 사람, 만나보고 싶은 것이 사라지면 기획이라는 행위 역시 사라진다. 하지만 그 대상은 어느날 불현듯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삶의 연속선상에서 어느날 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 기획을 하면서 배웠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의 삶을 어떻게 꾸릴지라고.

 

그런데 예정대로 되는 일 따윈 없이, 후미는 오히려 극장의 대표가 되어버렸다. 극장 밖을 바라보는 대표가 있는 극장은, 혹은 그런 극장을 품은 신나가타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현재로선 극장 안 공연을 위한 구체적인 기획은 없지만, 그래도 극장이라는 공간을 통해 일상 안에서 다른 시간을 만들어내는 기획을 해나갈 생각이야.

 

극장에 리소그래피 기계가 있거든. 일단 그걸로 진(zine, 독립잡지) 만들기 프로젝트를 해보려고 해. 일본 사회의 우경화가 심각한데, 이렇게 가다간 아이치트리엔날레 때 같은 예술검열은 물론이거니와 아이들이 징병제의 대상이 되지 않을지, 외국 국적인 남편, 양쪽 루트를 가진 아이와 살다 보니, 일본의 극심한 배외주의도 걱정스럽고. 자기 매체를 가진 사람을 늘리는 것이 지금 시대에 필요할 것 같아. 저항할 수 있는 힘, 자기 생각을 언어화하는 토양을 만드는 게 일과 개인생활 양쪽에서 모두 절실해.”

 

간만에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가슴이 뛴다. 최근 몇 년 간 나의 일본 출장이 신나가타로만 향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 문화예술기획자이자 ‘댄스박스’ 공동대표 요코보리 후미(横堀ふみ). 극장 안의 기준과 극장 밖의 환경, 연극이나 무용과 같은 장르의 경계, 그리고 공연과 현실 삶의 차이를 고민하는 후미의 이야기는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인터뷰이 제공 사진)


올해 봄, 그녀와 함께한 작업이 한국 관객을 만난다

 

“극장에서 하던 노력을 극장 밖에서 하는 걸지도 몰라. 극장에서도 근대, 서양에서 온 구조, 기준을 그대로 수용하기는 싫었거든. ‘니들이 좋다고 하는 거 그대로는 안 해!’ 그런 거? 그 방식을 기준점 삼아 극장 바깥이라는 환경에서 기준 자체를 조금씩 다시 바꾸어 가는 게 아닐까?”

 

올해로 오십을 꽉 채웠고, 그 중 절반 정도를 극장과 예술 안에서 살았던 우리가 그 바깥으로 나갔을 때 우리의 경험과 그간의 시간은 어떤 소용이 있을까를 물어보자 후미가 들려준 말이다.

 

문득 내가 해온 일, 시간이 벽에 부딪혔다고 느낄 때, 나의 가장 큰 절망 포인트는 ‘돈은 물론, (기획하는) 스킬도, (함께 할) 사람도, 남은 게 없다’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후미 말대로 여전히 하나 남은 게 있었다. 기준과 정의 자체를 바꿔버리려고 하는 반골기질.

 

이번 봄, 후미와 내가 함께 크레딧에 오른 작업이 드디어 관객을 만난다. 서울에서 한국무용을 공부하고 독일로 이주해 파독간호사들의 한국무용을 쫓아온 안무가 임지애와, 북한과 일본에서 조선무용을 배운 자이니치코리안 안무가 조혜미가 5년간 교류하며 ‘전통’이라는 것이 어떻게 변화하고 변용해 나가는지, 그 ‘전통’의 조건은 무엇인지를 탐구한 작업이다.

후미와 나는 이 둘의 소개팅 주선자 정도의 역할을 했다. 오랜만에 서울에 오는 후미와 함께 ‘자연발생적 커뮤니티 댄스의 장’ 콜라텍을 꼭 찾을 생각이다.

 

[필자 소개] 고주영. 몇몇 예술축제와 지원기관을 거쳐 2012년부터 공연예술 독립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안산순례길 프로젝트](2015~2019), [플랜Q 프로젝트](2018~2023), [연극연습 프로젝트](2018~현재)를 기획·제작했고, 하고 있다. 연극과 연극 아닌 것, 극장과 극장 아닌 것, 예술과 예술 아닌 것 사이에 있고자 한다. 2007년부터 〈일다〉에 일본 제휴 매체인 〈페민〉 기사를 번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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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명 2026/02/07 [05:40] 수정 | 삭제
  • 후미님과 소울 메이트이신것 같아요. 올봄 서울 두분의 기획공연 꼭 가보고 싶습니다. 일정 나오면 글 올려주세요. 호기심과 설레임이 드네요 .^.^
  • 독자 2026/01/30 [19:36] 수정 | 삭제
  • 인터뷰 재밌게 읽었어요. 기사 읽는데 시간의 흐름과 장소의 이동이 느껴지는 게 신기하네요.
  • 파란 2026/01/29 [17:27] 수정 | 삭제
  • 수상인형극 보고 싶네요. 우리 동네도 베트남 분들이 많이 살고 계신다고 상인분들이 그러시더라구요. 극장이 이주를 한다는 얘기도 넘 인상깊네요. 예술이 삶과 가까이에 있으면 좋겠습니다.
  • 시스터 2026/01/25 [12:48] 수정 | 삭제
  • 자연발생적 커뮤니티 댄스의 장. ㅋㅋㅋ 어렸을 때 무알콜 원조 콜라텍에서 놀았던 시절이 떠올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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