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없는 열정으로

가극단 ‘미래’ 단원 임현경

황보신 | 기사입력 2004/08/29 [21:13]

겁 없는 열정으로

가극단 ‘미래’ 단원 임현경

황보신 | 입력 : 2004/08/29 [21:13]
정신 없이 복잡한 서울 거리에서 만난 임현경씨는 주위 풍경을 무색하게 할 만큼 차분해 보였다. 그녀가 안내한 찻집도 조용하고 편안한 곳이었는데, 순간순간 터져 나오는 그녀의 시원한 웃음소리만이 잔잔한 이야기의 흐름을 잠깐씩 끊어놓았을 뿐이었다.

“문화의 힘을 믿어요”

겉으로 봐선 조용해 보이는 임현경씨는 바로 가극단 단원이다. ‘가극’이 무엇인지 물어보면서 인터뷰가 시작됐다. “가극이라는 말이 노래하고 극하는 거잖아요. 뮤지컬이랑 비슷한 개념이에요.” 굳이 뮤지컬과 구분해서 ‘가극’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는 “노래하고 극하는 것은 똑같지만 우리의 정서로 우리 얘기를 풀어나가고 싶어서”라고.

그녀가 가극을 시작한 것은 올 해 2월 가극단 ‘미래’에서 일하면서부터였다. “가극이란 걸 이전에 해 본 적은 없었고, 학교 다닐 때 풍물패나 잠깐씩 마당극을 아주 낮은 수준에서 해 본 적은 있었죠.”

그런 그녀가 이십 대 후반의 나이에 어떻게 가극을 하게 되었을까. “저도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스스로에 대한 의문인데요(웃음), 풍물 치면서 문화적인 것의 힘을 느꼈어요. (중략) 그런데 타악기 소리로 하는 것이 한계가 큰데, 노래는 가사를 전달할 수 있잖아요? 노래보다 더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극인데 풍물보다, 노래보다 극이 더 많이 말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하게 됐죠.”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어려워요. 제가 음치거든요. 주변사람들이 니가 가서 노래를 하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할 때면 저도 올바른 길을 가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요, (중략) 제가 이 나이 먹어서 교사 직을 그만두면서까지 이렇게 문화활동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생각을 한 건 단순히 그 자체가 재미있어서가 아니에요. 그것으로 뭔가 해보고 싶다는, 그냥 예술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을 해보고 싶다는 고민에서….”

마침 대학시절 풍물을 하다 알게 된 사람들이 작년에 뜻을 모아 가극단 ‘미래’를 만들었고 그녀는 거기에 동참했다. “노래연습이 힘들긴 한데(웃음), 그래도 그렇게 선택했던 게 잘했던 것 같아요. 역사가 깊은 마당극단에 가면 배울 수 있는 것이 참 많고 충분히 자리 잡힌 시스템이 있어서 체계적으로 배울 수도 있겠지만, 내가 거기에서 만들어가기에는 약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가극단 미래는 내가 만들어 갈 수 있는 여지가 굉장히 넓은 것 같아요.”

대학에서 풍물패를 택하다

그녀의 대학 때 전공은 영어교육. “영어는요, 어릴 때부터 재미있었고 그냥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어요.” 게다가 교사이신 아버지가 세 딸 중 맏딸인 그녀가 가업을 이어주길 바랬기에 영어교육을 택했다고.

지방에서 고교시절을 보낸 그녀, 모범생이었던 그녀가 서울로 대학진학을 하면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단다. “제가 너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중략) 웬만큼 뛰어넘을 수 있었다면 뛰어넘어 보려고 했을 텐데 그때 당시에는 그 벽이 너무 높은 거예요. 과연 내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중학교 때부터 영어로 밥 벌어 먹고 살아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너무 큰 충격이었어요.”

게다가 아버지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기대-그녀가 교사되길 바라는 것, 딸만 셋인 집에서 맏딸이 아들 노릇해야 한다는 기대-로 그녀는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반항적인 기질이 있나 봐요. 어렸을 때부터 아빠가 계속 ‘너는 선생님 해야지’라고 말씀을 하셔서 원서 쓸 때는 영어교육과를 썼는데, 대학 가면서 아빠에 대한 스트레스가 구체화되고 내가 선생님이 되고 싶다, 아니다를 판단하기 전에 주위의 스트레스 때문에 그것이 그냥 싫어지는… 그런 게 많았어요. ‘선생님은 정말 안 할 거야’라고 생각을 했고, 임용고시를 볼 생각도 안 했고. 만약 선생님을 한다면 그냥 경험, 혹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으로 생각을 했죠. 나쁜 생각이죠. 애들의 입장에서 보면.”

결국 그녀는 영어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고 풍물패 동아리에 가입했고 그것에 빠졌다.

영어공부를 위해 호주로 떠났지만

그런데 졸업할 즈음 풍물을 하면서 정리했다고 생각했던 영어에 대한 미련이 다시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어렸을 때부터 계속 해 온 것이라 크면 영어 잘 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생각해 왔는데 제가 그렇지 못한 게 너무 화가 나고 기가 막히고 미련이 계속 남더라고요.”

“졸업 후 자취 집 보증금 500만원을 빼가지고 호주에 갔어요. 목표가 5백만으로 1년 잘 버티기, 영어 잘해서 돌아오기였죠. 돈이 없으니까 남들처럼 어학연수를 갈 수 없었고, ‘워킹홀리데이’ 비자라고,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학원도 3개월 다닐 수 있는 비자가 있었어요.”

처음 호주에서의 한 달 간은 자연보호 자원봉사 프로그램-동물원 무너진 축대 쌓기, 잡초 뽑기, 국립공원 나무 심기 등-에 참가했고, 그 다음 세 달은 숙소를 구하고 학원에 등록해 열심히 영어공부를 했다. 5개월째부터는 일자리를 찾아나서야 했다. 그런데 영어공부를 위해 한국인이 없는 곳에서 일자리를 찾으려다 보니 무척 힘들었단다. 1달 만에 찾은 일은 토요 시장에서의 아르바이트였고, 연이어 호텔 식당에서도 일했다. 이렇게 지내는 동안, 영어로 전화하기도 힘들었던 그녀가 떠날 때는 처음 각오한 대로 ‘영어 잘해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 “호주에 갔다 와서 뭐랄까, 영어에 대한 미련이 풀렸어요.”

호주에서의 삶은 그녀에게 영어실력만 안겨준 것은 아니었다. “같이 살았던 아저씨가 있었는데 31살 정도 됐거든요. 그런데 그 아저씨가 배우였거든요. 호주 가기 전에도 ‘갔다 와서 그런 걸 해 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중략) 그 아저씨가 자기 연극하는 데 데리고 가고, 친구 연극하는 데도 데리고 가고, 대본 연습하는 것도 나와 같이 하고 그랬어요. (중략) 그런 곳에 가서도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안 잊고 계속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이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광주에서 영어 기간제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호주에 있을 때도 ‘한국에 돌아가면 극단에 들어가야지’ 생각했기 때문에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2월에 급하게 귀국을 해서 귀국한 날로 자리 알아보고 이력서 쓰기 시작해서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하게 됐어요.” 1년 일하는 동안 최선을 다해 일했고 인정 받는 선생님도 되었고 기간제 교사에서 정식교사가 될 기회도 있었지만, 그녀는 교사 일을 미련 없이 접었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 꿈

원했던 대로 가극단원이 되어 행복하다는 그녀, 지금 그녀의 일상은 어떤지 물어 보았다. “극단 식구가 10명 정도 되는데요, 거의 함께 산다 할 수 있죠. 한 동네에 모여 살아요. 서울 사람 한 명만 출퇴근하고 나머지는 자취하고, 그래서 11시에 모여서 밥해 먹고, 그 다음에 사무실에 출근을 해서 하루 일정 정리하고, 영화, 연극이론, 음악이론 같은 것을 하루에 1시간씩 공부하구요, 그 다음에는 신체 훈련, 노래연습을 하죠. 이게 기본 일정이고요, 저녁이 되면 그때부터 각자 개인적으로 할 일하고, 연습하고.”

그 동안 가극단 ‘미래’는 주로 대학 대동제나 새터(새내기 새로배움터)의 초청 공연을 주로 해 왔지만, 올 초부터는 노동자들이 모인 장소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올 연말에는 완전히 대중들에게 접근하는 제1회 정기 공연을 가지게 될 거라고 한다. 처지가 이런 만큼 가극단의 경제사정이 녹록하지 못하다.

“월급은 아직은 없고요, 처음 시작할 때도 언니, 오빠들이 자비로 사무실을 겨우 마련하고 아르바이트 찾아서 하고, 밤에 모여 회의하면서 준비하는 형편이었어요. 추석 때 봉투에 3만원씩 주긴 하는데(웃음), 공연 수입 비는 최소한의 생계비, 즉 식비, 전기, 수도세, 사무실 방세, 공연 준비에 충당이 되죠. 이런 상황을 예상했기 때문에 하기 전에 상경해서 자리잡을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던 거죠.”

“작년이었던 것 같아요. 친구한테 ‘나는 가난하게 사는 것이 꿈이야’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거든요(웃음). 청빈함을 삶의 목표로 삼는 정도는 아닌데, 충분히 그렇게 살아도, 내가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입고 싶은 것 못 입고 살아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니까 행복하고 더 가치가 있어 좋다는 생각도 있구요. 다른 한 편으로는 꼭 참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다 보면 별로 안 찾아져요.”

옷을 살 일도 없고 비싼 것 먹을 일도 없거니와 정말 만족하면서 살다 보니까 최소한의 것만 소비하면서도 살아도 될 것 같다고 한다. 적어도 2- 3년은 이렇게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그 후는 어떻게 할까? “아직도 고민이 많아요. 앞으로 10년 동안은 제가 극단에서 어떻게 살지 그려져요. 10년 후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예술가들이 배 안 곯고 살 수 있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겠죠.”

“도전하면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끼를 주체하지 못해 교사 직을 버리고 가극단을 택했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그녀는 웃었다. “저는 끼가 없는 사람이거든요. 끼가 있는 사람이 되게 부러워요. 주위의 사람들이 장난으로라도 ‘끼도 없는데 어떻게 그런 것을 하냐? 너는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면 마음에 상처 받기도 하고 그래요. 그런데 다만 제가 이 길로 간 것은 뭐랄까, 그냥 열정인 것 같아요. 제가 비록 끼는 없어도, 하고 싶은 데 도전하면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중략) 선생님에 대한 기대가 주위에 있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네가 이것을 잘 할 것 같아’라는 것을 하는 것보다 ‘네가 이것을 어떻게 해?’라는 것을 해냈을 때의 기쁨이 크지 않을까요? (웃음) 그냥 겁 없음, 무대뽀, 도전정신.”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을 깨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남들이 뭐라고 하건, 아무리 힘들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그녀의 열정이 정말 부러워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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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니카 2004/08/30 [16:14] 수정 | 삭제
  • 겁 없는 열정 자체가 끼 아니겠어요?
    일다에서 만나게 되는 인물들은 대부분 끼가 있어보이는 분들 같아요.
    나이 들면서 끼가 있든 사람들도 그걸 버리고 평범해진다는 느낌 받게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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