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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면 아무 당이나 좋다?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는 정당과 상관없이 여성후보를 추천하고 있으며, 여성후보자 스스로 정당을 채택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에서 추천한 여성들을 각 당에서 공천해 주기를 요청하고 있으며, 공천된 여성후보들의 당선을 위해 각종 지원을 하겠다고 한다. 만약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에서 공천한 한나라당 여성후보와 열린우리당 및 민주노동당 남성후보가 경쟁을 하게 됐을 때 한나라당 소속 여성후보가 당선, 국회에 진출하는 것이 여성들의 이해에 맞는 것인가? 구체적으로 호주제 폐지 문제를 생각해 보자. 열린우리당은 지난 11월 호주제 폐지를 당론으로 정한 반면,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당론으로 정하는 것에 유보적이다.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는 호주제 폐지에 완전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조사에 의하면 호주제 폐지를 지지하는 의원은 지난 11월 말 현재 국회의원 총 272명 가운데 83명(31%). 이들 83명을 정당별로 보자. 한나라당은 149명 중 23명(15%), 민주당 60명중 20명 (33%) 열린우리당 47명중 35명(74%), 비교교섭단체 16명 중 5명(31%)가 호주제 폐지에 찬성하고 있다.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는 추천된 102인의 여성후보가 어느 정당에 가든지, 그들의 당선을 위해 각종 지원을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여성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가부장적 문화를 바꾸고자 한다면, 호주제 폐지에 더 우호적인 정당 소속 후보를 이기기 위해 여성계가 호주제 폐지에 반대하는 한나라당 소속의 후보를 지원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지금처럼 적지 않는 사안이 당론에 의해 표결에 부쳐지고, 개별 의원이 당론에 따라야 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여성정책에 있어 다른 정당보다 더 보수적인 정당에 속한 여성후보들을 지원하는 것이,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맞는 일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풀뿌리 여성유권자 운동 ‘에밀리 리스트’ 이러한 문제에 있어 에밀리 리스트(Emily's List) 운동은 중요한 시사를 한다. ‘초기 자금은 이스트(누룩)와 같은 것이다’(Early Money Is Like Yeast)라는 뜻을 담고 있는 에밀리 리스트(EMILY's List)는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정치후원금 모금하는 풀뿌리 유권자 조직이다. 1985년 미국에서 시작돼 이후 영국, 호주, 이탈리아로 확산된 에밀리 리스트 여성정치참여 운동은 엘리트 여성정치인들의 정치 진출과 여성유권자 운동이 잘 결합된 운동이다.에밀리 리스트가 창립되기 전에는 민주당에서 여성 의원이 미국의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전례가 없었다. 또한 여성이 큰 주에서 주지사가 된 적이 없었으며 민주당 여성 의원의 수는 12명으로 감소했는데 이는 전체 의원 435명 중 3%가 안 되는 숫자였다. 여성들이 고위 정치 관직자가 되기에는 장벽이 많다는 현실을 절감한 이들은 좀 더 많은 여성들이 하원, 상원, 주지사로 선출되게 하기 위해 에밀리 리스트를 창립했다. 1986년 25명의 여성들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민주당 후보들을 위해 돈을 기부하는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모였다. 이들은 후보자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여성들이 자신이 선택한 여성 후보들에게 직접 돈을 기부할 수 있도록 하는 기부자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이후 에밀리 리스트는 미국의 경우 상원, 하원, 그리고 주지사 선거 및 예비선거에서 여성 후보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해왔다. 이 재정적 지원은 특정 재단이나 기금을 통해서 하는 것이 아니며, 정부의 지원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수만 명의 여성 유권자들을 후원자로 조직하여 이루어진다. 여성유권자 개인으로 하여금 그들이 후원하고 싶은 여성 후보 2명을 선정하여 후원한다. 후원에 참여하는 여성유권자 1인당 평균 후원 금액은 95불 정도. 소위 ‘여성의 해’라고 불리던 1992년에 에밀리 리스트는 4명의 새로운 pro-choice(낙태권리 인정) 민주당 상원 의원과 20명의 새로운 의원을 선출하는 데 일조했다. 에밀리 리스트가 시작된 이후 아홉 번의 선거가 있었는데, 그 동안 에밀리 리스트는 11명의 여성 상원의원과 55명의 하원의원, 7명의 주지사를 당선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회원 수는 600% 이상 증가했고, 2만 3천명의 회원들이 후보자들에게 6백2십만 달러가 넘는 돈을 기부했다. 에밀리 리스트는 의회 진출을 추구하는 여성들을 위한 가장 큰 재정적인 자원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에밀리 리스트가 지원한 여성의 3분의 1에 가까운 숫자가 유색 인종 여성이다. 진보정당, 급진적 마인드의 여성후보 지원 에밀리 리스트의 재정 지원을 받고자 하는 여성 후보는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민주당 후보일 것, 둘째 낙태 합법화에 찬성하는 입장일 것. 에밀리 리스트 여성 정치 참여 운동은 정치적 이념과 정책 방향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에밀리 리스트는 진보 정당에서 급진적 여성 정책을 지지, 옹호하는 후보를 지원한다. 미국의 경우 여성운동의 핵심 사안인 낙태 합법화 문제가 가장 중요한 정책이며, 이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이후 의정활동이나 행정을 해 나갈 여성을 지지하는 것이 에밀리 리스트의 방향이다. 이 같은 성격은 2004년 현재, 에밀리 리스트가 집중적으로 펼치고 있는 운동 중 하나가 ‘부시 패배시키기’(defeat George W. Bush) 운동이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에밀리 리스트는 민주당 여성 후보를 지원하지만, 정당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돼 있다. 이는 호주 노동당 여성후보를 지원하는 호주 에밀리 리스트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경우와 달리 호주는 단순한 후원자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회원으로 조직한다. 회원 가운데 적지 않는 수가 노동당원이 아니지만 에밀리 리스트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여성유권자들을 변화시키는 운동 1994년 에밀리 리스트는 여성 후보를 위해 돈을 모으는 활동뿐 아니라 그들이 강력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여성 유권자들의 힘을 결집시키는 활동을 시작했다. 최초의 ‘WOMEN VOTE’ 프로젝트가 캐롤라이나에서 시작됐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에밀리 리스트는 여성유권자들을 움직이는 것이 운동의 큰 축을 이루고 있다. 1996년 ‘WOMEN VOTE’ 프로젝트는 여성 유권자들을 결집시키고 여성 유권자들의 선거를 유도하기 위한 장기 프로그램으로 전화, 이메일 등을 통해 여성 유권자들과 접촉했다. 31개의 주에서 ‘WOMEN VOTE’ 프로젝트가 실시됐다. 2백7십만 명의 여성 유권자를 대상으로 7백5십만 통의 메일과 5십만 통의 전화를 통해 선거를 하도록 유도했다. 또 에밀리 리스트는 여성유권자들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 모니터링(Women's Moniter)을 진행해 대중과 언론에 여성 유권자들의 태도에 관한 기준과 자료를 제공했다. 참여와 지지를 기반으로 해야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는 에밀리 리스트를 모델로 활동을 구상했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지만, 사실 둘은 운동의 시작부터가 전혀 다르다. 에밀리 리스트는 일단 아무 정당이나 지원하지 않을 뿐더러 철저히 유권자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이뤄진다. 에밀리 리스트는 국회에 보낼 ‘여성 리스트’를 만드는 활동이 아니다. 급진적인 여성이슈를 제기하는 여성 민주당원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풀뿌리 유권자 운동인 것이다. 워낙 여성 국회의원의 비율이 낮기 때문에 유권자의 힘을 모아내기 보다 ‘어느 정당이든 상관 없이 원하는 정당으로 더 많은 수의 여성들이 가면 된다, 그러면 남성 중심의 정치 구조가 변할 수 있다’고 보는 것, 여성 숫자 채우기 식으로 이뤄지는 현 한국의 여성정치세력화 논의나 활동은 지나치게 천진난만한 생각일지 모른다. 현재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에밀리 리스트 운동의 역사나 성과는,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위해서는 섣부른 여성 리스트 만들기가 아니라 여성 유권자들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작업이 무엇보다 치밀하게 선행돼야 함을 강력히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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