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어느 날 윤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진행하던 심야 에프엠 프로그램에서 노영심이 부른 인상적인 노래가 있었다. ‘그리움만 쌓이네’. 노영심의 불안한 음정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 노래가 가지는 풋풋함 때문이다. 단순한 가사가 주는 풋풋함과 피아노 연주의 고전적이면서도 단정한 연주가 인상적인 노래였다.이후에 그 곡이 바로 여진(본명 남궁은영)이란 가수의 곡임을 알게 됐다. 여진은 어쩌면 노영심의 직계 선배로서의 역할 모델이 되어줄 법한 가수다. 흔히 말하는 1세대 싱어송라이터로서도 그렇고, 성악과 출신의 클래식을 공부한 엘리트 음악인이면서 대중음악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 그리고 둘 다 음악을 만드는 기본 악기가 피아노다. 여진의 음악은 아련하다. 별스러운 기교가 없는 솔직한 목소리와 편안한 음정, 조금 오래된 듯하지만 여전히 세련된 멜로디가 그렇게 느껴지게 한다. 그리고 여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갖는 또 하나의 분명한 인식은 그가 ‘음악 선생님’이라는 것이다. 나 역시 여진의 음악을 들을 때면 음악시간이 생각난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합창단에서 활동했다. 그래서 남들보다 음악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많다. 점심시간마다 연습을 하러 다녔으니 말이다. 우리가 불렀던 대중가요 중에는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와 노사연의 ‘만남’, 정태춘과 박은옥의 곡들, 그리고 김도향의 ‘바보처럼 살았군요’ 등이 포함돼 있었다. 그때 선생님들이 가르쳐주시던 “이 곡은 이렇게 불러야 돼, 이 감정은 이렇게 살려야 돼, 이 음정은 이렇게 잡아 봐”하던 그런 저런 이야기들이 여진의 창법을 들을 때마다 생각난다. 그래서 노영심의 ‘그리움만 쌓이네’가 내 귀를 번쩍 뜨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우습게도 군것질 거리로 맵고 짜고 달콤한 것들만 먹다가 문득 생각나는 담백한 크래커처럼. 하지만 사실 여진에 대한 자료들을 찾으면서 그에 대해 살펴보려는 시도는 힘들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정보는 정말 드물기 때문이다. 여진은 간간히 음반 하나씩 발표하며 음악교사로 지낸 ‘조용한’ 가수다. 질리지 않는 ‘맨살의 감성’ 여진은 1979년 대학을 졸업한 직후부터 1995년까지 음악교사로 재직했고, 2004년부터는 동아방송대학 영상음악계열에서 보컬(성악)을 가르치고 있다. 여진이 본격적으로 가수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MBC라디오 창작가요제에 ‘꿈을 꾼 후에’와 ‘그리움만 쌓이네’가 당선이 되면서부터다. 그러나 클래식 학도로서 대중음악에 관심을 보이는 것에 집안의 반대도 있었고, 음반이 나올 무렵 교사 발령이 나 가수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힘들었다고 한다.그는 1983년 음악교사로 재직하면서 1집 <여진의 노래 모음>을 냈고, 1995년에 2집을 발표했다. 그리고 5년의 공백 이후 -노영심의 리메이크로 자극을 받은 듯- 2000년에 3집을 냈다. 와중에도 틈틈이 유익종과 이은미의 앨범작업에도 참여하며 음악활동을 꾸준히 해왔고, 베스트 앨범 <꿈을 꾼 후에>도 나왔다. 그의 음악은 아무리 슬픈 곡이라도 그 서정적인 목소리와 선율로 인해 풋풋한 초록색의 느낌을 주고 단정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얼굴 없는 가수로 조용히, 그리고 간간이 앨범을 냈음에도 무슨 힘을 가진 것인지 그의 음악은 끊임없이 불려 나온다. 노영심과 레이지본이 ‘그리움만 쌓이네’를, 이정봉이 ‘꿈을 꾼 후에’를 리메이크했고, 조영남이 ‘우리 사랑’을 그와 함께 불렀다. 여진의 음악엔 나른한 오후 교정의 평화로움 속에 감추어진 쓸쓸함 같은 느낌이 깃들어 있다. 그런 서정성이 그의 음악을 우리 곁에 머물게 한다. 여진이 가진 힘은 그 특유의 음악을 하는 방식에 있다. 음반을 만들고, 프로모션을 하고 끊임없이 공중파와 케이블의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는, 우리가 익히 보는 가수들과 비교해봤을 때 여진은 아주 조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짧은 생명력과 비교해 여진은 여전히 존재한다. 1980년대 음악인으로서의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최근 여자가수들이 대중음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시도하는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5년의 공백 이후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새 앨범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것, 그건 분명히 그가 가진 ‘저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진이 2000년에 발표한 3집의 변화는 의외로 크다. 단순한 발라드 가사도 시적으로 들리게 하는 그의 서정성은 여전하지만 1집과 2집의 ‘꿈을 꾼 후에’나 ‘그리움만 쌓이네’, ‘목련꽃’ 등을 기억하다 듣게 된 3집은 조금은 충격이다. 여진의 음악들을 오후 4시와 6시 사이 에프엠 음악프로그램에서 자주 들었던 탓인지, 그런 종류의 ‘흘러간 명곡’속에 포함시켜 기억했었다. 그러나 3집의 ‘널 떠나 보내고’나 ‘우리 함께 있으면’, ‘새로운 시작’, ‘너의 그 향기로’, ‘환희’등에서 보여준 세련된 발라드는 장나라 같은 대표적 신세대 발라드 주자의 감각에 비할 바가 아니다. 다섯손가락 출신 최태완을 비롯한 김형범, 이종식, 김남균의 편곡과 더불어 여진의 연륜이 묻어 나오는 편안하고 힘 있는 노래는 더더욱 그렇다. 3집은 바로 여진이란 가수가 돌아온 것이 아니라 ‘존재했음’을 증명해주는 앨범이다. 그의 음악은 ‘유행’과는 거리를 두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대를 앞서가는 진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은 유효한 자리를 점유한다. 정직하고 포장되지 않은 맨살 같은 감성은 언제 다시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한 켠에 꽂아두면 언젠가는 손이 갈 음악들이다. 생활과 음악이 공존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본다. 여진은 클래식 음악 전공자긴 하지만, 그가 대중음악을 해온 그 길은 여성음악인들이 승부수를 던질 수 있는 방식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여진은 완전히 자신의 모든 생활을 걸고 프로페셔널한 가수로 활약하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음악인으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여성음악인이 주류 음악계에 접근하는 방식이 단지 아름다운 외모와 젊음만이 아니라, 여진처럼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신의 음악적 영역을 다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누군가 여진이 음악교사란 직업 때문에, 그리고 결혼생활로 인해서 좋은 음반을 낼 능력이 있는 가수임에도 우리 곁에서 증발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때 가요계를 풍미했던 여자 가수들-이지연, 양수경, 안혜지, 장혜진, 원준희, 리아 등-중에는 결혼과 더불어 가요계를 떠나 우리를 안타깝게 한 이들도 있다. 결혼이나 연애가 여성음악인들의 음악활동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닌가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어떨까 한번 상상해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말 좋을 텐데. 어쨌든 그건 여진에 대한 이야기로 적합한 말은 아니다. 여성음악인들에게도 생활과 음악이 함께 공존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여진이 보여준 역할이다. 또 그가 만든 음악과 특유의 순수한 목소리가 현재에도 여전히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면, 그것이 1세대 싱어송라이터이자 고급스런 선율의 대중음악가 여진이 음악계에서 갖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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