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삼인칭 죽음이 건드리다

[죽음을, 삶을, 아니 죽음과 삶을] 타인의 죽음

김영옥 | 기사입력 2026/02/23 [13:54]

익명의 삼인칭 죽음이 건드리다

[죽음을, 삶을, 아니 죽음과 삶을] 타인의 죽음

김영옥 | 입력 : 2026/02/23 [13:54]

내 노트북에는 쓰다 만 글을 모아두는 분류 폴더가 있다. 주로 죽음과 연관된 것이다. 굳이 형식을 따지자면 에세이이고 소설이고 단상이지만, 그저 문장과 단어의 덩어리라고 말하는 게 나을 것이다. 이 덩어리들은 인큐베이터처럼 폴더에 머물고, 나는 이들을 삭제하지 않은 채 어떤 이어짐을 기다린다. 앞으로도 삭제하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건드려진 더듬이의 어떤 떨림들이 남긴 흔적으로서, 내겐 포기할 수 없는 기억이고 증언인 까닭이다.

 

때때로 나는 그 문장들을 새로 프린트해서 읽어본다. 글을 완성하겠다는 욕망보다는, 무뎌지는 통각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일 것이다. 타자의 죽음이 눈을 크게 뜨고, 혹은 눈을 감은 채 나를 부르는 장면들이 거기 있다. 실제로 목격했고, 누군가의 매개로 보고 듣고 읽었던 존재 중단의 장면들이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과 관련해 한 장면을 불러내 본다.

 

“청소를 하고 나서 거의 일주일 동안 몹시 괴로웠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잠을 잘 수도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어요. 그때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시신 부패 냄새와 … 피가 엉켜있던 옷가지와 이불들 … 마침 제가 생리 중이어서 제 몸에서 나는 냄새와 그 방에서 맡은 죽음의 냄새가 구분이 안 되면서 삶과 죽음의 그 섞여 듦에 대해 견디기 힘든 …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괴롭고 묘한 느낌이었어요. 이런 게 도시 생활인가, 이런 죽음이 도처에 널려있는 게 도시인가 … 충격을 받았죠.”

 

독거노인과 그의 시신을 돌보고 장례를 치러주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을 들려준 이는 그중 한 사람, 누구나 함께 살다가 함께 늙고, 죽을 때도 그 사람들 사이에서 죽는 곳에서 나고 자란 청년 여성이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로 이주해, 여기저기서 보게 되는 방치된 삶과 죽음은 그의 하루하루를 생존의 분투로 만들었다. 그의 놀란 심장은 어두운 침묵의 심연에서 여전히 쿵쿵 낮게 울리고, 그의 충격에 감염된 내 심장 역시 불안하게 동요한다.

 

곳곳에 죽음이 있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자연의 일, 그러니까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럽지 않은 건 ‘이런’ 죽음이다. 죽음 이전에도 이후에도 사람들 밖으로 밀려나, 삶의 의미도 죽음의 비(非)-의미도 확정받지 못한 누군가의 죽음 말이다.

 

▲ 존재했음을 확정하는 메시지인 죽음. 그러나 ‘나의’ 죽음을 정작 나는 경험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소중한 타자를 잃을 때, 그 죽음은 내게 비교 불가능한 비극으로서, 나는 이를 통해 불완전하게나마 죽음을 대면할 수 있다. (Image by HeungSoon from Pixabay)


죽음, 살았음을 확정하는 메시지

 

죽음은 삶의 필연이지만, 삶의 대부분 시간을 죽음과 무관하게 사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다. 아니, 자연스럽다. 그러나 죽음이 동행하고 있다고 느끼며 사는 것도, 마찬가지로 자연스럽다. 둘 다 자연에 내재하는 속성이다. 영혼을 잠식하는 죽음 불안증, 죽음 집착만 아니라면 괜찮다. 자살하는 사람이 적지 않고, 또 계속 늘어나는 상황이라고 해도, 죽음은 상상에서조차도 먼 무엇이다. 죽음을 상상한다고 할 때 그 상상 역시 삶의 변형태일 뿐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삶을, 또는 죽음과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각각 따로 떼어내 이해할 수 있나. 아니면 둘은 서로를 존재케 하는 상호 마주 봄이나 얽힘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나.

 

스피노자(네덜란드 철학자 1632∼1677)는 명석 판명한 이성에 따라 사는 자유인일수록 죽음을 덜 생각한다고 말하고, 하이데거(독일 철학자 1889~1976)는 죽음(이라는 끝)을 향한 존재로서 살아내는 삶의 치열함을 말한다. 반면에 생명을 낳고 기르며 돌보는 일을 세상사의 토대요, 핵심이라고 보는 에코페미니스트는 탄생(이라는 첫 순간)에서 출발하고 펼쳐지는 삶을 강조한다.

 

그리고 장켈레비치(프랑스 철학자 1903∼1985)에 따르면, 죽음이라는 사건은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 즉 비-의미(non-sense)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일어난 죽음 사건은, 그가 이 세상에 ‘살았음’을, 결코 침해할 수 없는 영속적이고 공고한 사실로 영원히 확정함으로써 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를 두고 벤야민(독일 철학자 1892~1940)은, 죽음은 이야기꾼이 보고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의 인준이라고 말했다. 죽음이야말로 존재의 유일한 ‘문제’인 거다. 그러니 죽음을 생각하려 하지 말고, 죽음을 ‘문제화’하라고 장켈레비치는 권한다. 『죽음』이라는 방대한 저서는 그가 시도한 ‘죽음의 문제화’의 결과다.

 

이인칭 죽음

 

존재했음을 확정하는 메시지인 죽음. 그러나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이 메시지는 나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 수신된다. 나에게 귀속하는 ‘나의’ 죽음을 정작 나는 경험하지 못한다. 일인칭 죽음의 사유 불가능성이다.

 

사랑하는 소중한 타자를 잃을 때, 그 죽음은 내게 비교 불가능한 비극으로서, 나는 이를 통해 불완전하게나마 죽음의 신비를 대면할 수 있다. 이인칭 죽음이야말로 유일하게 주어진 (나 아닌) 나의 죽음 경험인 셈이다. 나의 죽음은 아니지만, 나의 죽음과 가장 유사한,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가 존재했음을 인준하는 죽음이 그 인준의 구체적 내용을 내게 양도함으로써, 그의 죽음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과정은 나를 윤리적 회심(Umkehr)으로 이끌기도 한다. 장례지도사들은 말한다. 장례식은 오로지 살아있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죽은 이는 말이 없으며,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또 이렇게 말한다. 죽은 이는 많은 말을 남기고 있다고. 두 발언은 서로 배치하지 않는다. 전자는 일인칭 죽음의 사유‧경험 불가능성을 가리키고, 후자는 이인칭 죽음의 목격을 가리킨다. 죽은 이가 남기는 말은 그의 살아온 삶의 내력이고, 이를 통해 살아있는 이들은 일정한 윤리적 목격자와 해석자, 해석이 가리키는 특정 역할과 책임을 부여받게 된다.

 

익명의 삼인칭 죽음 속에서, 누군가의 ‘살았음’에 책임지는 삶의 역량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숫자와 통계에 불과한 삼인칭 죽음에 둘러싸여 산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인구 통계학적이고 의학적인 현상으로서의 죽음. 위에서 소개한 고독사 장면에서처럼, 삼인칭 죽음의 극한 형태인 ‘이런 죽음’이 곳곳에 널려있는 삶의 환경 속에서 우리가 끝내 얻지 못하는 건, 바로 자기 자신의 죽음에 관한 문제의식이다. 그리고 이 문제의식이 없이는 내 삶의 고유한 의미도 사라진다.

 

존재했음을 인준하는 메시지로서 죽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나의 삶도 너의 삶도 소중한 것, 경이롭고 신비로운 것으로 변용된다. 죽음을 문제화한다는 건 삼인칭 죽음 속에서 이인칭 죽음의 계기와 감각을 발견하고, 이로써 누군가의 ‘살았음’에 책임지는, 즉 응답하는 삶의 역량을 늘리는 것, 회복하는 걸 의미하는 것이리라.

 

살았음이 ‘자연스럽게’ 전수될 때, 우리는 삼인칭 죽음의 폭력적 익명성을 벗고 이인칭 죽음의 유일하고 진실한 의미를 만나게 된다.

 

▲ 영화 〈시〉(이창동 감독, 2010)에서 ‘시’를 쓰고자 사물들 ‘보기’를 학습하던 양미자(윤정희 분)는 땅에 떨어진 살구를 보고, 집단 성폭력으로 죽은 소녀의 죽음에서 사랑하는 이의 상실을 ‘보게’ 된다.


영화 〈시〉(이창동 감독, 2010)에서 ‘시’를 쓰고자 사물들 ‘보기’를 학습하던 양미자(윤정희 분)는 땅에 떨어진 살구를 보고, 집단 성폭력으로 죽은 소녀의 죽음에서 사랑하는 이의 상실을 ‘보게’ 된다. 자기 손자가 가담한 이 소녀의 죽음을 더 이상 삼인칭 죽음이 아니라 이인칭 죽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마 황제, 철학자 121~180)는 “그러니 이 아주 짧은 시간을 자연에 따라 걸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인생 여정을 마치는 것이 좋다. 마치 잘 익은 올리브 열매가 자신을 낳은 땅을 찬양하고 자신을 성장시켜 준 나무에 감사를 드리며 떨어지는 것처럼”이라고 쓰고 있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들』, 김재홍 옮김, 그린비, 4권 48)

 

▲ “그러니 이 아주 짧은 시간을 자연에 따라 걸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인생 여정을 마치는 것이 좋다. 마치 잘 익은 올리브 열매가 자신을 낳은 땅을 찬양하고 자신을 성장시켜 준 나무에 감사를 드리며 떨어지는 것처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Image by Julie-Kolibrie from Pixabay)


영화 〈시〉의 양미자가 만난 살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전하는 올리브 열매는 단지 비유로 등장하는 사물이 아니다. 아우렐리우스는 책의 다른 장에서 “우주는 변화고, 인생은 믿음이다”(4권 4)라고도 말한다. 믿음이 인간의 생에만 해당하는 것인가. 살구와 올리브 열매와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모두 소멸과 상실 속에서 그러나 더 큰 우주적 생명 순환의 흐름에 가담한다. 썩으며 신비로워지는 삶의 빛을 나누는 감수자(甘受者)들이다. 이들은 서로에게 이인칭 죽음의 목격자, 곁이 되어줌으로 산다,

 

우리의 세계는 과연 누군가를 올리브처럼 떠나게 할 만큼 충분히 정의로운가? 질문하며 산다.

 

[필자 소개] 김영옥. 페미니스트 여성으로 늙어가고 있다. 교차성의 관점에서 노년기 말년성에 대해 질문하고 감각하고 쓰고 지우고 또 다시 쓰고 있다. ‘죽음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사유는 무엇을 하는가’에 관심이 있다. 이번 연재에서 죽음에 대한 사유는 명사적 죽음의 보편성과 동사적 죽음경험의 특이성을 교차적으로 탐색하면서 삶의 여러 국면을 고유한 문장으로 새롭게 낯설게 만나게 하리라 기대한다.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2023)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2021) 단독 저서와 『돌봄의 얼굴』(2024) 『돌봄의 상상력』(2024) 『돌봄과 인권』(2022)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2020) 등 다수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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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2026/03/11 [14:32] 수정 | 삭제
  • 시 영화를 봤었는데 살구 장면이 기억이 안 나네요. 매우 중요한 장면이었을 것 같은데 영화내용이 충격적으로 다가와서 디테일을 놓쳤나봐요.
  • 2026/03/04 [16:24] 수정 | 삭제
  • 연재 기대되네요. 이인칭 죽음을 겪으며 죽음에 대해 사유하고 있습니다.
  • 오즈 2026/02/28 [13:45] 수정 | 삭제
  • 나와 타인의 죽음에 대한 사유가 참 와닿고 좋네요. 가슴 찢어지는 이인칭 죽음을 겪은 뒤에야 저도 삼인칭 죽음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생의 존중은 죽음의 존중이기도 한 것 같아요.
  • 보리 2026/02/26 [16:31] 수정 | 삭제
  • 시 다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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