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고 혼자 죽기 — 고독사와 수치심

[죽음을, 삶을, 아니 죽음과 삶을] 늦게 발견된 죽음

김영옥 | 기사입력 2026/05/30 [11:23]

혼자 살고 혼자 죽기 — 고독사와 수치심

[죽음을, 삶을, 아니 죽음과 삶을] 늦게 발견된 죽음

김영옥 | 입력 : 2026/05/30 [11:23]

20년 넘게 혼자 살아왔다. 나름 경력자다. 이 경력은 날마다 갱신된다.

 

혼자 산다는 게 곧바로 혼자 죽는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혼자 죽을 수도 있음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건 혼자 살기의 각주 같은 거다. 때론 각주가 본문보다 더 예리한 질문이나 성찰을 품기도 한다.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도착할 사건으로서 삶의 배치 속에 들어온다. ‘아프면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구에게 연락할 것인가, 어디까지 도움을 요청할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것인가.’ 혼자 산다는 건 이런 질문을 미리 오늘의 삶 안에 들여놓는 생활의 기술 혹은 역량에 가깝다.

 

▲ 혼자 산다는 건 관계가 없는 삶이 아니라, 고독을 기초 값으로 두고 삶을 조직하는 일이다. 죽음에 관한 질문을 미리 오늘의 삶 안에 들여놓는 생활의 기술 혹은 역량에 가깝다. Image by Sabine van Erp from Pixabay


왜 혼자 죽는 게 ‘실패한 삶’의 표지가 되나

 

1인 가구의 삶을 살피는 책 『필연적 혼자의 시대』을 읽으며 오래 곱씹은 장도 죽음을 다루는 마지막 장이었다. 개인화된 사회의 위험을 가장 최전선에서 맞닥뜨리는 게 1인 가구라면, 이 위험은 죽음의 과정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저자가 만난 사람들은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덤덤한 태도를 보였다. 죽음은 보편적인 자연의 일이니까, 때가 되면 죽는 거니까. 오히려 관심은 임종 전의 돌봄이 필요한 시기로 쏠린다. ‘안 아프고 깔끔하게 죽고 싶다’고 말한다. 이건 설령 아프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깔끔하게’ 죽을 거라고 결의를 다지는 노년들의 말과 일치한다.

 

차이는 ‘죽음 이후’에 대한 생각에서 나타난다. 늦게 발견된 죽음, 냄새, 남겨진 물건, 그리고 수치심. 고독사 이야기다.

 

“추한 모습으로 보이기보다는 편안하게 죽은 모습 있잖아요. 그런 모습이 조금 덜 부끄러울 것 같아요. 헤벌레 입을 벌리고 옷도 덜 걸치고 실오라기 하나 없이 죽은 모습을 남에게 보였다. 만약 이러면 너무 수치스러울 것 같아요.” —고정민(정신건강 사회복지사, 30세)

“저는 죽은 후가 너무 무서워요. 그런 얘기 듣잖아요. 시체가 한 달 이상 썩어서 하도 냄새가 나서 들어가 보니까 어떻더라, 이런 거.“ —신지영(기간제 교사, 42세)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ebook, 85쪽)

 

돌봄의 배웅 없이 고립된 채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과정’이 문제가 아니라, 고독사에 대한 ‘수치심’이 1인 가구 죽음 생각의 핵심이라니. 늦게 발견된 시신의 ‘부패한’ 모습이 그동안 살아온 삶에 켜켜로 쌓인 이야기와 의미 또한 ‘부패시킬’ 거라는 공포, 결국 빨리 잊히는 게 가장 축복일 만큼 추하고 비참한 삶으로 추락할 거라는 두려움이 압도적이라니.

 

『죽은 자의 집 청소』 같은 문화 미디어가 고독사에 관해 퍼뜨린 부정적인 이미지의 위력을 새삼 확인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뒤늦게나마 고독한 죽음을 마무리하는 손길을 엿볼 수도 있고, 어떤 죽음도 비참에서 멈출 수는 없다는 전언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들이 보여주듯, 유포된 고독사의 ‘장면’은 사회적 각성이나 실존적 고민으로 전환되지 않은 채, 희화화된 상태로 사람들의 머릿속을 떠돈다.

 

“그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 고독사에 대한 사회적 해석

 

1인 가구는 결혼 출산 양육이라는 생애 단계를 살아내느라 죽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다인 가구보다 훨씬 일찍부터 자기 죽음을 생각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죽음에 대한 사유가 과연 얼마나 덜 표피적인, 덜 상투적인, 덜 자본주의적인 생각일 수 있을까.

 

고독사는 혼자 맞이한 죽음, 늦게 발견될 수도 있는 죽음이다. 여기에 인간의 죽음 중 가장 처참한 죽음이라는 사회적 해석이 들러붙는 건, 혼자 살며 혼자 죽는 이들에 대한 모독이다. 드러나지 않은 협박이다.

 

“그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사람도, 사물도, 나라도, 도시도 태어나서 피고 지고 썩는다.”(『느리게 마이너노트로』, 우에노 지즈코, 64쪽) 페미니스트 선배 독거노인 우에노 지즈코 선생의 이 말을 해독제로 인용하고 싶다. 고독사 이전에 고립된 삶이 있다. 고독사에 비참함이 있다면, 그건 삶을 고립에서 보호하지 못한 사회와 국가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왜 혼자 죽는 게 실패한 삶의 표지가 되는 걸까.

필립 아리에스는 『죽음 앞의 인간』에서 죽음을 대하는 인간/사회의 감각이 역사 속에서 변화해 왔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죽음은 자연 속 야생의 폭력이었고, 공동체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길들이기 위한 의례를 발전시켰다. 이후 인간이 자신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뿐 아니라 특별한 자아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죽음은 ‘사건’이 되기 시작한다. 고유한 존재인 ‘나’의 죽음이나, 내게 특별한 타자인 ‘너’의 상실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죽음은 수치스럽고 불편한 것이 되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데로 추방된다. 아리에스가 ‘역전된 죽음’이라고 부른 죽음의 추락이 최종적으로 도달한 곳이 병원이다. 최근에 한국 사회에서도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조력 존엄사나 (특히 가정) 호스피스에 관한 관심, 더 일반적으로는 ‘집에서, 살던 곳에서 죽고 싶다’라는 소망이 커지는 건, 역전된 죽음을 다시 역전시키려는 움직임이다.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이 노출되는 방식이 수치(羞恥)의 대상이 된 상태. 오늘날 1인 가구가 고독사에서 느끼는 수치심과 두려움은 이러한 역사 위에 놓여 있다. 고독사는 혼자 죽었다는 사실보다, 그 죽음이 제대로 관리‧통제되지 못했다는 인상을 남긴다는 점에서 더 큰 불안을 낳는다.

 

다시 한번 질문하자. 왜 혼자 죽은, 그리고 늦게 발견된 죽음이 그/녀의 삶의 총체적 실패가 되어야 하는가. 예를 들어 영화 〈럭키 아파트〉(강유가람 감독, 2024)는 고독사한 노년 여성의 생애 전체를, 아름답고 따스했던 두 여성 간의 사랑을 중심으로 새롭게 엮는다. 그의 죽음은 아래층까지 뚫고 내려온 어떤 냄새에 의해 발견되지만, 그의 삶은 그 불편한 장면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그 고독사를 낳은 건 고립된 삶이었고, 그 고립된 삶에 대한 책임은 동성 간 친밀성을 인정하지 않은 사회와 국가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수치심은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혼자 산다는 건 관계가 없는 삶이 아니라, 고독을 기초 값으로 두고 삶을 조직하는 일이다. 혼자 먹고 자고 아프고 사람을 만나고 일하는 동안 꾸준히 생활의 기술을 익힌다. 실패하고 다시 배우고 새롭게 조정한다. 고독하지 않으려 할 때, 외로움의 통증이 커진다. 필요한 건 고독의 회피가 아니라, 고독하게 일상을 지키는 기술의 연마다.

 

푸코는 이를 ‘자기의 배려’(epimeleia heautou)라고 불렀다. 이것은 무엇보다 자기와 관계 맺는 법을 익히는 것, 그렇게 삶을 하나의 형식으로 빚어내는 기술이다. 자기 자신에 잘 머물며,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되고, 자기 자신에게서 즐거움을 발견하고 존중하기. 그에 따르면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는 원래 ‘너 자신을 돌보라’는 요청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그러나 자기 배려의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이 곧 ‘혼자 죽는 죽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죽음은 언제나 타자를 호출한다. 홀로의 죽음에는, 호출되었으나 응답하지 않는 타자의 부재가 있다. 죽음 이전의 돌봄, 죽음 이후의 마무리, 애도와 행정, 이 모든 과정을 동행하는 공공의 손길이 필요하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도 강조하듯이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공공복지의 책임이 무덤 앞에서 멈춰 서면 안 된다.

 

그럼에도 고독사가 발생한다면? 그때 남겨지는 수치심은 누구의 것인가. 무엇인가. 고독사를 ‘대면한’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건 단지 냄새와 부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장면 안에서 자신의 취약성을 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조르조 아감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생존을 분투하는 존재(조에, zoe)인 동시에,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언어 주체(비오스, bios)다. 인간의 삶은 둘 중 어느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둘 모두의 경계에 있다. 사람의 인정 고픔이나 의미 마름은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궁극적으로 이기지 못하며, 탁월한 견해나 치열한 정의감은 먹고 싸고 냄새 피우는 몸의 순환과 분리될 수 없다.

 

고독사의 장면이 우리를 흔드는 것은 단지 ‘조에’(생물학적 몸)가 드러났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비오스’(사회적 주체)라고 믿어온 삶이 사실은 ‘조에’ 위에, 아니 그 안에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치심은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 수치심은 취약성을 개인의 실패로 돌려온 사회의 것이고, 그 장면 앞에서 자신의 취약성을 직면하게 된 우리 모두의 것이다.

 

고독사의 장면이 지니는 이 노출과 폭로의 이중 구조를 제대로 이해할 때, 우리는 홀로 죽는 죽음에 윤리적으로 다가갈 수 있고, 사회문화적으로 예를 갖출 수 있다. 우리는 목숨 걸고 둘째 오빠의 시신에 모래 한 줌이라도 덮어주려 한 안티고네의 후손이다.

 

이제 우리가 응답해야 할 질문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리라. 더 이상 ‘그냥 자연의 일’일 수 없게 된 인간의 죽음을 어떻게 자연-문화라는 보다 포괄적인 생태에 귀속시킬 수 있는가. 혼자 죽더라도 그것이 피상적인 수치가 되지 않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필자 소개] 김영옥. 페미니스트 여성으로 늙어가고 있다. 교차성의 관점에서 노년기 말년성에 대해 질문하고 감각하고 쓰고 지우고 또 다시 쓰고 있다. ‘죽음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사유는 무엇을 하는가’에 관심이 있다. 이번 연재에서 죽음에 대한 사유는 명사적 죽음의 보편성과 동사적 죽음 경험의 특이성을 교차적으로 탐색하면서, 삶의 여러 국면을 고유한 문장으로 새롭게 낯설게 만나게 하리라 기대한다.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단독 저서와 『돌봄의 얼굴』, 『돌봄의 상상력』, 『돌봄과 인권』,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등 다수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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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훌훌 2026/06/03 [06:00] 수정 | 삭제
  • 인생 자체가 고해라더니 부대끼며 살아 온 삶의 궤적을 지우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뇌에 찬 큼지막한 번민 덩어리를 어찌할 줄 모르는 이 안타까움!
  • 바다 2026/06/01 [12:28] 수정 | 삭제
  • 홀로 죽은 친구 생각이 나는 기사네요. 왜 나를 부르지 않았을까? 왜 가족에게 연락하지 않았을까? 만약에 나에게 연락을 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친구는 병원에 가기 싫어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기로 선택한 걸까.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했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나혼자 마음아파하고 많은 생각을 했지만 그것이 친구의 선택이기도 하였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어요. 변함이 있는 건 아직 살아있는 나 자신이고, 저는 죽음에 대해 예전보다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글 읽으면서 머릿속이 조금 더 정리가 되네요.
  • 라라 2026/05/30 [13:30] 수정 | 삭제
  • 고독사가 두렵다는 지인이 설명하는 장면이 죽음의 과정이 아니라 발견되는 모습이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었는데, 정말 공감이 가는 글 잘 봤습니다. 죽음은 그저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별날 것이 없지요.얼마전 떠나보낸 고인을 추모하며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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