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이 유행이다. 정치권의 다툼을 불식하고 서로 살리자는 의미로 ‘상생’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상생’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상생 페미니즘’. 그런데 이 용어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의구심이 생긴다. ‘상생’이 서로를 살리자는 의미라면, 그때 ‘서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린다는 것은 어떤 뜻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중략) 이들은 여성의 활동 영역만을 연구하는 ‘파워 페미니즘’에서 벗어나, 남성을 포함한 가족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상생 페미니즘’을 시도하고 있다.” ([이젠 "상생 페미니즘"이다] 대담-가부장적 남성성의 폐해, 세계일보 2004-05-31) 세계일보는 ‘상생 페미니즘’을 타이틀로 걸고 정유성 교수(서강대 교양학부)와 권혁란(계간지 <이프> 편집위원)씨의 대담을 실으면서 ‘상생 페미니즘’을 언급했다. “남성을 포함한 가족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여기에서, 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파워 페미니즘’을 들고 있다. 기존의 페미니즘이 여성의 활동 영역만을 연구하는 ‘파워 페미니즘’이라는 것이다. 세계일보는 ‘상생 페미니즘’을 기획하면서, 한국 페미니즘의 역사 속에서 한번도 등장한 바 없는 ‘파워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기존의 페미니즘이 ‘남성을 포함하지 않고’, ‘여성만 행복해지려는’ 페미니즘이며, ‘파워’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남녀간 힘 대결을 해온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 페미니즘이 공존을 거부했나 "여하튼 그의 말을 들으면 한국의 페미니즘은 남녀(이 말은 ‘여남’으로 바꾼다) 공존이라는 새 단계로 접어 들 모양이다. 이제 밖에서 일하는 남자들의 짐을 더는 것이 곧 여자들의 짐을 더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는 것이다. 동시에 여자의 괴로움을 더는 것이 곧 남자의 괴로움을 더는 것이라는 사실도 함께. '이제 남자라면 무조건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포용하는 페미니즘이 돼야 해요.'" ([한국 초대석] '이프' 발행인 엄을순 인터뷰, 주간한국 2004-02-25) 주간한국과의 인터뷰에서 엄을순 <이프> 발행인은 보다 직접적으로 “남자라면 무조건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포용하는 페미니즘”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주간한국은 이를 “남녀공존이라는 새로운 단계”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제는 남자를 적으로 삼지 말고 서로 포용하는 ‘공존’을 지향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언제 페미니즘이 “남성을 무조건 적”으로 보고 “남녀 공존”을 거부했는가. “남자를 적으로 보지 말자”는 설득(?)은 익숙한 레퍼토리다. 주로 남성들이 ‘역차별’을 호소할 때, 또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을 이기적인 여자들의 싸움으로 폄하할 때 심심치 않게 등장해왔다. 이런 주장은 기본적으로 ‘페미니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제기해왔다. 페미니즘은 남녀가 동등한 권리를 인정 받고 살아가야 한다고 역설해왔는데, 바로 그 동등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권력 쟁탈’ 정도로 왜곡시켜 왔다. 페미니즘은 권력쟁탈이 아니라 권력해체를 주장한다. 남성과 여성, 또한 제3의 성이 ‘공존’하는, ‘상생’하는 사회를 지향해왔다. 모든 사람들의 인권이 보장 받는, 모두가 동등하게 살아가는 사회 말이다. 그러나 오랜 기간,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놓여있지 못했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뿌리깊은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기존 사회의 시각이 아닌 ‘여성의 시각’이 필요함을 역설해왔다. 왜 여성은 끊임없는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일하지 않는 존재’로 인식되는지, 왜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취업, 승진 순위에서 늘 밀려나는지, 왜 여성은 강간을 당하고도 그 불합리함을 소리 내 말하지 못하는지, 왜 여성의 몸은 끊임없이 사고 팔리는지, 이런 문제제기를 통해 가부장제의 억압을 말하고, 드러내고, 바꿔나가는 작업을 해 왔다.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는 구호를 “남성을 적으로 아는 편협한 시각”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다분히 남성중심적인 태도다. 성 평등을 위해 사회인식과 구조의 변화를, 또 남성의 변화를 필요로 하고 촉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여성운동에 남성들이 참여하도록 인식 변화를 독려하는 것과, ‘이기적인 페미니즘을 버리고 함께 가자’면서 남성중심적 역풍논리에 동조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남성인맥과 손잡아라? “지난 10년간의 우리 여성정책이 제도적인 면에서 많은 진전을 보았다고 하지만,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나 관행은 여전히 도처에 남아 있다. 특히 지구화가 수반한 대량실업과 경제위기는 남성의 상대적 박탈감과 더불어 사회의 보수적 분위기를 강화하고 있고, 성장담론이 사회에서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다. 이런 반발적 반응은 우선 여성정책의 발전 속도는 유례없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를 공유해야 하는 남성 집단의 동의와 지원을 통한 것이기 보다는 정부의 정책으로 추진되거나 여성운동의 압력에 의해, 혹은 득표율을 높이기 위한 정치세력의 전략으로 강력하게 추동 되고 있는 데서 기인할 것이다.” 지난 달 1일,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유엔(UN) 세계여성대회 이후 10년을 평가하는 심포지엄 ‘한국의 여성정책 10년, 돌아보며 내다보며’ 자리에서 한국여성단체연합 정현백 상임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현백 대표는 남성들의 역풍에 대해 “남성집단의 동의와 지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면서, “향후 10년의 여성정책은 ‘남성과 함께 가는 여성정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성계가 40년 동안 진행한 운동”에 대해 남성들이 여전히 동의하고 있지 않은 이유를, 여성운동이 그 동안 남성 집단의 동의와 지원을 통하지 않고 압력을 행사해왔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여성운동은 처음부터 남성들의 동의와 참여를 요구해왔다. 남성집단이 여성운동에 동의와 지원을 하지 않은 것은 여성운동 탓이 아니라, 변화의 시기에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들의 가부장적 인식과 움직임이 반동적으로 강하게 돌출되는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미 여성운동에 동참하는 남성들이 있어 왔고, 성 평등한 사회를 바라는 남성들도 있다. 남성폭력을 남성들이 막자면서 캐나다에서 시작돼 세계적으로 전개된 ‘하얀리본 캠페인’이나 최근 진행 중인 ‘성매매 안 하기 선언’ 등 여성문제 해결을 위해 남성의 참여를 유도하는 운동도 확장되고 있다. 여성운동은 이들을 페미니즘과 함께 하는 ‘동지’라 칭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남성들과 함께 할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려가 되는 부분이 있다. 정현백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는 “남성은 양성평등에 주요한 자원에의 접근이나 의사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양성간의 관계나 역할 태도를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집단”이며, “공공자원이나 경제력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여성의 노동시장에의 동등한 참여를 위해서도 남성의 역할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즉 가부장제 사회에서 보다 많은 권력을 갖고 있는, 중요한 자리에 있는 ‘남성’을 설득해야 여성들이 그 구조 안에 들어가기 쉽다는 얘기다. 이러한 논리는 자칫 무분별한 ‘남성인사 끌어들이기’로 이어질 수 있다. 여성단체 관계자가 공적인 자리에서 태연하게 “남성인사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거나, “남자들 따라다니는 작업을 한다”는 식의 언설도 서슴지 않는 현실이다. 과연 남성인맥 쌓기가 ‘남성과 함께 가는’ 여성운동인가. 여성운동이 운동의 방향에 동의하고 행동을 같이 하는 남성보다, ‘한 자리’하고 있는 남성’인맥’을 중요시하게 되면 그 후유증은 감당하지 못할 결과를 부를 수도 있다. 여성정치인이 싫다는 ‘GS리더’ “김 교수(김광웅)는 “이분법의 논리에서 벗어나 ‘묘합의 정치'를 해야 한다”면서 “여성정치인들은 모름지기 남성을 끌어안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여성의 시각으로 여성의 논리만 주장하는 정치인은 이 나라 정치 발전에서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여성은 남성의 시각으로, 남성은 여성의 시각으로, 더 나아가 여성과 남성이 하나인 시각으로 보도록 노력하자'는 것이다. (중략) 김춘진 열린우리당 의원은 “페미니즘이 대립적으로 가면 결국 남성적인 대립구조에 빠지는 것”이라며 김 교수의 강연에 동감을 표했다.” (“여성·남성 하나 된 시각이 상생이다”, 여성신문 785호 2004-07-01) 지난해 12월 발족한 'GS(Gender Sensitive: 성인지적) 리더의 첫 월례 포럼에서 '나는 여성정치인이 싫다'라는 주제로 김광웅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가 강연한 내용이다. ‘GS 리더 포럼’은 양성평등문화를 건설하겠다는 사회 각 분야 리더들의 모임이다. 그야말로 ‘한자리 하는’ 리더들의 모임이다. 그런데 정작 김광웅 교수는 페미니즘에 대해 무지한 발언을 하고 있다. 여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남성을 배척하는 일인가. 여성의 논리만 주장하는 정치인은 정치 발전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가? 이런 사람들의 발언 때문에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바라볼 수 밖에 없는) ‘페미니즘’은 손쉽게 남성을 배척하는 이기적인 여성들의 주장으로 둔갑해버린다.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페미니즘은 당연히 여성의 시각을 요구한다. 기존의 사회가 남성의 시각으로 구조화됐고 운영되어왔기 때문이다. 가령 서울대 신교수 성희롱 사건 전까지 ‘성희롱’은 존재했지만, 남성의 눈에 보이지 않았고 따라서 명명되지 못했으며 문제화되지 않았다. 여성의 시각을 견지한다는 것은 여성의 논리만으로 편협하고 이기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사실들과 ‘말해지지 않았던’ 경험들을 보고, 말하고, 이슈화하는 것이다. 김광웅 교수는 이 같은 사실을 묵인한 채 여성정치인들에게 남성을 끌어안으라고, 이분법의 논리에서 벗어나 ‘묘합’의 정치를 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이처럼 페미니즘에서 ‘상생’과 ‘연대’를 논하는 이들의 논리를 들여다보면, 페미니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바탕에 깔려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된 편견을 밑바탕으로 ‘상생’과 ‘연대’를 논하고 있다. 명확히 짚어야 할 것은 이처럼 ‘상생 페미니즘’을 마치 새로운 경향인 것처럼 포장하면서 기존의 페미니즘을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다. 새롭게 등장한 ‘상생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을 욕하고 싶어하는 가부장적인 사람들의 진부한 대안일 뿐 아니라, 무분별한 남성인맥을 통해 변화를 추동할 수 있다고 믿는 그릇된 연대의식의 발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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