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돌을 맞아야 했나

신여성의 자유연애-2

김미지 | 기사입력 2004/09/05 [20:44]

그들은 왜 돌을 맞아야 했나

신여성의 자유연애-2

김미지 | 입력 : 2004/09/05 [20:44]
<일다는 퍼슨웹(www.personweb.com)과 공동기획으로 ‘신여성’에 관한 기사를 연재합니다. ‘신여성’의 연애와 사상, 직업과 지위 등을 중심으로 당시 사회를 살펴보는 과정은 여성의 역사를 복원하고 현재를 비추어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연재기사의 필자는 김미지님(퍼슨웹 기획위원, 성공회대 강사)과 손유경님(퍼슨웹 기획위원, 아주대 강사, <대담한 책읽기> 공저자)입니다. -편집자 주>

신여성이란 어떤 이들인가. 보통 신교육의 세례를 받고 근대인으로 탄생한 ‘새로운’ 여성들을 신여성이라 일컫는다. 곧 ‘근대교육의 수혜자’라는 설명이 신여성과 관련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근대’라는 것 자체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듯이, 신여성을 ‘근대교육’이란 설명으로 뭉뚱그리기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 조선에서 근대교육이란 국민 교육의 틀을 빌려 왔으되 식민교육이었으며, 게다가 여성교육의 경우는 근대적 주체 만들기보다는 현모양처 만들기에 그 방점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새로운 교육’을 떠나서는 신여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선택 받은 소수로서 고급교육을 받은 여성들, 그들은 분명 뚜렷이 하나의 새로운 사회집단으로 떠올랐다.

그렇지만 정작 신여성 하면 떠오르는 것은 나혜석, 김원주, 김명순, 윤심덕과 같은 이름들과 나란히 위치하고 있는 떠들썩한 연애사건들이다. 그들 신여성들은 고급교육을 받고 남성사회에 당당히 진출하고자 했지만, 그들을 사회의 유명인사로 만든 건 바로 그들의 연애담이었다. ‘화려한 연애편력’의 주인공들. 어쩌면 그들에게서 오랫동안 우리가 보아 왔던 건, 그리고 보려고 했던 건, 가십과 스캔들 대상으로서의 신여성뿐이었는지 모른다. 다른 신여성들, 이를테면 의학이나 법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여자유학생들,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실천했던 여성들은 늘 뒷전에 묻혀 있었다.

가십과 스캔들의 대상이 된 신여성들

나혜석, 김원주, 김명순, 윤심덕 등 우리에게 익숙한 신여성들의 면면을 보면,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 화가, 음악가 등 다른 분야보다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는 위치에 있었던 여성들인 것이다. 예술가라는 ‘화려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요즘 연예인들이 그렇듯이 감시 당하고 까발려지기 일쑤였다. 1920년대 여성잡지 <신여성>의 가십난을 한번 살펴보자.

“이혼 후 일본에서 융비술(隆鼻術)을 하고 돌아와 연애생활을 달게 하고 있는 김원주…” (<신여성> 1924년 4월, 색상자)
“이성을 너무 많이 아는 이 중에 훌륭한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김명순도 마찬가지” (<신여성> 1924년 11월, 신여자 인물평)
“결혼했는지 이혼했는지 첩이 되었는지 도망했는지, 국경 넘어가 있던 윤심덕이 요사이 조선에 들어와 숨어 사는 것 같다.” (<신여성> 1925년 여름호, 색상자)
“한참 당년 여류 성악가로 예간다 제간다 하고 문제가 많던 윤심덕 아씨는 요새 또 무슨 복덕방을 만났는지…” (<신여성> 1926년 2월호, 이 소식 저 소식)

김원주가 일본에서 융비술(隆鼻術, 코를 높이는 수술)을 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며, 윤심덕이 몇 번째 서방을 갈아 치웠다는 이야기 등 당시 여성지의 가십난에는 이렇게 명백히 사생활 침해라고 할 수 있는 내용들이 버젓이 씌어 있다. 그것도 비아냥과 경멸의 시선이 가득한 어조로. 김원주나 나혜석의 문인 혹은 화가로서의 자질, 그리고 윤심덕의 성악가로서의 능력은 그들의 사생활과 결부되어 매우 손쉽게 매도당하곤 했다. 김기진은 김명순과 김원주에 대한 공개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김명순의 시 ‘기도’)도 역시 그와 같은 소위 ‘분’내음새가 나는 시의 일종이다. 누가보든지 순실한 처녀, 혹은 여자가 정성껏 드리는 기도로는 보지 않을 것이다. 이 시에는 거친 생활을 계속하는 타락한 여자가 새로 마음을 고쳐먹고서 거울 앞에 앉아 있는 그러한 무-드가 많이 있다. (…) 거친 피부를 가리워주고 있는 한겹의 얇은 분을 벗기어버리면 그 아래에는 주름살 진 살가죽이 드러난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의 시도 한 겹의 가냘픈 화장이었다.” (김기진, ‘김명순씨에 대한 공개장’, <신여성> 1924년 11월)

“사실 그의 예술적 생활이라는 것에는 벌렸던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재롱도 여기까지 오면 도로 정이 떨어진다. (…) 그의 손으로 된 것인지 혹은 부군 노월씨(-임노월)의 가필을 받은 것인지도 모르는 한조각의 감상문만을 가지고 그의 전체를 평하여서 미안하다. (…) 다행히 그에게 장래의 여생이나 파란이 없기를 바란다.” (김기진, ‘김원주씨에 대한 공개장’, <신여성> 1924년 11월)

김원주와 김명순 두 여성이 김기진이라는 한 사회주의자이자 문인인 남성에게 난도질 당하는 모습이다. 가히 인신공격에 명예훼손이라 할 내용으로 이루어진 이 글들에서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임노월’이라는 존재다. 와세다 대학 문과 유학생 출신이자 문인이었던 그는 김명순의 애인이기도 했고 김원주의 애인이기도 했다. 물론 알려지지 않은 다른 신여성의 애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어느 곳에서도 임노월의 연애편력을 비난하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남이 먹던 음식이나 입던 옷은 싫어하면서 남의 남자는 싫어하지 않는 심리는 무엇인가’(<신여성> 1926년 3월호 ‘여성의 잡관 잡평’)라고 그녀들을 꾸짖는 목소리와 시선들은 남성에게는 철저히 관대했다.

‘제2부인’ 문제와 ‘사이비 연애주의자’들

김명순과 김원주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인텔리 집단의 연애관계는 서로서로 그물망처럼 얽혀있었다. 신여성들 특히 인텔리 계층에 속할 정도의 신여성은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930년 즈음의 통계에 따르면 공립 보통학교의 남녀비율은 5대 1, 고등보통학교와 여고보의 남녀비율은 3대 1이고, 일본유학생 남녀의 비율은 11대 1(1천68명 대 148명) 정도로 나타나 있다. 여성의 교육기회는 물론 크게 확대되고 있었지만, 인텔리 계층의 지독한 성비 불균형은 여전했다.

그런데 문제는 단지 인텔리 여성의 수가 적었다는 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많은 수의 지식인 남성들은 재래의 관습에 따라 조혼을 했고 따라서 처자식이 있는 몸이었다. 그래서 더욱 문제가 되었던 것은 신남성의 이상적 연애상대였던 신여성이 별 수 없이 ‘제2부인’의 처지에 처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는 것이다. 좋게 말해서 ‘제2부인’이지 법률상 그리고 도덕상으로 그들의 지위는 ‘첩’과 다를 바 없었다.

이들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주목 받으면서 <신여성>지는 1933년 2월호에 ‘제2부인 문제 특집’을 내기도 했다. 여기서 어떤 논자는 “현실을 바라볼 때 웬만한 인텔리 여성이 민적 없는 아내 즉 제2부인임을 발견하게 된다”며 “인습의 제단에 바쳐진 그들 희생자”들을 구제할 방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전희복, ‘제2부인 문제 검토’).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제2부인이란 칭호는 첩이라는 천명(賤名-천박한 이름)을 미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난하는 시각도 있다(이익상, ‘칭호부터 불가당’). 이들의 논리가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신여성의 현실에 대한 이해와 비판의견이 대등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을 비판하는 가장 ‘그럴 듯한’ 논리는 어떤 것이었을까. 김활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연애라는 미명으로 자기네 양심상 가책을 무찰(憮擦)시키며 사회적 체면을 유지하려는 그런 기만 행동과 진정한 연애와는 엄정히 구별해서 취급해야 할 것이다.” (김활란, ‘사이비의 연애 행동’)

김활란의 ‘사이비 연애주의자’에 대한 비판은 당대 신여성들의 연애문제를 바라보는 지식층, 특히 인텔리 남성들의 시선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숭고하고 신성한 연애’의 이상을 저버리고 ‘자유’를 빙자한 ‘연애놀음’을 일삼는 그들은 한마디로 사이비, 즉 ‘가짜’라는 말이다. 이렇듯 ‘진정한 연애’가 아닌 ‘사이비 연애’요, ‘진정한 근대인’이 아닌 ‘사이비 근대인’이라는 구분은 이 당시 지식층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구분법이었다. ‘근대’안에 도사리고 있는 다양한 모순과 문제들을 응시하기보다는, 너와 나를 ‘가짜’와 ‘진짜’로 구분해 매도하는 매우 손쉽고도 폭력적인 방식이었다.

‘자유연애’의 함정에 빠지다

그렇다면 왜 첩을 둔 남성들은 문제가 되지 않고 ‘제2부인’만 문제가 될까. 여기에는 재래의 인습도덕뿐 아니라 여전히 성차별적으로 작동하는 근대적 법률의 문제가 걸려 있다. 1930년대 법률을 보면, 민사상 유부녀가 간통을 하면 그 남편이 이혼청구를 할 수 있고 여자는 이혼 후 그 간통한 사람과 혼인신고를 하지 못한다. 그리고 형사상으로 그 유부녀는 이혼당할 뿐만 아니라 1개월 이상 이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진다.

그러나 남자의 경우는 다르다. 남편이 중혼을 하면 아내가 이혼청구를 할 수 있으나, 그 중혼이란 법률상의 혼인만을 말하며 동거나 예식과는 구별된다. 그리고 아내는 간통을 하면 이혼조건이 되나 남편은 간통죄로 형을 받은 때에 한하여 이혼조건이 된다. 남자들은 혼인신고만 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동거나 예식을 실행해도 처벌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법률은 사실상 축첩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정황이 여자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연애에 유독 자유로웠던 몇몇 신여성들은 성적으로 방종하다는 이유로, 남의 가정을 파탄냈다는 이유로, 연애의 진정한 가치를 모독한 사이비라는 이유로 가차없이 비난을 받았다. 특히 그 이름만으로도 센세이셔널 했던 몇몇 여성예술가들의 경우, 예술활동에 대해서도 그들의 연애행각에서 볼 수 있듯 ‘사이비’들의 ‘겉멋’일 뿐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방정환이 쓴 다음과 같은 글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여자 예술가라는 천하의 잡것들이 혼인 전에 신랑을 몇 사람씩 갈어 살어도 재조가 귀엽다고 사회라는 독갑이가 떠밧치고 내여세우니까 고갯짓 궁둥이짓을 한꺼번에 하고 다니지만....” (<신여성> 1926년 7월호 은파리)

신여성들 특히 여성예술가들의 자유연애는 온갖 비난과 조롱으로부터 끝까지 자유로울 수 없었고, 비극으로 막을 내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연애를 극복할 힘을 가진 여자가 되자(박화성, ‘계급해방이 여성해방’, <신여성> 1933년 2월)’는 주장이 나온 것도 어찌 보면 이러한 부르주아 여성예술가들이 보였던 ‘연애지상주의’를 겨냥한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자유로운 연애 ‘행각’을 벌였던 나혜석, 김명순과 같은 여성들은 실제로 연애만능 혹은 연애지상의 가치를 신봉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남녀에게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성도덕의 이중성을 공격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녀들은 ‘성의 자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자 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잠시 누렸던 연애의 자유는 그들을 과거와는 또 다른 예속과 굴레로 밀어 넣었다. 결국 연애에 지나치게 이상(理想)을 부여하는 일종의 연애환상은, 남성중심사회가 마련해 놓은 ‘자유연애의 함정’을 간과하게 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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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04/09/07 [13:04] 수정 | 삭제
  • 아래 그람시님은 신여성 중에서도 부르주아 신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인 엘리트, 서구중심 페미니즘이 아니냐는 식으로 얘기하셨기에, 제가 '갇힌'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님은 신여성들이 살았던 자취를 보면서, 가부장적 사회가 소위 말하는 똑똑한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 그리고 지식인 사회 안에서의 성차별과 남성지식인들의 모순이 보이지 않으시는지요?

    그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엘리트 페미니즘, 서구중심 페미니즘과는 상관이 없이, 역사적으로 아주 의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엔 몰랐고 관심도 없었던 일이지만, 저는 이제 그런 사실들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 그람시 2004/09/06 [23:41] 수정 | 삭제
  • 하는 것이 더 바람직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본 기사에서는 당시 이슈가 되었던 스타급 신여성 외에도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여러 신여성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사는 스타급 신여성들의 연애와 가부장제의 관계로만 흘러가더군요... 주목받지 않은 신여성, 혹은 프롤레타리아 여성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이 필요하리라 봅니다. 페미니즘이 소위 파워 페미니즘, 엘리트 페미니즘으로 변질되어선 안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리엔탈리스트들에게는 이 글이 "자유롭고 긍정적인 <서구>의 사상을 수용한 여성들이 <아시아>의 부정적이고 낙후된 가부장제에 의해 희생되었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될 소지도 있습니다..
  • apple 2004/09/06 [19:07] 수정 | 삭제
  •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돌을 맞아야만 하는 여성들이 있죠.

    신여성에 대한 얘기들 퍽 재밌네요..
  • 희진 2004/09/06 [11:07] 수정 | 삭제
  • 몇년 전 알게 된 나혜석의 이야기는 나에게 참 충격이었다. 나혜석만이 아니고, 그녀는 상징적인 의미가 된 것 같다. 이기적인 남자들과 식민사회와 전근대적 보수성 속에서 힘겨운 삶을 살다간 여성들의 모습이 안타깝다. 시대가 요구하는 것보다 똑똑한 여자는 화살받이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김활란은 여러 모로 깬다. 재섭서.
  • 롤라런 2004/09/06 [10:03] 수정 | 삭제
  • 저렇게 잔인한 줄 몰랐네요..
    그 때의 신여성들은 어떻게 버텼을까. 요즘 세상도 힘들텐데...
    기사 보는 동안 재밌게 봤다고 하기엔 가슴이 다 아프네요.

    그런데 연애란 게 지금도 여성에겐 훨씬 더 가혹하지 않나요?

    다음 기사도 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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