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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한국 노동운동사 최초로 민주노조 ‘여성’ 지부장이 선출된 곳은 어디일까?
바로 인천 만석동에 있던 동일방직이다. 당시 동일방직 노동조합은 전체 조합원 1,283명 중 88%(1,214명)가 여성이었다. 하지만 노조의 지부장과 간부직은 소수의 남성들이 독점했고,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들은 활동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이 장벽을 깨고 1972년 5월, 주길자 씨가 한국 최초의 여성 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에서 주최한 〈페미니스트 역사기행 ‘페미로(路)_인천을 잇다’〉는 인천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를 배우는 온라인 강의와 현장 답사로 구성되었다. 역사 강의는 유경순 한국여성노동운동 연구자가, 현장 답사는 박명숙 인천여성노동자회 회장이 길잡이를 맡았다. 답사의 마지막 여정으로는 동일방직 제3대 여성지부장이었던 이총각 선생님과의 차담회가 이어졌다. 치열했던 그날의 이야기를 전한다.
차별과 억압을 뚫고 피어난 여성노동 운동의 힘
7일 저녁 진행된 강의에서 유경순 연구자는 “인천은 개항 이후 근대문물이 유입되고 대규모 공업지대가 형성된 산업의 중심지이자, 동시에 가혹한 노동환경에 맞서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여성노동운동의 효시이자 성지”라고 설명했다.
먼저, 일제강점기에 가혹한 장시간 노동과 폭력에 맞선 성냥공장 소녀 노동자들이 있었다. “하루 13시간 장시간 노동에도 불구하고 33전이라는 턱없는 저임금에 시달리며” 일했다. 소녀 노동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21년부터 1932년까지 총 다섯 차례 대규모 동맹파업을 감행”했다. 투쟁의 목표 또한 “임금인하 반대에서 점차 ‘임금인상’과 ‘8시간 노동제 실시’라는 노동권 쟁취로 발전”시켰다.
또, 전국 최대 미곡 집산지였던 인천의 정미소에는 수많은 ‘선미여공’들이 있었다. “하루 10~14시간 일하면서도 생존이 불가능한 수준의 임금을 받았고, 수시로 일본인 감독관의 폭력과 성희롱에 노출”되었다. 견디다 못한 노동자들은 1924년 ‘선미여공조합’을 결성했다. 여공조합은 “임금인상과 구타방지, 여성차별 금지 등을 요구하는 파업을 성공시키며, 1920년대 인천 노동운동의 핵심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사측은 남성 노동자들을 사주해 여성 (노조) 집행부를 짓밟으려 했고, 여성들은 1976년 (군부독재 하에) 강제 연행하려는 경찰에 맞서 작업복을 벗고 저항하는 ‘나체 시위’”를 벌였다. 또 “1978년 2월 노조 대의원 선거일에는 회사 측 구사대(회사에 고용되어 조합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가 여성 노동자들에게 인분을 뿌리고 먹이기까지 한 ‘똥물 투척 사건’이 발생”하는 등 노조 탄압이 계속됐다. 124명의 여성 노동자가 부당해고 당했고, 중앙정보부와 섬유노조가 배포한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다른 직장에 취업하는 것조차 봉쇄당했다.
그럼에도 여성들의 노동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부평공단의 반도상사에서 1974년 여성 지부장이 탄생했고, 당시 만연했던 ‘결혼 후 강제퇴사’ 관행을 폐지”시켰다. 이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불길은 코스모스전자, 진진양행 등 인천의 중소규모 여성 사업장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198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핵심 요구는 ‘임금 불평등 해소’와 모성보호, 그리고 관리자들의 성적 모욕과 욕설, 폭행을 중단하라는 ‘인격적 대우’”였다. 투쟁을 통해 “호주인 여성노동자의 가족수당 지급을 확보”하기도 했다. 유경순 연구자는 “그동안 남성만 가장으로 인정하던 관행을 깨고, 비록 ‘호주’라는 제한이 있지만 여성도 가장이라는 것을 인정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짚었다.
부당해고와 블랙리스트로 현장에서 쫓겨난 여성 노동운동가들 또한 멈추지 않았다. 이총각 동일방직노조 전 지부장을 비롯한 이들은 지역사회로 눈을 돌렸다. 이총각 전 지부장은 전세김을 빼서 구월동 모래내시장 인근에 공부방을 마련했다. 이후 빈민 자활기관 ‘청솔의집’ 센터장을 지내며 가난한 주민들 곁을 지켰다.
9일 진행된 현장 탐방은 인천역에서 출발했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의 ‘페미로’ 깃발 아래 모인 약 15명의 참여자들은 주말이라 활기찬 분위기의 차이나타운을 걸었다.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지나며 박명숙 회장은 “(당시) 여성노동자들이 모여 놀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 많이 모여 놀았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동일방직 인천공장이 있는 곳에 도달했다. 부지 7만5천817㎡에 조성된 방직공장으로, 1934년 일본의 5대 방적업체 중 하나인 동양방적이 조선에 진출해 조업을 시작한 곳이다. 해방 이후에는 서정익이 인수하여 1966년 동일방직으로 회사명을 개칭한 후 운영했다. 2017년 가동이 중단된 이후, 현재는 일부가 물류창고로 쓰이고 있다.
박명숙 회장은 “동일방직공장 부지가 사유지이긴 하지만, 여성노동운동의 역사가 깃들여 있는 곳이기에 역사성과 상징성이 있다.”며 “이 공간을 시민들을 위한 한국여성노동박물관으로 만들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시민사회에선 동일방직의 문화적 활용 방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화도 고개를 걸어 인천도시산업선교회로 이동했다. 화도 고개는 투쟁을 하던 여성노동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걸었던 애환이 서린 언덕길이라고 한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기, 기독교인들이 ‘산업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며 출발한 단체다. 가장 취약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던 도시 노동자를 대상으로 “약한 자를 강하게” 정신을 바탕으로 사역했다.
이곳은 1970년대 인천 지역 여성노동운동이 태동하고 성장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여성노동자들을 모으고 교양 교육, 소그룹 활동, 지도자 훈련 등을 제공하며 스스로 권리를 깨우치고 주체적인 노동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탐방의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동일방직 제3대 여성지부장이었던 이총각 선생님을 만나 경험담을 듣고, 참여자들이 질문을 던지며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를 더욱 깊이 접할 수 있었다.
‘모범 여공’에서 투사로, 후회 없는 연대의 삶
이총각 선생님은 1966년, 18세 나이로 동일방직에 입사했다. 먼저 공장을 다니고 있던 언니의 소개로 공장에 입사할 당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입사 신체검사에서 남성 의사에게 성추행을 당해 잊지 못할 ‘수치심’을 느꼈다. 그럼에도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 하나로 죽어라 일했다.
“여성으로, 딸로 태어나서 부모로부터 차별을 받았고, 우리 사회에서도 철저하게 배제되고, 소외되는 차별을 받았다. 그래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단체나 모임에서 남자들이 주도하는 거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노동조합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너무 가난하니까 그저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가지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적당히 좋은 남자 만나 시집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마 당시 여성들은 대체로 이렇게 생각했을 거다. 내가 살던 동네/지역이 너무 지겹고 지긋지긋한데, 거기서 탈출하는 건 결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노동은 오전, 오후, 저녁으로 나뉜 3교대였다. 밥 먹을 시간도 보장받지 못하고, 먼지와 소음이 가득한 “생지옥 같은 환경” 속에서, “할당량을 초과 달성해 관리자들에게 칭찬받는 기계 같은 ‘모범생’”처럼 일했다.
“그 언니들을 통해서, 몰랐던 이야기를 들으니까 새로운 게 자꾸 보이고 관심이 갔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조화순 목사의 교육을 통해, 노동조합의 존재와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과거에는 ‘가난이 부모 탓’이라고만 생각했지만, 뼈 빠지게 일해도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깨달으면서 점차 부당한 현실에 맞서는 주체적인 노동자로 각성하게 됐다.”
이후 이총각 선생님은 ‘모범 여공’이 아니라 노조 대의원이 됐다. 그리고 지도부 내 총무가 됐고, 1977년에는 제3대 지부장으로 당선됐다. 사측과 정권은 여성노동자들이 주도하는 민주노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가혹하게 탄압했다. 1976년, 이총각 선생님은 경찰의 강제연행에 맞서 여성 조합원들이 작업복을 벗고 저항한 ‘나체 시위’ 현장을 지켰고, 지부장이 된 후인 1978년 2월 21일에는 사측의 사주를 받은 남성 조합원들이 대의원 선거를 막기 위해 여성들에게 인분을 뿌린 끔찍한 ‘똥물 투척 사건’을 겪었다.
그 사건 이후, 이총각 선생님을 비롯한 125명의 여성 노동자가 부당해고를 당했다. 사측의 ‘블랙리스트’로 인해 다른 공장에 들어가기도 힘들었다. 해고 노동자들은 복직 투쟁을 멈추지 않고 출근 시위를 벌이다 구속되었다. 이총각 선생님은 감옥 내에서도 ‘징벌방’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다. 상상하기 힘든 고초와 동료의 배신, 사회로부터의 억압을 겪었지만, 이총각 선생님은 “노동운동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어떤 아픔에도, 어떤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 온 자신이 자랑스럽다”고.
"노동운동의 가치는 나를 찾고, 이웃과 함께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
“내가 지금까지 노동운동을 할 수 있었던 건, 내 생활의 일부라서다. 그리고 모진 협박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나 혼자의 힘이 아니다. 정말 많은 이웃들, 지인들, 동료들이 나와 함께하면서 힘을 줬고, 격려해줬으며, 용기를 줬다. 살아가면서 점점 느끼는 건 세상은 혼자 살 수 없고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거다.”
연대의 삶을 강조한 이총각 선생님은 노동운동의 의미 또한 재차 짚었다. “우리가 왜 노동운동을 하는가, 왜 사회운동을 하는가, 왜 공동체로 살아야 되는가. 한마디로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하는 거지 않나. 그러려면 누구 앞에서도 진솔해야 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운동이 어떤 경제적인 문제에만 몰입되지 않았음 좋겠다. 돈 몇 푼 더 받자고 우리가 노동운동을 하는 건 아니다.”
〈페미니스트 역사기행 ‘페미로(路)_인천을 잇다’〉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총각 선생님의 한 마디는 역사의 산 증인이 전하는 강렬한 메시지이자, 이번 탐방이 남긴 숙제였다.
“노동운동의 참 가치는 나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이웃들과 함께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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