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남산 타워가 보이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오르다 보니 어느덧 ‘남산동굴’에 이르렀다. 그녀가 1달 전부터 자발적 백수생활에 돌입하게 됨으로써 ‘남산동굴’이 되었다는 그 곳은 56년이라는 세월의 흔적을 보듬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그 집 대문을 들어서서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계단을 오르면 동굴의 심장부가 나타난다. 쥐 잡이로 채용되었지만 그 일보다는 잠자는 일을 더 즐기는 미선씨(그녀의 고양이)가 곁에서 꼬박꼬박 조는 동안 기자는 기숙씨의 정성 어린 차 대접을 받으며 차 향에, 또 그녀의 맛깔스런 이야기에 취했다.
백수라지만... 그녀는 자신을 백수라고 소개한다. 만화책을 보며 집 안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라고 하지만, 아닌 듯 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뿐. “올해 1년 동안은 동양화, 한국문화에 대한 공부를 하려고 해요. 그래서 단청이라든가, 아니면...... 박물관 대학에서 공부도 하고 있거든요. 그 다음에 서예하고, 사군자하고, 단청하고. 대부분 그런 일을 해요. 산에도 가고. 북한산이나 서울근교에 있는 산 있잖아요. 돈이 없는 관계로 멀리 갈 수는 없고(웃음).” 그녀의 수입은 특수아동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일을 통해 받는 월 40만원이 전부다. 하지만 두 달 전에는 누가 그녀의 그림을 팔아준다는 말에 뉴욕에 가서 그림을 팔고 왔고, 그 전에는 인사동에서 찻집을 1년간 운영했다고 한다. 쉬기 위해서 제주도에 갔다가 농장에서 풀을 뽑고 있는데 인사동 찻집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와 3개월 만에 제주도 생활을 접고 상경해 덥석 찻집을 시작해 버린 것이다. “황당하게도 ‘재미있겠다’고 시작했지만… 아무튼 1년 재미있게 놀았어요. 하지만 쉬는 날이 없었어요. 돈도 못 벌었지만 돈보다는, 그 일이 아닌 것 같았어요. 일단 젊은 나이에 시간이 너무 아까웠어요.” 그녀에게서 찻집은 ‘문 열린 감옥’이었다고 한다. “먹고 살 돈이 있어야 하지 않냐 하고 주변 사람이 얘기도 했지만, 딱 접고 갔지요.” 한 때는 전세비 천만 원을 마련하기 위해 미술학원에서 아이들도 가르치고, 실업자 교육을 받아 구청에서 공무원으로 일도 하는 등 ‘쓰리 잡(three jobs)’으로 바쁘게 뛰어다니기도 했다. 또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에는 학교 앞에서 약 석 달간 떡볶이 장사를 하기도 했단다. 떡볶이를 좋아하는 그녀의 오랜 소망이었는데, 생계벌이로 삼고 싶지는 않았기에 졸업 전에 잠시 해 본 것이라고 했다. 절망으로 여행을 떠나다 그런데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그녀는 사실 지금 ‘그림 그리기를 즐기는’ 화가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엄마 몰래 집 근처 미술학원을 찾아가서 혼자 등록하기도 했고, 중학교 때는 고3들과 밤샘 그림도 그렸으며, 고등학교 때는 절로 혼자 스케치하러 다니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한 때는 그림을 접으려고 했었다고 한다. “예고 출신인데 사회의 어두운 면을 많이 봤어요. (웃음) 저는 그림을 너무 좋아했고 즐거워했기 때문에 (중략) 한 순간에 절망감이 느껴졌어요. 대학 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중략) 대학도 6년인가 7년인가 다니게 되었죠.” 그녀의 대학시절이 그렇게 길어진 것은 해외 배낭여행을 위한 여러 차례의 휴학 때문이었다. “사막에 너무 가고 싶은 거예요. 사막에 가면 아무 생각이 안 나요. 그 어떤 곳을 가더라도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곳은 사막밖에 없었어요. 1년 동안 사막만 그렸어요. 그러다 결국 사막에 갔지요.” 대학 내내 계속되었던 절망 속에서 그녀는 사막을 그리러, 아니 그림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대학교 3학년 가을, 1년 동안 홀로 중국, 몽고, 베트남, 캄보디아, 네팔, 인도를 가로지르는 아시아 종단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어떤 테마를 가지고 있었느냐면 ‘마음으로 하는 대화’라고 해야 하나. (중략) 최초의 그림을 시작했던 그런 방식으로......” 그렇지만 말을 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며 대화를 나누는 여행은 실패했다. 하지만 여행 후, 특히 네팔여행 이후 그녀는 ‘진짜 많이 변했다’고 했다. 취미생이 진짜 예술인 그녀는 행복해질 수 있는 조건을 바로 네팔에서 얻었다. 잘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그를 통해 남들과 즐거워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또 진정한 스승을 찾은 것이다. “네팔에 갔는데 돈이 없었어요. 목걸이 공장에 취직해서 일을 했어요. 공동체 생활인데 네팔 남자애들이랑 먹고 자고 살았어요. ‘교육이라곤 받아본 적이 없는 그 아이들을 제가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생각했어요. 그림밖에 없더라고요.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중략) 땅에도 그리고... 걔들도 돈이 없고, 나도 돈이 없고. 그러나 그림이라는 것은 즐겁게… 그러면 완전 생각이 변해요. 다시 내가 처음 그림을 그렸을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되거든요.” 한국 예술계의 어두운 면을 보고 그림을 포기하려고 했던 것이 비겁하게 도망친 것이었다는 것, 그림을 통해 자신이 얼마든지 남들과 더불어 즐거워질 수 있다는 것, 그녀에게 있어 남들과 다른 재주가 있다면 그림과 관련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저는 여행을 통해서 스승을 만나고 싶었어요. 메시아 역할을 하는 어떤 스승을 만나고 싶었어요. (중략) 그림을 안 그릴 건데 무엇으로 살아야 할 건지 들어야 될 거 아니에요. 네팔에서 아이들이랑 놀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이들이 저를 통해서 밝아지는 것을 보면서, 쟤네 들은 나를 선생이라고 생각하는구나. 그때 내 가족이 진짜 스승이었구나, 그때 알았어요. 왜 이렇게까지 먼 데 와서 알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진정한 스승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데, 왜 몰랐을까?” ‘여자도 남자처럼 일하는 시대’라며 시골에서 자란 그녀를 도시에서 교육을 받도록 해 주신 할아버지, 40세가 넘어 자녀 뒷바라지를 위해 뒤늦게 미용 일을 배워 미용사가 된 어머니, 항상 부딪치고 아웅다웅 하지만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는 아버지, 끊임없이 그녀를 지지하고 인정해 준 형제, 자매들, 이들 모두가 그녀에게는 소중한 스승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이제 잘 알고 있다. 이러한 깨달음들은 그녀를 소위 ‘작은 그림’을 그리는 즐거운 ‘취미생’ 화가로 이끌었다. “내가 생각한 예술인이라는 것은 이 시대의 취미생이구나, 취미생이야말로 진짜 예술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저는 취미생이 되지요.” 하지만 대학교수들은 그녀의 ‘작은 그림’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에 맞서 그녀는 2003년 졸업작품으로 무지무지 ‘큰 그림’을 제출했었다며 웃는다. 그녀는 기자에게 자신의 ‘작은 그림들’은 보여주었다. 느리게, 천천히, 그리고 행복한 유목민으로 여기 미처 다 적지 못한 그녀의 재미난 인터뷰 내용들, 그 이야기에 도취되어 듣다 보니 5시간이 훌쩍 지나고 있었다. 밤을 지새도 끝나지 않을 이야기 같았다. 정말 자신감 넘치는 그녀, 너무 행복하단다. 그 행복은 그녀의 자신감에서 비롯되어 보였다. ‘돈도 없고, 인물도 안되고, 몸매도 안되지, 학력도 안돼, 기술도 없어, 인간성이 너무 좋은 것도 아니고 연줄이 너무 좋은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뭐가 자신이 있나?’는 친구의 질문에 그녀는 나름대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단다. “진짜 뭐지? 뭣 때문에 자신감이 있는 거지? 자신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즐겁게 살 수 있을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느리고, 천천히 살아가려고 하고, 결혼도 자연스럽게 언젠가 하게 되리라 생각한다고. 하지만 절대로 정착하지 않고 내내 유목민으로 살고 싶다는 그녀가 정말 자유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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