퀼트를 통해 인생을 배운다

퀼트 예술가 박상희

황보신 | 기사입력 2004/09/12 [22:55]

퀼트를 통해 인생을 배운다

퀼트 예술가 박상희

황보신 | 입력 : 2004/09/12 [22:55]
인터뷰를 약속한 날, 잠에서 깨자마자 하늘부터 바라보았다. 비가 오나 안 오나. 아기를 데리고 외출해야 하기에 비가 오면 인터뷰에 응할 수 없다는 그녀. 다행히 햇살 따뜻한 오전이었다. 우리는 이른 시간의 텅 빈 카페 한 모퉁이를 차지해 앉았고, 곧 샘솟듯 쏟아져 내리는 그녀의 명랑한 목소리가 온 카페를 생기로 가득 채웠다.

“나를 표현하고 싶어서”

“퀼트 예술가시죠?”라는 질문에는 그는 “그렇게 표현해 주시면 영광이죠”라며 활짝 웃었다. “바느질이 좋아서 시작했는데요, 사실 지금은 퀼트 하는 것 자체를 그냥 사람들이 단순히 집안 꾸미기 위해서 바느질하는 단순한 것으로만 생각하는 게 안타까워요. 퀼트는 나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한 어떤 수단도 되고, 나를 보여줄 수도 있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하는 예술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거든요. 사람들이 안 알아줘서 아쉬울 때가 있지만. (웃음)”

그는 처음에는 취미로 반지고리, 방석, 가방 같은 조그만 것을 만들다가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따라 하며 사이즈가 큰 것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서서히 퀼트에 빠져들 무렵, 그의 남편은 “거기에 너무 빠지는 것 아니냐, 네가 해야 할 다른 일들도 있는데” 라고 말했다. 타박같이도 들렸던 조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나는 지금 창작하는 거라고, 쓸데없이 심심풀이로 노는 게 아니고 물감 대신에 천을 잘라서 그림 그리는 거라고.” 지금은 남편도 그의 퀼트 작업을 인정하는 것 같다 한다.

그녀가 퀼트를 시작한지는 6년째. “사실 바느질을 시작한 것은 어렸을 때부터였어요. 양말 같은 것 잘라서 마론 인형 옷도 만들어 입히고 그랬어요. 어렸을 때 오리고 자르고 바느질한 기억이 나요.” 재봉틀 하는 엄마 곁에서 재봉틀을 가지고 놀며 자랐던 그는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친구들 가사숙제까지 대신해 줄 정도로 바느질을 너무 좋아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사회에 나와서 우연한 기회로 퀼트를 접하게 되었다는 그는 더 일찍 퀼트를 만나지 못한 것을 유감스러워하고 있었다. 아무튼 지금의 퀼트 선생님을 만나 그녀는 퀼트의 작품세계, 퀼트의 깊이에 눈을 뜨게 되었고 퀼트로 자기표현을 할 수 있게 됐다.

‘한국적 퀼트’의 발견

“죽을 때까지 해도 못하겠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아직까지도 제가 한 번도 접하지 못한 퀼트가 너무너무 많은데. 10년, 20년 하신 분들도 ‘아직도 다 못해 봤다’ 하시는데…. 처음에는 ‘하나하나 다 배워봐야지’하고 생각했어요.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겠다’라고 생각을 한 거에요. 이것도 배우고, 저것도 배우고. 예를 들면 하와이안 퀼트도 배우고, 몰라 퀼트도 배우고, 아플리케도 배우고 볼티모어도...... 하나하나 배웠어요. 그런데 끝이 없는 거에요. 아무리, 아무리 해도 끝이 없는 거에요.”

끝없는 퀼트의 세계에서 하나를 깊이 파라는 선생님의 조언과 함께 그녀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바로 ‘한국적 퀼트’. “퀼트는 서양에서 들어온 거잖아요. 같이 퀼트 하시는 분들 중에 연세가 일흔이 넘은 어르신들이 계세요. 그 분들 중 전통자수, 보자기, 이런 것을 장애인 단체를 다니시면서 무료로 가르쳐 주시는 분이 계세요. ‘한국의 퀼트라고 하면 보자긴데, 옷 만들고 남은 천들 이어 붙인 밥상 보, 아니면 예단 보, 이런 것들인데, 한국적 퀼트를 하는 사람들이 그런 전통을 몰라서 되겠냐’며 보자기를 그 분께 배우게 됐어요.” 그녀는 보자기를 배우면서 한국적인 것을 접목시켜 퀼트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분명해졌단다. 퀼트가 실생활화되어 있고 작가 층이 두터워서 퀼트 페스티벌도 활발히 열리는 유럽이나 일본 등지에서 우리가 경쟁을 하려면 ‘우리의 퀼트, 한국적 퀼트’을 선보여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일상의 아픔을 퀼트로 풀고

사실 바느질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가 처음 퀼트를 시작했던 또 다른 이유는 재미있게도 연애시절 남자친구가 바빴던 탓에 시간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란다. “일주일에 한 번 배우는데, 한 번 배우고 오면 밤을 꼴딱 새는 거예요. 아침이 오는 줄 모르고 정신이 팔려서 그렇게 빠져들었죠.” 이런 그를 더욱 더 바느질에 빠지게 한 것은 현실 속에서 만난 어려움들이었다.

아들 둘에 이어 막내 딸로 태어난 그녀는 집안에서 학수고대하던 귀한 딸이었다. 또 부모님의 자유로운 교육관 덕분에 큰 어려움을 모르고 성장했다. “‘부모님 인생은 부모님 인생이고, 너희들 인생은 너희들 인생이고.’ 이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스스로 알아서 해라’라는 교육관이셨어요.” 부모님의 강요가 없었던 만큼 대학진학이건 결혼이건 스스로가 알아서 결정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냥 막연히 나는 학교 졸업하면 잘 살 거고, 당연히 일을 하는 거고... 큰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고, ‘졸업하다 보면 취직하겠지, 취직을 하다 보면 결혼도 할거고, 결혼했다고 해서 일을 못하겠냐?’하고 막연히 쉽게 생각을 했었어요.” 그러나 그는 취직을 하면서, 결혼을 하면서 여성의 어려움들을 하나씩 알게 됐다고 한다. 그때마다 그녀의 출구는 바느질이었다.

결혼 직전 8개월 정도 비서로 일했었던 그녀는 ‘커피 타주는 사람’일 뿐인 비서의 현실에 지쳤다. 그녀는 결혼과 더불어 그 일을 접고 주부가 된 것이 오히려 기뻤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결혼생활 첫 1년 동안의 고립감은 그 이상으로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결혼이 준 문화적 충격이 제가 생각한 이상으로 컸어요. 결혼 생활이 만만치 않더라구요. 결혼한 후 여성들이 집에서 고립되는 것은 정말 ‘죄악’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정말 우울증으로 가는 지름길이고.” 그는 자신의 고립감을 바느질로 풀기 시작했다. 게다가 “저랑 굉장히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제가 결혼한 후 1년 있다가 연락이 왔어요. 유학 간다고 하더라구요. 전화를 끊고 난 다음에 ‘나도 가고 싶다. 나만 뒤쳐지는 것 아닌가? 나는 뭘 하고 있나?’ 그런 생각이 확 들었어요. 짜증도 나고 그러면서 점점 더 바느질에 빠져들게 되었어요.”

남편이 장남이자 외아들이었던 만큼 결혼 4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도 그에게는 스트레스성 전신 피부병을 동반할 정도로 큰 스트레스였다고 한다. 만일 아이를 정말 못 낳게 되면 이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도 했다고. “‘그때, 힘들었을 때 바느질을 안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요. 바느질하는 것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는 개인의 힘든 경험들을 퀼트로 풀었을 뿐만 아니라 퀼트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 아줌마들을 통해서 더 큰 세상을 더 알게 되었다고 한다. 퀼트는 그녀에게 ‘세상을 보는 창’이었다고. “‘퀼트를 하면서 인생을 배우는구나’ 생각해요. 바느질하면서 퀼트샵에 있다 보면 남들이 모르는 작은 아픔이나 힘든 부분이 있는 사람을 참 많이 만나요. 4, 50대에 퀼트를 시작하시는 분들은 상실감 때문에 시작하는 사람이 많죠. 집에서만 살다 보니까, 직장생활 안 하고 육아하고 가사만 담당하면서 생활을 하다 보니까 남편은 남편 나름의 세계를 완전히 구축하고, 자식들은 분리해 나간 상태가 되고, 또 폐경기가 오면서, 힘들 때 퀼트를 알게 되면 빠지시는 거예요.”

사람들은 흔히 퀼트를 ‘단순하고 심심한’ 바느질 정도로 생각하지만 그가 경험한 퀼트의 매력은 그런 고정관념과는 아주 달랐다. “제가 경험을 해 보니까 손으로 작업을 하면, 특히 핸드 퀼팅을 하다보면 정말 밤이 새고 날이 밝는 것을 모를 정도로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을 느끼거든요.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가 되요. ‘저런 단순 반복적인 작업에 왜 빠질까?’ 그렇게 생각하시는데 퀼팅하다 보면 머리 속이 깨끗해지는 느낌, 너무 맑아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아이 인생, 내 인생

결혼한지 4년 만에 그녀는 어렵게 아이를 얻었다. 자신의 모성애가 남달라서가 아니라 어렵게 얻은 아이인 만큼 잘 키우고 싶은데, 양육과 퀼트 둘 다를 잘 하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다. “최소한 1년에 한 번 이상은 꼭 전시회에 참여하고 싶어요. 그런 기준을 세워놓지 않으면 못할 것 같아요. 아이 낳고 두 달 동안은 아무 것도 못했어요. 두 달이 지나고 나면서 육아에도 익숙해지고, 직장 생활하는 엄마들도 출산휴가 끝나고 복귀하잖아요, ‘나도 그렇게 해야지’하고 나 혼자서 마음먹어요.”

그녀는 퀼트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힘주어 말했다. “퀼트는 계속할 거고, 꼭 하고 싶어요. 애가 컸을 때 엄마가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게 될 때, 아이가 엄마의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될 때, 그때 아이한테 우스운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직장생활 포기하고 아이 키우는 데만 모든 것을 바쳐서 했더니 ‘엄마는 왜 그렇게 살았어?’, ‘엄마 왜 그렇게 밖에 못 살았어?’라고 얘기할 때 충격 받는다고 얘기하잖아요. 저 스스로가 아이에게 모든 것을 부어서 행복하다면 모르겠는데, 나처럼 이기적인 사람이 그럴 것 같지 않거든요. 어느 정도 시기가 되면 아이 인생은 아이 인생, 내 인생은 내 인생으로 분리될 것 같아요.”

그래서 그가 선택한 육아법은 참으로 현명해 보인다. “지금도 애를 데리고 앉아 가지고 이렇게 얘기를 해요. ‘엄마는 지금 바느질해야 되니까, 너는 너 혼자 놀기를 지금부터 적응을 해야 된다, 울어도 엄마가 안 봐줄 거야, 너도 혼자 놀아야 해.’ 밖에 나갈 때도 낯가림 하지 않도록 외출할 때 자는 아이를 깨워요. ‘빨리 일어나야 해, 지금 나가야 하니까. 엄마가 다른 엄마들처럼 모든 것을 희생해서 너 안 키울 거니까 스스로 극복해라.’ 사실 언론에서 모유수유로 난리를 쳐서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젖이 잘 안 나와서 너무너무 고생을 했어요. 최대한 노력을 하는 데까지 해 봤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요. 이러다가 나도 힘들고 아이도 힘드니까 타협을 하자. 애한테 젖도 먹이고 분유도 먹이고, 되는대로 먹이거든요. ‘너는 주는 대로 먹어야 돼.’ 그리고 애 잘 때 소리 나면 애가 깨잖아요. 그래서 음악도 크게 틀어놓고 지내요. 전화 올 때마다 애가 깨면 너무 힘들거든요. 일해야 되는데. 미연에 방지하는 거죠. 유모차 타는 것 싫어해서 안 타는 애들 많잖아요. 그런 게 어디 있어, 울어도 그냥 태워서 나가요.(웃음)” 이런 그를 두고 주변에서는 다들 ‘엄마가 너무 터프하다’고 한단다.

그의 활기찬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그녀의 육아법 덕분인지 유모차 안의 아기는 놀라울 정도로 지친 기색 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퀼트를 할 거라는 엄마의 단호한 표정을 읽은 걸까. 퀼트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엄마의 삶을 이해하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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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melie 2004/09/14 [23:16] 수정 | 삭제
  • 퀼팅에 대한 얘기 잘 들었어요.
    우리 어머니도 요즘 퀼트에 빠져계시는데, 그런 비슷한 말씀하시더군요.
    바느질에 몰두해 있을 때 마음이 편해진다구요.
    사람에겐 일에 완전히 몰입해있는 그 순간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해주셨죠.

    인터뷰 잘 봤어요.
    터프한 엄마를 둔 아이가 더 잘 자랄 거예요. ^^
  • 아침고요 2004/09/13 [10:02] 수정 | 삭제
  • 결혼생활의 고립이 우울증을 앓게하죠.
    결혼생활에 들어선 여성이 깨닫게 되는 현실이란.. 참..
    그걸 첨엔 나 혼자 그런가보다 하며..
    그랬는데 아니더군요.
    바느질도 양말꿰는 게 아니라 ..
    "동양적" 퀼트를 만드실 정도로 창조적인 일을 하셨기에..
    잘 극복해내신 것 같아요.
    퀼트작품 아름답군요. 님의 이야기도요..
  • 밤비 2004/09/12 [23:53] 수정 | 삭제
  • 저는 초보자인데 박상희씨 작품들을 보니까 가슴이 뜁니다. 저도 나중에 저런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 박상희씨 살아온 이야기 재밌게, 공감하면서 봤어요. 아이랑 찍은 사진 참 예쁘네요. 예쁘게 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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