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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참교육〉이 연일 화제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참교육〉은 공개되자마자 전 세계 넷플릭스 순위 1위를 차지했고, “무너진 공교육의 실태”와 ”교권침해와 학교폭력 등 학교의 현실을 조망했다”고 평가받으며 일명 ‘사이다 드라마’로 불린다. 특히 드라마의 일부 장면들은 유튜브나 SNS 등 숏폼으로 제작되고 공유되며 짧은 장면으로 그 통쾌함을 극대화시킨다. 관련 영상의 댓글들은 “속이 시원하다”, “이게 진짜 참교육이다”, “진짜 이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며 교육 현장에 대한 갑갑함을 드라마로 일면 해소하는 듯 보인다.
‘착한 학생’과 ‘괴물’이라는 이분법, 체벌 정당화하는 고루한 논리
드라마는 차례로 ‘문제학교’들을 조명한다. 1화는 학생 중 ‘전따’(전교생이 따돌리는 학생)를 지정해 혹독히 괴롭히는 학교폭력의 현장을, 2화의 하이텍 고등학교에서는 자동차과와 전기과로 나누어지는 일진 무리들이 패싸움 등으로 학교 일과를 완전히 마비시킨 모습을 보여준다.
출동한 교권보호관 나화진의 문제 해결은 무척 단순하다. “자신이 한 행동을 고스란히 돌려받음으로써,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똑똑히 깨닫게 하는 것”이라는 교육부 장관 최강석의 대사처럼, 폭력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이다. 말이야 거창해도 결국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체벌의 고루한 논리다.
교권보호관인 동시에 특전사 출신인 나화진은 드라마 내내 지겹게도 학생들을 때린다. 학교폭력을 일삼고도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라는 빽을 믿고 의기양양한 류준형과 “MZ 조폭”에 합류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박성환과 조인범은 맞아도 싼 인물로 그려진다. 이들에 대한 “참교육”으로 체벌을 가하는 나화진은 다른 학생들의 구원자이자 통쾌한 활극의 히어로로 묘사된다. 심지어 그 체벌은 류준형을 비롯한 학교폭력 가해자들의 긴급체포 및 신상공개로 이어지고, 박성환과 조인범은 자신들이 인간샌드백 취급했던 피해 학생에게 사과하는, 그야말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식 해피엔딩을 이루어낸다.
드라마는 위와 같은 전개에 당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내내 누구 하나랄 것 없는 이분법적 재현에 힘쓴다. 학교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1화), 불량학생과 모범생(2화), 선량하고 교육열이 높은 교사와 돈을 받고 비리를 저지르는 교사 (4화) 등.
교권보호국을 창설한 장본인인 최강석은 “교권국은 학생과 싸우려는 게 아닙니다, 괴물들과 싸우려는 겁니다.”라며 괴물과 학생을 구분한다. 교권보호관 나화진은 자동차정비사라는 꿈을 이루고자 하이텍 고등학교에 입학한, 다시 말해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학생(모범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문제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이들의 선배가 조직폭력배와 함께 학교에 쳐들어오자 학생이 아니고 조폭이니 봐줄 필요가 없다며 역시나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심지어 교권보호관에게 체벌을 포함한 모든 조치가 가능하다는 권한을 부여한 최강석은 “체벌이 아니라 체벌 할아비를 동원해서라도 학습권을 지킬 것”이라며 이러한 폭력에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다.
이러한 재현은 진짜 문제를 가리고, 기존 학교에 체벌과 통제가 없었기 때문에 교권 침해가 심각해졌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폭력과 통제는 더 나은 학교를 만드는 것이 아닌 반교육적 체제를 강화할 뿐이다.
우리 사회는 지난 수십 년에 걸친 사회적 논의 끝에 체벌은 교육이 아니라 폭력이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2020년 법무부가 민법 제915조 징계권 조항 삭제를 추진한 것 역시 이러한 변화의 연장선에 있다. 체벌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드라마가 그리는 것처럼 “학습권을 지키는” 게 아니라 강자에 대한 두려움을 내재화하여 폭력을 재생산할 뿐이다. 드라마 〈참교육〉 속 학생들은 체벌을 통해 그야말로 “두려움을 내재화하고 폭력에 굴종”하는 방식으로 교화된다.
학생을 괴물과 모범생으로 구분하고, 폭력으로서 괴물을 박멸하는 것이 교육의 역할인가? 드라마의 모든 전개는 교사와 학생을 넘어 피해자만을 구제하겠다는 교권보호국의 판단으로부터 이루어진다. 학생들이 나화진의 체벌을 통해 무엇을 지켰으며 또 배웠는지는 보여주지 않고, 오로지 통쾌함으로 표상되는 단절적 응징의 순간만을 비춘다.
여기서 이분되는 ‘가해자’는 꼭 폭력과 범죄를 저질렀는가만을 기준으로 하지도 않는다. 어른들을 비롯한 기존 질서에 감히 도전하거나, 말대꾸를 하고, ‘착한 학생’의 규범에서 탈락하는 모든 청소년을 곧장 ‘문제 학생’으로 낙인찍어 통제와 퇴출을 명령하는 구조가 작동한다.
학생의 돌발행동을 통제 또는 퇴출할 대상으로만 삼고, 교육적 해법을 모색하지 않는 ‘참교육’식 해법으로는 비슷한 비극이 이어질 것이다. 지금 필요한 일은 어른들이 상정한 범주에서 벗어난 학생을 ‘문제 학생’으로 낙인찍는 일이 아니라, 학생들의 돌발행동을 위기 신호로 포착하고 교육적 해법을 찾는 일이다. 교사 개인이 학생의 돌발행동을 감당하도록 두지 않고, 학생의 위기를 교육공동체 모두가 함께 지원하는 체계를 마련하는 일일 것이다.
모범생과 ‘문제 학생’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모든 학생의 저마다의 속도를 인정하고 학생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가질 수 있는 평등하고 인권친화적인 학교를 만드는 일이다. 위기 지원에 대한 매뉴얼과 제도의 부재 속에서, ‘독박 교실’을 경험하는 교사의 인력 부족을 비롯한 어려움에 대한 논의 역시 함께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이처럼 드라마 〈참교육〉은 잠시의 통쾌함을 위해 학생의 현실을 묵인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은닉한다. 교권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체벌을 포함한 모든 권한이 허용되는 세계에서 학생은 교권을 침해하는 해악적 존재이거나, 폭력으로 계몽되어 체벌의 효과성을 증명하는 존재로서만 등장한다.
교권침해의 심각성에 당위를 부여하기 위해 3화의 한예리를 재현하는 방식은 특히 악의적이다. 유명 인플루언서 여고생이 자신에게 조언한 교사를 성추행범으로 몰아가 끝내 죽게 만든다는 내용은 2018년 스쿨미투 운동 당시 고발자였던 학생들을 ‘꽃뱀’으로 몰아갔던 학교와 언론의 2차 가해를 떠올리게 만든다. 3화에서 여학생의 성폭력 고발은 ‘나중에 문제가 돼도 장난 아니면 오해였다고 발뺌하면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묘사는 여성이 이득을 얻기 위해 성폭력 고발을 한다는 ‘꽃뱀’ 담론이나, 청소년이 소수자의 위치를 악용한다는 청소년 혐오를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드라마와 사뭇 다르다. 한국의 성폭력 무고죄 비율은 매우 낮고, 성범죄에 대한 처벌 형량은 충분하지 않다. 게다가 청소년은 여성/청소년에 친화적이지 못한 성폭력 처리 과정에서 보호자의 동의 및 동행을 요구받거나 학교와 가정, 지역 사회로부터 절차를 중단하라는 압박을 받는 등 입증에 추가적인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교사에 의한 성폭력의 경우 ‘교육적 목적’이나 ‘친밀감 형성’으로 포장되어 피해를 인정받지 못하기도 한다.
실제로 스쿨미투 사례에서도 교육 시스템과 교사-학생 간 위계 속에서 학생들의 문제 제기는 학교공동체 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많다. 이들의 비판은 교사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교권침해’로 해석되고, 학생들에게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거짓말을 하는 ‘영악한’ 학생이라는 이미지를 남긴다. 특히 스쿨미투 운동이 확산된 지 8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연 100건 이상의 교사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며, 이 중 학생 대상의 성폭력은 40%를 넘는다는 현실은 이러한 재현에서 의도적으로 삭제된다.
‘꽃뱀’ 담론이 힘을 얻는 이유는, 학내 성폭력을 구조적 문제가 아닌 개인의 일탈 또는 가십으로만 치부하는 통념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스쿨미투는 학내 성폭력 문화 전반에 대한 고발이었음에도, 이를 피해자 개인의 경험으로 치부하고 심지어는 ‘거짓 고발’로 음해하는 2차 가해가 8년 내내 반복되어 왔다. 이 기나긴 반복을 끊기 위해서라도, 학내 성폭력을 개인의 경험을 넘어 구조적 문제로 사유하고 일상적으로 성차별에 대해 문제 제기할 수 있는 공론장이 필요하다. 이러한 공론장은 교사와 학생 모두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고,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존중이 담보되는 인권친화적인 학교에서만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
교권보호국이라는 판타지, 진짜로 교권보호관 서넛이 출동하면 해결될까?
혹자는 〈참교육〉이 어디까지나 현실이 아닌 판타지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답답한 현실을 잠시나마 탈피하는 ‘사이다 드라마’로 즐겁게 봐도 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과연 〈참교육〉의 등장과 시민들의 열광은 현실과는 분리되어있는 것일까?
지난 12일 안민석 경기도교육감 당선인은 〈참교육〉을 언급하며 교육활동보호국 설치에 대한 기대를 밝혔고, 뒤이어 출연한 라디오에선 교권보호에 대한 시민들의 열의를 확인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체벌을 부활하자는 의미는 아니”며 교권침해를 막자는 취지라고 부연했다. 교육 현장에 대한 높은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할 교육감 당선인이, 드라마 속 교권보호국의 효과가 강력한 수준의 체벌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누락하고 있는 것이다.
교권보호국이라는 판타지가 어떤 사회적 욕망 위에서 건설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교권보호국에 대한 시민들의 열광은 결국, 학교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이 드라마처럼 누군가가 짠하고 나타나 단번에 해결되었으면 한다는 희망을 시사한다. 하지만 교권보호관 서넛이 출동해서 해결될 문제라면, 긴 역사 동안 왜 학교의 문제는 동일한 방식으로 이어져왔을까? 실제 교육 현장의 주체들이 무능하거나, 학교의 변화를 꿈꾸지 않았거나, 교권보호국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일까?
〈참교육〉 속 ‘참교육’은 교권보호관이 어떤 법령에도 제한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드라마의 구조가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설계되어 있기에 가능한 판타지다. 적은 인원의 교사가 많은 업무와 학생들을 배분받고 관리해야 하는 과중함 속에서 권리보다는 효율을 추구해야 하는 현재 학교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선 묵인하고, 청소년 범죄가 일어나는 사회적 조건에 대해선 다루지 않으면서, 촉법소년을 ‘법을 이용해 처벌을 면하는 영악한 범죄자’로만 재현하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20년간을 견디고 공부해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성공신화가 아닌, 아이의 목숨보다 의대를 중요하게 여기는 양육자 개인의 욕심만을 처벌하기 때문이다.
학교의 문제는 학생 개인의 일탈과 악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입시경쟁,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는 교사, 위계적인 학교 문화, 불평등한 교육환경, 학생의 목소리가 배제된 의사결정 구조가 모두 유기적으로 학교 현장을 구성한다. 폭력을 행사하는 일부 학생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재생산하는 학교 구조에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기존의 학교를 지배하던 통제와 폭력 대신 학교의 새로운, 민주적 질서를 논의할 수 있는 공론장으로 향해야 한다.
지금은 응징의 통쾌함을 넘어 교육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말해야 할 때다. 학교가 바뀌어야 한다는 열망은 학교를 비롯한 교육 현장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혼란이기도, 신자유주의와 대학 신화 속에서 학교가 어떤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미지의 두려움이기도 할 것이다.
참교육 운동은 전교조의 결성 전후로 시작된 열악한 교육환경에 대한 문제 제기였고, 교육계의 부조리함에 대한 반발이었다. 2026년의 교육은 또 어떤 경합과 긴장을 통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좋은 학생과 나쁜 학생의 이분된 세계관을 전복하며 평등한 교육 현장을 만들어갈 참교육은 무엇일까.
[필자 소개] 최유경 : 반사이버성폭력운동 활동가, 청소년 시민들과 함께 말하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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