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나도 삶은 계속…혼인평등 향해 인생 2막[공연예술 독립기획자 고주영이 만나다] 무지개행동 활동가 송이원게으르게나마 이 인터뷰 연재하면서 좋은 것 중 하나는 예전 동료들의 새로운 현장을 보는 일이다. 독립서점, 요리작업실, 그리고 이번엔 〈무지개행동〉의 사무실.
서울 마포 공덕동 끄트머리의 성소수자 친화적인 빌라 2층에 자리한 사무실은 화이트톤의 깔끔한 인테리어와 활동가들의 사무공간이 널찍하고 쾌적하게 배치되었지만, 당연히 상상했던 커다란 레인보우 플래그나 ‘혼인평등’ 구호가 적힌 슬로건이 붙은 벽면 같은 건 없었다. (사진을 어디서 찍나…) 오랜만에 만나는 송이원에게 선물로 준비한 꽃다발을 꽂을 꽃병은 없었지만 퍼레이드 차량, 부스를 준비하기 위한 산더미 같은 택배가 있었다. 퀴어퍼레이드를 한 주 앞둔 주말이었다.
내가 인터뷰에 앞서 “연극계를 떠난 동료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 내 앞길에 참고삼아 진행하는 인터뷰”라고 소개하자, 칭찬 섞인 그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간 인터뷰이들을 섭외하면서, 그들과 연극/예술과의 현재의 관계를 정확히 몰라 “연극/예술에 거리를 두고” “활동의 반경을 넓힌” 등 완곡한 표현을 썼었다. 실제로 연극/예술과 현재 완벽하게 선을 긋고, 단절하고 사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런데 송이원은 첫 마디에 “연극을 그.만.뒀.다”고 또렷하게 말했다.
연극, 시작―갑도 을도 못되는 병의 이야기
“대학 1학년 말에 성소수자 동아리에, 2학년 초에 중국어 연극 동아리에 가입했어요. 연극보다는 ‘중국어’로 뭘 한다는 거에 끌렸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연극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그러다가 전공까지 경영학에서 미학으로 바꿨죠. 경영학은 어렸을 때부터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생각해 선택한 전공이었는데, ‘휴먼 리소스’라는 생각해보면 충격적인 표현을 낙관적이고 긍정적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경영학에 계속 위화감도 들었고 위축도 되었고요. 미학은 그냥 교양으로 들었는데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관심사에 따라 전과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두 동아리 활동을 하느라 제적, 재입학을 거쳐 이미 연극 활동을 한창 하던 2020년에서야 거의 열 살 훨씬 넘게 차이 나는 후배들과 함께 간신히 졸업했다.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나 그런 걸 미학 수업에서 배우면서, 공간을 가지고 관계 맺기의 방식을 만들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너무 재미있다고 느꼈어요. 연극은 뭐든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닌가! 첫 공연 때는 배우를 했다가, 〈광인일기〉를 각색하며 극작도 해보고, 연출도 하고, 그렇게 됐죠.”
학교 친구들과 결성한 ‘병(丙)소사이어티’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연극 활동을 시작했고, 한동안은 해마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에 작품을 만들어 참여했다. 함께 하던 대학 친구들 중 자신의 진로를 찾아 떠나는 사람도 생겼고, 작업하며 만난 인연들이 극단에 들어오기도 했다.
“‘병(丙)소사이어티’는 갑도 을도 못되는 병의 이야기를 하자, 하며 만들었어요. 실제로 저를 포함해 그런 변방의 사람들이 모이기도 했고. 너무 팬시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보다는 좀 비주류적인 이야기 혹은 그 감성 자체를 작품에 담아내고 싶었어요. 근데 연극을 한두 번 해보면서 저는 가장 딱 즐겁고 쾌감을 느꼈던 순간이 대사나 어떤 방식으로든 전달하는 내용 자체보다 그 내용과 공간의 분위기, 형식이 묘하게 맞아떨어져서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내는 순간이 엄청 짜릿하더라고요. 그래서 연극의 형식을 실험해보고 싶다, 내가 만들 수 있는 무대의 언어를 발견하고 싶다, 하는 연극적 자의식이 생겼어요.”
그렇게 만든 작품이 낙성대역 근처 지하 작업실에 학교 책상을 늘어놓고 그 위를, 관객들 사이로 돌아다니다가 책상으로 공간의 구조를 바꾸기도 하는 형식의 자기고백적인 작품 〈꼬마 짱꼴라〉(2015 서울변방연극제), 그리고 연극인이자 연출로서의 얼마간의 자기 트레이닝을 거쳐 선보였던 〈신토불이 진품명품〉(2019 서울변방연극제)였다. 〈신토불이 진품명품〉은 트랜스젠더, 병역거부자 친구들, 그리고 ‘소수성의 복합체’인 송이원 연출이 공동창작하여 선보인 작품이었다.
그 전에도 송이원은 연극계에서 감 좋은 사람들은 눈여겨보던 연출이었지만, ‘변방’연극제가 거점이었던 그녀는 〈신토불이 진품명품〉을 기점으로 ‘주류’ 연극계(란 뭘까요?)의 궤도에 오른다. 대기업 문화재단, 대기업 극장, 국립 공연단체 등, 공연하는 사람들이 가장 고파하는 예산, 공간, 인적 서포트를 갖추고 자신의 공연을 정식으로 만들어 공연할 기회를 순차적으로 얻게 된 것.
“저는 그때는 솔직히, 그러니까 그 순간을, 저는 되게 바랐어요. 오만한 말이지만 저는 제 무대 언어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제가 하는 게 논의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도 스스로 평가했기 때문에 계속 새로운 연극 언어를 실험해보고 싶었거든요.
무엇보다 국적 때문에 제 개인 명의나 제가 대표로 있는 단체로 지원사업을 신청할 기회조차 없는 제약이 있으니, 내가 계속 작업을 하고 실험을 해나갈 수 있는 방법은 제도권으로 가거나 제도권의 의뢰를 받거나, 아니면 (연극계에서 알아줄 만한) 상을 받거나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 미친 듯이 작업을 했던 것 같아요.”
송이원은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라고 쭉 살고 있지만, 대만 국적자다. 증조부모가 어린 조부모를 데리고 구한말에 한반도로 넘어왔고 한국전쟁 때 북한 영토에서 남한 영토로 이주했다. 초등학교는 한국 어린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잠깐 중국에 다녀온 후부터는 고등학교까지 화교학교를 나왔다.
비상업적 소극장 연극은 공공지원금에 의존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문화예술 공공지원제도의 지원 요건의 제1항은 “대한민국 국적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연극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던 30대 초반의 송이원에게는 연극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제도적 인정’밖에 없었던 셈이다.
“2019년에서 2020년이 저의 연극 언어가 큰 전환점을 맞이했어요. 고주영 PD님이 소개해 참가했던 TPAM(요코하마국제공연예술회의, 현 YPAM)와 ADAM(The Asia Discovers Asia Meeting for Contemporary Performance) 덕이었죠. ADAM 프로그램에 참여해 타이완에 머물면서 홈리스 분들이 모여 계시는 어떤 공원에서 한 달 동안 리서치를 진행했어요. 메모와 노트로 작업스케치를 하면서. 그 전 작품들이 어떤 선을 타되, 거리를 두면서 구조에 대한 무력감을 조롱과 비웃음으로 표현하는 작업이었어요. 윤리적인 상대적 거리두기를 편하게 했었달까. 그런데 홈리스 커뮤니티를 리서치 하면서는 어떻게 그 안에 들어가서 무엇을 만들어야 할까를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런 맥락에서 2020년에 국립극단에서 한 작품부터 작업방식이 크게 달라졌죠. 뭔가를 완성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요.”
내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아시아의 공연예술 플랫폼에 송이원을 소개한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연극을 전공하지 않은 연극인, 대본이 아닌 공간성에 집중하는 연출 방식, 그리고 그의 교차성. 퀴어 연극인은 주위에서 쉽게(?) 찾을 수 있지만, 태생적으로 국적의 소수자성, 그로 인한 이중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은 예술창작에 있어서 독보적인 강점이며, 그래서 송이원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지금도 그 생각은 다르지 않다)
연극, 끝―여기에는 내가 필요없구나, 나도 안 해
그렇게 원하던 주류 연극계로부터의 ‘의뢰’ 작업을 통해 새로운 자신의 연극 언어를 한창 찾아나가던 중, 송이원은 연극을 불현듯 “그만뒀다”. 이원은 그 선언까지의 과정을 두 단계로 설명했다.
“2021년 연말에 마지막이 된 작업을 하던 중에 일단 몸이 너무 안 좋았어요. 공황도 시작되고. 끝까지 하고 싶었지만 제 상태가 작업을 함께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팀원들이 오히려 ‘같이 하기 어렵겠다, 빠지는 게 낫겠다’ 해줘서 연출이 빠지고 다른 멤버들의 공동창작으로 공연이 올라갔어요.
그리고 잠시 작업을 중단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돼서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2022년 여름, 대기업에서 주최하는 큰 연극상에서 연락이 왔어요. ‘연출님, 아직도 대만 국적이세요?’ 그런데 그 상에서 국적 때문에 배제된 게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어요. 그 이전에도 한 번 국적 이슈로 수상을 하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었었거든요.”
국적으로 인해 더더욱 필요했던 상과 제도의 인정을 너무도 명백하게 국적 때문에 두 번 놓치게 되었을 때의 박탈감과 소외감, 질투와 원망, 억울함은 미처 다 상상할 수 없다. “아, 여기에는 내가 필요 없구나. 나도 안 해”라는 어쩐지 나에게도 익숙한 감정.
“연극할 때도 극작, 연출뿐 아니라 기획, 매니지먼트를 다 했어서 온갖 일을 다 해봤던 것 같아요. 예산도 직접 짜고, 세금도 신고하고, 그러다 보니 엑셀도 다룰 줄 알고…. 출퇴근도 없이 꿈에서조차 작업 고민을 하던, 24시간 머릿속이 전쟁이던 때에 비하면 출퇴근이 있고 매달 월급이 들어오는 일, 괜찮아요. 사실 연극이 제일 힘들었어요(웃음). 사실 직장 일 같은 건 연극 작업 구상할 때와는 머리 쓰는 방식이 다른 것 같아요. 이제는 연출 회로도, 아이디어 회로도 끊긴 것 같기도 하고요.”
〈모두의 결혼〉 활동가를 제안받았던 당시 일하던 법률서비스 회사는 수익구조와 경제적인 면에서 장래가 보장되는 곳이었고, 이원은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고사를 한 채 직장생활을 하는데, 그 역사적인 ‘동성 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 소송’에서 승소 판결이 나왔다.
“그 소식을 듣는데 가슴이 뜨거워지더라고요. 나는 뭘 하고 있나. 이미 못하겠다고 얘기는 했지만, 마음은 이미 〈모두의 결혼〉에 가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제안을 했던 분에게 뒤늦게 다시 연락을 했죠.”
〈모두의 결혼〉에서 활동하다가 〈모두의 결혼〉을 포함한 여러 성소수자단체의 연대체인 〈무지개행동〉의 사무국 일까지 겸하게 됐다.
연극, 그 다음―동성혼 법제화될 때까지 이 일을 할 것
이원은 “연극은 완벽하게 과거형”이라고 잘라 말한다. 영화관 가는 건 지금도 좋지만, 공연장은 솔직히 좌석이 너무 불편하지 않냐며.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연극과 관련된 건 뭐든 보기가 싫었던 것 같아요. 친했던 동료들과도 단절됐던 시기가 있었고. 지금은 딱히 관심을 안 두고 살다 보니까 정보도 안 잡히고... 친한 배우나 연출이 하는 공연 가끔 보는 정도예요. 작년엔 딱 두 편 봤네요(웃음).
지금 생각해 보면 연극 작업할 때 저는 정말 막 쏟아냈던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것도 맡은 역할도 많았는데 서툴렀어요. 잘 해내고 싶어서 욕망과 악에 받쳐 있었던 것 같고요. 그걸 팀 사람들이 참 많이 배려해주고 받아줬구나, 내가 많은 걸 받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하는 작업을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주신 분들에게 좀더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도 들고요.
마지막 작업 때 책임을 끝까지 다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어서 작년 즈음부터 개인적으로 팀 사람들을 만나고 있어요. 이제라도 천천히 마무리를 해나가야죠. 퀴어퍼레이드 끝난 후에도 한 번 모임을 갖기로 했어요”
연극을 할 때는 궁금한 걸 작업 핑계로 파고들었지만, 지금은 궁금한 게 생기면 일과는 별도로 홀로 공부해야 한다. 지금 관심이 가는 건 종교. 성소수자 혐오세력의 종교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인을 넘어 집단적으로 믿음이 형성되는 과정과 방식, 그것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현실과 상징 등에 대한 궁금증이 있다고. 그리고, 그 다음의 미래는 아무 계획이 없다.
“어떤 연출이 사주 공부를 한다고 한 번 봐준 적이 있는데, 제가 84세부터 104세까지 연애운이 너무 좋다는 거예요. 일단 104세까지 산다는 게 좀 충격이었는데, 지금까지 순탄하지는 않았어도 묘하게 다음이 오면 살아내겠거니 싶기도 해요. 제가 경험도 경력도 없는데 활동가로 초대해준 사람들에게도 감사하고…. 그리고 84세에는 사랑을 받는다니 쓸쓸히 외롭게 죽진 않겠구나, 그런 막연한 희망이 있어요.”
[필자 소개] 고주영 : 몇몇 예술축제와 지원기관을 거쳐 2012년부터 공연예술 독립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안산순례길 프로젝트](2015~2019), [플랜Q 프로젝트](2018~2023), [연극연습 프로젝트](2018~현재)를 기획·제작했고, 하고 있다. 연극과 연극 아닌 것, 극장과 극장 아닌 것, 예술과 예술 아닌 것 사이에 있고자 한다. 2007년부터 〈일다〉에 일본 제휴 매체인 〈페민〉 기사를 번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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