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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임장 현장을 처음 찾아간 것은 인류학자로서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2021년 집값 폭등기 이후 ‘임장’이라는 말이 뉴스와 유튜브, 예능 프로그램을 가리지 않고 넘쳐나기 시작했다. 부동산은 주식과 달리 물리적 실체가 있다. 관심 있는 부동산의 입지에 직접 찾아가 눈으로 확인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 그것이 임장이다. 발로 뛰는 투자 공부라 해도 좋다. 이 용어가 대중 담론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부동산 투자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이들도 이 말을 안다. 무언가가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임장 현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그것이 궁금했다.
계급 재생산 수단으로서의 아파트와 ‘유능한 엄마’… 밀레니얼 세대 여성들은 다를 줄 알았다
나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한국의 도시주거 문제를 연구해왔다.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와 토건주의적 도시개발이 맞물리면서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섰다. 어떤 동네, 어떤 아파트에 사는가는 곧 가족의 계급적 위치를 가시화하는 문제였고, 그 선택의 책임은 암묵적으로 여성에게 귀속되었다. ‘좋은’ 아파트는 유능한 엄마라는 증거였고, 여성의 자본주의적 생산성을 입증하는 지표였으며, 남성 가장의 평범한 소득을 자산으로 불려주는 도구이기도 했다.
자산으로서의 아파트, 삶의 무대로서의 아파트, 계급 재생산 수단으로서의 아파트가 한 몸으로 붙어 있는 구조 속에서, 여성들의 부동산 실천은 투기적 욕망의 발현인 동시에 빠듯한 조건 속에서 가족의 미래를 직조하는 살림의 논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번듯하고 안정적인 내 집을 갖고도 다 큰 자식에게 물려줄 얼마를 위해 끊임없이 갈아타기를 시도하며 더 많은 이익을 좇아야 한다는 강박, 그것은 이 실천의 도덕적 정당성과 구조적 모순을 동시에 드러낸다.
누군가의 엄마나 부인으로 살기보다 자신의 커리어를 삶의 중심에 두고자 하는 여성들, 가부장적 이성애 결혼을 유예하거나 거부하는 여성들, 심지어 4B(비혼, 비연애, 비출산, 비섹스)를 선언하는 여성들이 그들이다. 이들에게는 물려줄 자식도, 어떻게든 지켜야 할 ‘정상가족’의 울타리도 크게 의미 있지 않다. 그렇다면 비싼 아파트에 삶을 걸어야 할 이유 또한 달라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오였다.
부동산 ‘임장’ 현장에서 만난 청년 여성들
페미니즘 리부트를 통과하며 성인이 된 밀레니얼 세대 여성들은 실제로 어떤 선택지를 앞에 두고 무엇을 고민하고 있을까. 지난해 커뮤니티 기반 임장을 10여 차례 참여관찰하면서 그 답의 실마리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매번 참여자의 절반 이상은 젊은 여성이었다. 20대 초반부터 30대 중후반까지, 대부분 직장인으로 보이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퇴근 후 저녁 시간을 쪼개거나 주말의 반나절을 반납하며 임장에 나왔다. 임장 활동은 몇 시간 안에 상당한 거리를 이동하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하므로 체력과 부동산에 대한 높은 호기심, 그리고 관찰력이 요구된다. 임장이 시작되면 핸드폰에 보고 들은 내용을 빠르게 메모하고, 사진을 찍어가며 관심 지역을 조사한다. 참여자들이 궁극적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다. “과연 이 지역이, 이 동네가, 이 아파트가 얼마나 높은 가치를 갖는가.”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종합적인 정보와 계산이 필요하다. 어떤 직장을 가진 이들이 이 동네에 거주하는가, 상권과 학원가는 안정적으로 형성되어 있는가, 사람들의 옷차림과 표정, 오가는 이들의 연령대는 어떠한가, 이 지역의 과거는 어떠했으며 향후 5년, 10년 뒤에 무엇이 예측 가능한가, 심지어 주차장의 공간 여유, 분리수거장의 관리 상태, 생활체육 시설이나 소음 수준까지도.
숫자로 환산되는 가격 정보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들이 현장에서 끊임없이 눈에 들어오기에, 상당한 집중력과 시간, 그리고 일종의 감각적 해석 능력이 요구된다. 참여자들은 서로의 관찰 내용을 교환하며 소위 ‘좋은 동네’의 징후를 학습하고, 때로는 기존의 기대를 수정하기도 했다. 이렇게 임장은 단순한 매물 탐색을 넘어, 미래의 가능성을 둘러싼 집단적 해석의 장이자 서로의 판단을 조율하는 일종의 현장 세미나처럼 작동한다.
몇 차례의 참여관찰을 거치며 나는 이 활동이 투자 기회를 찾는 실용적 행위를 넘어서, 불확실한 자산경제 속에서 청년 세대가 간신히 낙관의 감각과 언어를 구성하는 과정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부동산은 다른 투자와 달리 꽤 높은 수준의 종잣돈이 필요하다. 특히 수도권 주택가격은 이미 평범한 이들의 임금 수준과는 무관한 시세를 형성한 지 오래다. 내 이름으로 된 소규모 아파트 한 채를 갖기 위해 상당한 종잣돈은 물론, 주택담보대출이 가능한 안정적 소득과 직위, 장기적으로 대출금을 상환할 수 있는 보장된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그 접근성은 동등하게 주어질 수 없다. 임장 현장에 모인 이들이 모두 같은 출발선에 서 있을 리 없다.
먼저 짚어야 할 것은, 이미 많은 통계가 증명하듯 한국의 노동시장이 매우 깊이 성별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2025년 여성가족부 발표에 따르면 성별 임금 현황을 공시한 2,980개 기업 분석 결과, 남성 1인당 평균 임금은 9,780만 원, 여성 1인당 평균 임금은 6,773만 원으로 성별 임금격차는 전년 대비 4.4% 증가한 30.7%에 달했다. 제조업, 정보통신업, 금융 및 보험업 등 종사자가 많은 산업에서 격차는 더 확대되었다.
여성은 비정규직 비율이 남성보다 현저히 높으며, 동일한 직종과 직급에서도 임금 격차는 완강하게 유지된다. 이 이중구조의 노동시장에서 여성들은 종종 핵심부가 아닌 주변부에 배치된다. 안정적인 정규직에서의 꾸준한 소득 상승, 삶의 질 유지, 주택담보대출 심사가 요구하는 신뢰 가능한 소득 이력 등 모든 것이 많은 여성에게 처음부터 기울어진 조건으로 주어진다. 어렵게 진입한 전문직 내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2022년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남성 의사의 연평균 보수는 2억4,825만 원인데 비해 여성 의사는 1억7,287만 원으로, 남성 대비 약 69.6%에 그친다.
이 지점에서 오랫동안 우리를 붙들어온 질문이 소환된다. 100여 년 전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에게 글을 쓸 자유가 있으려면 일 년에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울프는 자신이 원하는 지적 자유가 물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뼈아프게 받아들이면서, 여성이 자유롭게 자기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울프의 말은 지금도 진실이다. 오늘의 도시공간에서 내 이름으로 된 아파트를 갖는다는 것은 울프가 의미한 그 ‘방’의 현대적 번역쯤이 될 것이다. 누군가의 호의에 의존하지 않고 내 집에 언제까지고 머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소유가 아니라 존재론적 안전이다. 내 집이 있다는 사실은 내가 원하지 않는 많은 것들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때로는 해방시키는 일차적 물적 기반이다.
경제적 종속은 삶의 종속으로 이어지기에, 내가 원하는 삶을 내 방식대로 살고자 하는 여성에게 경제적 자립은 곧 생존의 언어다. 여기서 경제적 자립이란 언제고 빼서 쓸 수 있는 통장 잔고의 문제만이 아니라, 삶을 원하는 방식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선택의 구조와 동일시된다. 재테크 담론이 자주 호출하는 ‘경제적 자유’를 갖게 된다면 우리는 성차별적인 직장과 갑질하는 상사를 감내하지 않아도, 으스대는 집주인의 비위를 맞추지 않아도, 원치 않는 관계를 무력하게 유지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경제적 지원 아래 자신의 욕망을 접어두지 않아도 된다. 이 모든 것이 ‘경제적 자유’를 전제로 한다는 인식은 페미니스트 자아에 매우 깊이 작동한다.
따라서 주거 불안을 해결하고 차익까지 기대할 수 있는 부동산 투자에의 몰입은, 젠더불평등한 구조의 고통을 마주하고 어렵게 이뤄낸 페미니스트 각성의 결과일 수 있다.
능력주의적 평등이 지워버리는 ‘구조적 불평등’
그러나 복잡한 질문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갖고 진실을 말할 수 있었던 그 힘은 숙모가 남긴 상속금에서 비롯되었다. 경제적 자립을 통한 해방을 역설한 여성이 정작 노동만으로는 그것을 실현할 수 없었기에, 상속받은 돈을 발판 삼아 그 글을 썼다는 아이러니는 개인사의 모순으로만 보기 어렵다. 그것은 ‘경제적 자유’가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며 오늘의 맥락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울프 스스로 인정했듯 물질적 기반은 자기 사유를 가능하게 한 조건이었지만,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이미 주어진 출발선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처음부터 당겨지지 않는 것이다.
불합리한 이중노동시장에서 운 좋게 안착한 이들, 즉 안정적 정규직이나 고소득 전문직을 가진 이들 혹은 부모의 증여나 가족의 자산을 담보로 대출이 가능한 이들은 페미니스트의 이름으로 ‘경제적 자유’를 선언하기가 조금 더 수월할 수 있다. 꾸준히 쌓인 소득 이력과 대출 심사를 통과할 수 있는 신용 조건이 부동산 시장 진입의 전제라면, 이중노동시장의 주변부에 배치되어 온 여성들에게 그 전제는 처음부터 동등한 무게로 주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경제적 자유’란 부지런히 발품을 팔고 유튜브 강의를 들으며 조금씩 좁혀갈 수 있는 목표이지만, 누군가에게 그것은 출발선 자체가 다른 곳에 그어진 불평등한 게임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이 지점을 정면으로 응시한 바 있다. 프레이저에 따르면, 페미니즘이 오랫동안 싸워 온 가부장적 구조에 대한 비판이 어느 순간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방향과 위험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국제사회학회 저널 Global Dialogue와의 인터뷰, ‘신자유주의 시대의 페미니즘’, 2018)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시장에서 경쟁하고 능력만큼 가져가야 한다는 것은 페미니즘이 추구해 온 중요한 목표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능력주의적 평등으로 환원되는 순간, 구조적 불평등은 개인의 노력 부족이나 각성의 지연으로 손쉽게 치환된다.
아파트를 매수하고 월세까지 받는 다주택자로 거듭나면서 투기적 자본주의 안에서 간신히 자기 통로를 확보한 여성은 가부장 세계에서 일정한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통로는 누군가의 주거비 위에 놓여있다. 누군가는 계속해서 월세를 전전하며 삶의 불안정을 떠안는다. 프레이저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리천장을 깨고 구조를 빠져나가는 소수의 여성이 있는 동안, 대다수 여성은 지하실에서 그 깨진 유리의 파편을 치워야 한다.
이것이 부동산 장에서 더욱 첨예한 의미를 갖는 까닭은 대도시의 ‘좋은 주소’가 입혀진 주택은 많은 사람이 원하지만 지극히 희소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주식이나 화폐처럼 필요에 따라 찍어낼 수 없는 집은, 인간의 거처인 동시에 자산경제의 핵심 상품이라는 이중성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자산시장에서의 성공이 페미니스트 각성의 결실처럼 읽힐 때, 우리는 그 가능성이 얼마나 구조적으로 차등 배분되어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얻은 ‘좋은 주소’가 누군가의 주거비 상승을 기반할 때
36살 대기업 직원인 지나(가명)의 이야기는 이 복잡함을 잘 보여준다. 스스로를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소개한 지나는 일 년에 한두 번은 해외여행을 다니고 스쿠버다이빙 같은 취미도 적극적으로 즐기는 사람이었다. 2021년 집값 폭등기, 자신과 비슷하다고 여겼던 동료들이 주택 소유 여부에 따라 전혀 다른 생애 전망을 갖게 되는 것을 목격하며 충격을 받았고, 그때부터 부동산 공부를 시작했다.
직장에서 일한 만큼 월급을 받듯,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 공부에 쏟으면 수익을 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생각보다 빠르게 현실이 되었다. 3년 사이에 갭투자로 두 채의 아파트를 마련한 것이다. 결혼도 출산도 양육도 원하지 않는 지나에게 이 자산은 미래를 낙관하게 하는 토대이자, 안정적인 직장에서의 커리어보다 더 큰 무게를 갖는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지금도 주말이면 임장을 다니며 다음 투자를 기획한다.
여성 싱글로서 미래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불안이 이제는 사라졌다는 그녀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 있게 들렸다. 지나가 부동산 투자를 통해 쟁취한 것은 단순한 자산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도권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노동시장과 불충분한 사회복지 체제 속에서 돈이 스스로 일하게 하는 전략은 나름의 합리성을 갖는다. 투자자로 자신을 단련하며 남들이 탐내는 부동산을 손에 넣는 일은, 어쩌면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인정받을 만한 성취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게임에서 누군가가 쟁취한 주도권이 그만큼의 실질적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주거비가 상승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상승의 압력이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닿는 이들이 누구인가를 떠올리면, 그녀의 해방이 구조적으로 더 취약한 다른 누군가의 부정의한 조건 위에 일정 부분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기 어렵다.
여성이기에 더 절박하게 주거 안정을 확보하고 안전한 자산을 형성하고자 하는 욕망은 여전히 정당하다. 가부장적 구조와 여성에게 불리한 노동시장이 누적해 온 구조적 불이익을 감안할 때, 여성이 자산시장에서 주도적 행위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오랜 배제에 대한 전략적 응답인 동시에, 자기 삶을 스스로 설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 욕망을 단순히 투기적 탐욕으로 환원하거나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것은 구조가 개인에게 부과한 조건을 지워버리는 일이다.
그러나 욕망의 정당성이 그것이 실현되는 방식과 만들어내는 관계에 대한 질문을 면제하지는 않는다. 나의 주거안정과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면서도, 투기적 자산 축적의 구조와 맺는 공모적 관계를 직시하고 그것을 최소화하는 길은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이것은 개인 선택의 문제이기 이전에, ‘페미니즘이 자산경제와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하는 공동의 질문이다.
페미니즘은 자산경제와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페미니즘은 단일한 해방의 서사를 약속하지 않는다. 누구의 해방이 어떤 조건 위에서만 가능한지, 그 자유가 또 다른 배제나 불평등을 강화하지는 않는지 끊임없이 묻고 되물으며 갱신하는 정치적 실천에 가깝다.
지금 한국의 자산경제 앞에 선 젊은 여성들의 현실 역시 이 긴장의 지형 위에 놓여있다. 자산을 통해 독립을 확보하고자 하는 선택은 지극히 합리적이며 영리한 생존 전략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부동산 시장의 우상향에 대한 기대와 경쟁을 부추기고, 타인의 주거불안을 전제로 한 이익구조에 편입될 때, 우리는 자유와 안전이라는 언어가 어떻게 계급적 경계를 다시 긋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경제적 자유’라는 언어가 주는 해방감과 그 협소함을 함께 질문해야 한다. 지금 통용되는 ‘경제적 자유’란 대체로 자산소득을 통해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고, 원치 않는 관계나 조건에서 언제든 이탈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몹시 강렬하고 매혹적인 전망이다. 그러나 그 매혹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충분히 묻지 않는다면, 자유는 또 다른 규범이 되고 만다. 자산을 통해 불안을 관리하고 미래를 안정화하는 능력은 분명 중요한 힘이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유일한 안전장치로 상상될 때, 우리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서로의 의존 관계를 지워버린 채 각자도생의 논리를 내면화하게 된다.
‘경제적 자유’를 어떻게 사회적 관계 속에 다시 위치시킬 수 있을까. 소유와 축적의 속도를 조금 늦추더라도 서로의 삶을 지탱하는 다른 형태의 안전망을 상상하는 것, 개인의 탈출 가능성보다 함께 머물 수 있는 조건을 공정하게 확장하는 것, 이 지점에서 페미니즘이 할 수 있는 일은 욕망의 방향을 성찰적으로 한 번 흔들어보는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자유가 누군가는 그 가능성 바깥에 놓인 채로 성립하는 것인지, 그 불편한 질문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 그리고 우리 모두의 자기만의 방이 누군가의 불안을 전제로 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상상하는 것. 이것이 ‘페미니스트 각성은 자산경제를 넘어설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내가 놓지 않으려는 가능성이다.
[필자 소개] 최시현. 페미니스트 문화연구자.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이며 연세대학교와 덕성여자대학교에서 강의한다. 젠더와 계급의 관점에서 한국 사회의 가족과 도시공간을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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