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에 도착한 어느 이주 여성의 편지[죽음을, 삶을, 아니 죽음과 삶을] 후인 마이 씨를 기억하고 애도하며“당신과 저는 매우 슬픕니다.”
‘좀 더 나은 삶’을 찾아 한국으로 온 지 1개월 14일만에, 남편에게 ‘맞아 죽은’ 베트남 여성 후인 마이 씨가 살해당하기 하루 전날 남편에게 쓴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19세의 후인 마이 씨는 46세의 한국인 남성과 결혼해 2007년 5월 16일 한국에 도착했고 6월 26일 사망한다. 갈비뼈 18개가 부러졌고, 뇌사상태에 빠졌다. 시신은 8일만에 발견되었다.
그녀가 어느 지방 도시 반지하 단칸방에서 보낸 45일간의 한국 생활은 ‘유형지’의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반지하 단칸방이라는 척박한 물리적 환경 때문이 아니다. 낯선 나라에 온 신부를 배려하기는커녕 화만 내는 남편과, 전혀 가닿을 수 없는 언어 때문이다. 고립된 채 언어 감옥에서 고통받던 그는 편지를, 다섯 페이지나 되는 긴 편지를 모국어인 베트남어로 썼다. 남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가능한 한 다 담고자 하는 이 편지의 첫 문장이 ‘나’의 슬픔이 아닌 ‘당신과 나’의 슬픔을 말하고 있는 건 중요하다.
“당신은 아세요? 저는 당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당신은 왜 제가 한국말을 공부하러 못 가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저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대화하고 싶어요. 당신을 잘 시중들기 위하여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마시는지 알고 싶어요. 저는 당신이 일을 나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것을 먹었는지, 건강은 어떤지 또 잠은 잘 잤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제가 당신을 기뻐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도록, 당신이 저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기를 바랐지만, 당신은 오히려 제가 당신을 고민하게 만들었다고 하네요. 저는 한국에 와서 당신과 저의 따뜻하고 행복한 삶, 행복한 대화, 삶 속에 어려운 일들을 만났을 때에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을 희망해 왔지만, 당신은 사소한 일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화를 견딜 수 없어 하고, 그럴 때마다 이혼을 말하고, 당신처럼 행동하면 어느 누가 서로 편하게 속마음을 말할 수 있겠어요.”
후인 마이 씨는 편지에서 여러 번 “당신은 아세요?”라고 묻는다. 이해하고 싶고, 이해받고 싶은 마음의 절실함이 주도 동기처럼 반복된다. 그런데 이 질문의 ‘당신’은 누구일까. 편지가 수신인에게 도착하기 전에 편지를 쓴 사람이 바로 그 수신인에게 살해당한 이 사건에서 편지의 운명은 두 갈래로 나뉜다. 경로와 시간을 바꿔 다른 수신인에게 도달하거나, 영원히 수신인을 만나지 못하고 유령처럼 허공을 맴돌거나. 그런데 편지는 시신과 함께 발견되었고,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그렇게 편지는 ‘우리’에게 도달했고, “당신은 아세요?”라는 질문은 이제 ‘우리’를 향하고 있다.
“당신은 아세요? 제가 당신과 결혼하기 전에는 호찌민시에서 일을 했어요. 당신이 우리 집에 왔을 때 우리 집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저는 가정을 위해서 일을 나가야 했고, 그 일은 매우 힘들었어요. (...) 베트남에서 그렇게 많은 일을 했어도 입을 것과 먹을 것만 겨우 충당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제가 한국에 왔을 때에 더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고, 단지 당신이 저를 이해해 주는 것만을 바랬을 뿐이에요. 저도 일을 해봤기 때문에 일을 어떻게 하고 또 그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아요.“
19살이 되기까지 이미 힘겨운, 희망 없는 노동자의 삶을 다양하게 겪었던 그녀는 남편 역시 자신과 똑같이 희망 없는 고단한 하루하루를 사는 건설일용직 노동자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오히려 역설적으로 거기서 희망을 보려 했다. 이해가 도우리라, 비슷한 삶의 경험을 공유하는 게 서로의 지지대가 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후인 마이 씨의 편지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당신과 나는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어서 내가 한국에 왔을 때 대화를 할 사람이 당신뿐이었는데... 누가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겠어요. 정말로 하느님이 나에게 장난을 치는 것 같아요. 정말 더이상 무엇을 적을 것이 있고 말할 것이 있겠어요. 당신은 이 글씨 또한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할 것인데요.“
2008년 재판부의 판결문, 그리고 지금
후인 마이 씨 살해 사건을 다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미숙함과 야만성’에 부끄러움을 고백한다.
“노총각들의 결혼 대책으로 우리보다 경제적 여건이 높지 않을 수도 있는 타국 여성들을 마치 물건 수입하듯이 취급하고 있는 인성의 메마름. 언어 문제로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못한 남녀를 그저 한집에 같이 살게 하는 것으로 결혼의 모든 과제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무모함. 이러한 우리의 어리석음은 이 사건과 같은 비정한 파국의 씨앗을 필연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21세기 경제대국, 문명국의 허울 속에 갇혀 있는 우리 내면의 야만성을 가슴 아프게 고백해야 한다. 혼인은 사랑의 결실로 소중히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가치를 온전히 지켜낼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 [...] 19세 후인 마이의 편지는 오히려 더 어른스럽고 그래서 우리를 더욱 부끄럽게 한다. 이 사건이 피고인에 대한 징벌만으로 끝나서는 아니되리라는 소망을 해보는 것도 이러한 자기반성적 이유 때문이다.”(대전고법 2008. 1. 23. 선고 2007노425 판결)
2007년에 일어난 사건을 거의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기억해야 할 이유를 이 판결문은 비교적 명료하게 말하고 있다. 1990년 말부터 민간 차원에서 시작해, 2000년 초중반부터 지자체의 지원 정책으로 채택된 국제결혼은 최근까지도 결혼중개업체를 매개로, ‘결혼 이후’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추진되었다. (각 지방자치단체의 인권침해적 국제결혼 지원조례는 이주민/여성 단체들의 항의에 이어 국가인권위원회와 여성가족부의 권고로 2025년 상반기에 와서 대부분 폐지되었다.)
이주민과 생활세계에서 함께 산 경력이 20년이 넘어도 여전히 ‘잡종’ 같은 혐오 용어를 부끄럼 없이 사용하는 정치인이 있고,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에게 “그냥 야 아니면 베트남 아니면 월남, 이렇게 부르는” 사람이 있다.(한인정, 『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 44쪽) ‘다문화’는 여전히 당사자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국제결혼 가족의 고유명사로 쓰이고 있으며, 이주여성의 시민권 문제는 논외로 한 채 ‘한국의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라면 더이상 가능하지 않을 고부간 갈등과 화해의 서사를 재현하고 전시하는 〈다문화 고부열전〉 같은 프로그램이 버젓이 교육방송에서 방영된다.
한국에서 태어나 이제 스물여섯 살이 된 이주배경 청년 고예나는 자기보다 한국에 더 오래 산 엄마가 한국에는 자신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 놀라, ‘그렇다면 지금 살고 있는 한국 집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엄마는 “상처를 받은 공간”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에 책임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고 답한다. 그러나 딸의 생각은 다르다.
“사실은 이 일들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다. {그녀 엄마의} 이주 결혼의 뒤에는 한국 정부와 통일교가 있었다. 잉여 남성 및 노인 부양과 기피되는 지방의 일자리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나는 엄마가 한국에서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할머니가 엄마를 ‘한국인 며느리’처럼 대했더라면, 아빠가 엄마에게 더 살가웠더라면, 시골과 도시의 접근성이 더 좋았더라면, 사회가 가사 노동과 농사의 가치를 알아줬더라면, 결혼이주여성을 존중했더라면, 엄마는 상처받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고예나, 『우리는 언제나 타지에 있다』 93-94쪽)
증언: 사후에 도착한 후인 마이 씨의 편지
다시 후인 마이 씨의 죽음과 그녀가 남긴 편지로 돌아가 보자. 그녀는 죽었고, 그녀가 쓴 편지는 ‘살아남았다’. ‘사후적 증언’으로 (한국어로 번역되어) 이 편지는 도착했거나, 여전히 도착하지 못한 채 유령으로 떠돌고 있으며, 이 편지에 대해 우리는 수신인이거나 아니다. 우리가 수신인이라면 그녀(의 삶)보다 더 오래 살고 있는 이 편지는 우리에게 무엇을 증언하는 걸까.
“증언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의 입장에서 그러한 언어 속에 자신을 두는 것이라고, 살아있는 언어가 마치 죽은 언어라도 되는 양 또는 죽은 언어가 마치 살아있는 언어라도 되는 양 그러한 언어 속에 (...) 자신의 자리를 잡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조르조 아감벤,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237쪽)
‘아우슈비츠’의 증인과 증언을 언어화할 수 있는 윤리/학을 탐색하며 아감벤은 이렇게 말한다. 배제됨으로써 포함되는 ‘헐벗은 삶’은 특정 역사적 시기 혹은 특정 수용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구 곳곳으로부터 헐벗은 삶, 살만하지 않은 삶, 애도 받지 못하는 삶의 이야기가 (종종 사후에) 도착하지 않는가.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이제 아우슈비츠에 부여된 역사적 ‘고유성’에 대해서조차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읽는 후인 마이의 편지는 아감벤이 말한 저 증언의 형식을 곱씹게 만든다. 그녀는 자신의 고유한 언어도, 한국어도 ‘가지지 못한’ 채 한국에서 살만하지 않은 삶을 살았고, 이 삶이 폭력적으로 중단되었을 때, 그 빼앗긴, 가질 수 없었던 언어 속에 자신의 자리를 잡게 되었다.
“살아있는 언어가 마치 죽은 언어라도 되는 양 또는 죽은 언어가 마치 살아있는 언어라도 되는 양.” 그런 언어 속에 자리를 잡은 이 (죽은) 여성은 무엇을 증언하는 것일까? 모국어인 베트남어와 번역어인 한국어 사이에서 계속 흔들리며 자기 자리를 모색하는 후인 마이 씨는 지금도 “당신은 아세요?”라고 묻고 있다. “당신은 이 글씨 또한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할 것인데요.”라는 그녀의 슬픈 탄식과 절망은 그 이면의 인간 논리를 역설한다. 언어를 가지고 사는 당신들, 인간이라면 알고 이해해야 하지 않는가.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은 ‘부끄러움’에 대해 말하곤 한다. 결국 자살함으로써 생존의 불/가능성을 계속 질문하게 만든 프리모 레비는 여러 번 부끄러움의 주제로 되돌아간다. 그는 이미 죽음이 죽음이기 어렵고 살아있다고 해서 삶을 산다고 말하기 어려운 수용소의 수인들에게 부끄러움이 익숙했다고 말한다. ‘그와 같은 범죄가 존재하며, 그것이 결국 기존의 세계에 들어와 버렸다는 사실’ 앞에서 경험하는 부끄러움, 구체적이고 무거운 부끄러움.(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중 특히 3장 “수치”)
사후에 도착한 후인 마이 씨의 편지를 받아 들고, 지금도 멈추지 않는 억울한 죽음들 앞에서, 우리는 ‘부끄럽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결국 들어와 버렸다는 것. 내가 ‘나’로 생각하고 말하고 이해하는 인간으로 산다고 믿고 있는 이곳에 들어와 버렸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린다고 고백해야 한다. 그 고백 속에서 수신인은 증인으로의 변신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정치로 추진된 국제결혼이 이방인 여성들을 계속 죽게 내버려둔다면, 살만하지 않은 삶을 강요한다면,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그저 살아남음’만을 허용한다면, 그에 대해 알아야 하고, 증인이 되어야 한다.
[필자 소개] 김영옥. 페미니스트 여성으로 늙어가고 있다. 교차성의 관점에서 노년기 말년성에 대해 질문하고 감각하고 쓰고 지우고 또 다시 쓰고 있다. ‘죽음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사유는 무엇을 하는가’에 관심이 있다. 이번 연재에서 죽음에 대한 사유는 명사적 죽음의 보편성과 동사적 죽음 경험의 특이성을 교차적으로 탐색하면서, 삶의 여러 국면을 고유한 문장으로 새롭게 낯설게 만나게 하리라 기대한다.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단독 저서와 『돌봄의 얼굴』, 『돌봄의 상상력』, 『돌봄과 인권』,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등 다수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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