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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시간 동안 75차례 넘게 성적 행위를 거부하는 피해자의 음성이 녹음 파일에 고스란히 담겼다. 가해자가 거부 의사를 무시하고 계속 성행위를 시도하자, 피해자는 가해자의 머리채를 잡으며 저항했다. 그러나 1심과 2심 법원은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은 사실이지만, 가해자의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이른바 ‘최협의설’에 근거한 판결이다.
2심 무죄 판결 이후 피해자는 검사에게 대법원 상고를 요청했지만, 검찰이 상고를 포기하며 무죄가 그대로 확정되었다. 우리 형사소송법상 범죄 피해자에게 독립된 상소권이 없기 때문에, 피해자는 결국 헌법재판소에 ‘재판소원’을 청구했다. 법원의 판결이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침해했기에 헌재의 판단을 구하는 절차다.
시민사회는 이번 재판소원이 단순한 판결 뒤집기를 넘어, 대한민국 사법체계가 성폭력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잣대를 바꾸라는 시대적 요청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객관적 증거에도 유사강간죄 ‘무죄’…위헌적 판결 헌재가 바로잡아야
이도경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재판소원의 발단이 된 형사사건의 무죄 판결의 문제점을 설명했다. 피해자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가해자로부터 기습적인 유사 강간 피해를 입었고, 처음 성적 접촉을 시도한 순간부터 가해자와의 대화를 녹음했다. 녹취록엔 약 1시간에 걸쳐 75회 이상 가해자에게 성적 행위를 거부하는 의사 표시가 담겨있었다.
또한 이도경 변호사는 “가해자가 ‘(유사강간 전에) 합의된 성관계를 했다’고 주장한 것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정액 반응 음성)”가 있다고 밝혔다. “(피해자가) 두 사람 간의 공통 지인에게 전화를 해 위험한 상황임을 알린 통화 내역도 있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1심과 2심 법원은 피해자가 명시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강간죄의 폭행·협박 요건을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로 좁게 해석하는 ‘최협의설’이 주된 근거였다. 이 변호사는 “(법원이) 피해자가 (사건) 이전에 거부하지 않은 스킨십이 있었으며, 가해자가 피해자의 거부 의사를 오인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강간 통념’을 판결의 근거로 사용했다”고 비판했다.
이도경 변호사는 “법원이 시대착오적인 최협의설을 자의적으로 적용하고, 피해자의 거부 의사가 담긴 명백한 증거를 배척함으로써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국가의 의무를 저버렸다”고 지적했다. 이는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 평등권, 인격권,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명백히 침해한 것”이므로, 위헌적 재판을 헌재가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가해자의 ‘오인’은 믿고, 피해자의 ‘거부’는 의심한 재판부
무죄 판결문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 것은, 객관적인 증거를 무시한 채 가해자의 주장에 과도한 신뢰를 부여한 재판부의 편향적 태도다.
가해자는 사건 당일, 유사강간 전에 이미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주장은 국과수 감정 결과(정액 반응 음성)와, 범행 전 피해자가 지인에게 위험을 알린 통화 내용, 더불어 가해자 자신이 한 말의 녹음 음성(‘나 네 것에 들어간 적도 없어’)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그럼에도 법원은 “피고인은 이미 피해자와 성관계를 하였다”고 사실로 인정했다.
또한 법원은 피해자가 반복적으로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가해자가 성행위를 멈추지 않은 것에 대해, “이전에 (피해자가) 자의로 키스를 하였으므로, 피고인이 피해자의 내심을 오인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김홍미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이번 재판은 전형적인 “현대적 강간 통념”이 작동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전적인 강간 통념”이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성폭력을 정당화했다면(‘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어서 성폭력 대상이 된다’), “현대적 강간 통념”은 보다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예를 들면 ‘그 상황에서는 남성이 오해할 수 있다’거나 ‘여성이 분명하게 신호를 주지 않았다’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강간 통념으로 인해 피해자의 말과 경험이 무시되는 “증언 부정의”(testimonial injustice)에 대해 김홍 부연구위원은 강력하게 비판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반복적으로 거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반복된 거부 의사를 묵살하는 가해자에 대해 피해자가 느꼈을 분노와 당혹감, 자신의 몸이 침탈당하는 상황의 치 떨리는 모욕감과 치욕스러움에는 단 한 걸음도 다가서지 않는다.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내가 아닌 타인의 의지로 몸에서 인격이 분리되어 파열되는 고통의 순간을 상상하지 못한다. 반면에, 왜 피해자의 반복된 거부가 피고인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수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 수월하게 설명하며, 간단하게 판시한다. 피고인의 오인은 합리적인 것으로 판단되었고, 피해자의 고통과 파열 은 법적 판단의 언어로 번역조차 되지 못한 채 지워지고 말았다. 이것은 과연 정의롭다 할 수 있는가.”
강간죄와 유사강간죄를 판단할 때, 상대방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었는가를 기준으로 삼는 ‘최협의설’이 폐기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이어졌다.
장임다혜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에 따르면, 이 법리는 “1953년 형법 제정 당시 강간죄의 보호법익을 여성의 ‘정조권’으로 보았던 시대의 산물”이다. “정조를 보호하기 위해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저항했는지를 심판대에 올리는 과거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1995년 형법 개정을 통해 강간죄의 보호법익이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변경되었음에도, 여전히 법원이 과거의 낡은 잣대로 피해자의 저항 수준을 평가하며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장임다혜 선임연구위원은 “지난 2023년 전원합의체 판결(2018도13877)을 통해, 정조권이 아닌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형법 제32장의 보호법익이 변경된 점에 비추어 ‘강제추행죄’의 경우 최협의설이 폐기된 바 있다”고 설명했다. 상대방의 신체에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하거나 해악을 고지하는 것만으로도 강제추행죄를 적용하기에 충분하다고 보아, ‘항거 곤란’을 요구하던 기존 판례를 바꾼 것이다.
이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 여러 하급심 법원에서는 강간죄와 유사강간죄에 대해서도 최협의설을 폐기한 법리를 적용하여 유죄 판결을 내리고 있다. 이처럼 다른 법원들은 피해자의 ‘거부 의사’에 반하는 유형력 행사를 범죄로 인정하고 있는데, 유독 이 사건 재판부가 과거의 최협의설을 고집하여 무죄를 선고한 것에 대해, 이도경 변호사는 “명백한 ‘평등권 침해’”라고 지적했다.
국제적 흐름 역시 ‘동의’ 여부를 강간죄/유사강간죄 판단의 핵심 기준으로 삼고 있다. 안지희 법무법인 유한 변호사는 해외 사례를 소개했다. 독일은 2011년 이스탄불 협약에 따라 ‘다른 사람의 분명한 의지에 반하여’ 이루어진 성적 침해를 처벌하도록 강간죄 규정을 개정했고, 최협의설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일본조차 2023년 동의하지 않는 의사를 표명하기 곤란한 상태까지 포함하는 ‘부(不)동의 성교죄’로 법을 개정했다.(관련 기사: 한국보다 앞서 강간죄 개정한 일본…‘비동의 성교죄’ 들여다보기 https://ildaro.com/9727)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 또한 한국 정부에 폭행·협박 요건을 ‘동의 여부’로 개정할 것을 지속적으로 권고하고 있다고, 안지희 변호사는 강조했다.
성적 자기결정권 보호하라…재판소원이 중대한 분기점 될 것
75번의 거부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면, 지인이나 연인 등 친밀한 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성폭력 사건 피해자들은 법의 사각지대에 방치될 수밖에 없다. 한선희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사법부가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줄 때 피해자는 극심한 자기 검열과 고립을 겪게 되며, 이는 성적 자기결정권 감수성을 퇴보시키는 위험한 사회적 신호가 된다”고 경고했다.
피해자가 제기한 재판소원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이 건을 본안 심사로 회부할지 각하할지 결정하는 사전심사 중이다. 사전심사는 헌법소원 청구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이뤄지기 때문에 5월 18일까지 결정이 났어야 하지만, 헌재가 보정명령을 내렸고 사전심사가 30일 더 연장되었다. 공대위는 우리 사회를 ‘강간문화’가 아닌 ‘평등문화’로 이끄는 길에 시민들의 많은 참여가 필요하다며, 재판소원 본안 회부를 촉구하는 2차 서명운동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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