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바라보는 생물학적 시선들

식민지 시기 과학과 여성

김미지 | 기사입력 2004/10/17 [21:44]

여성을 바라보는 생물학적 시선들

식민지 시기 과학과 여성

김미지 | 입력 : 2004/10/17 [21:44]
<일다는 퍼슨웹(www.personweb.com)과 공동기획으로 ‘신여성’에 관한 기사를 연재합니다. ‘신여성’의 연애와 사상, 직업과 지위 등을 중심으로 당시 사회를 살펴보는 과정은 여성의 역사를 복원하고 현재를 비추어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연재기사의 필자는 김미지님(퍼슨웹 기획위원, 성공회대 강사)과 손유경님(퍼슨웹 기획위원, 아주대 강사, <대담한 책읽기> 공저자)입니다. -편집자 주>

과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근대화의 가장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인 근대의 과학이 이 땅에 처음 상륙했을 때, 그것은 복된 문명의 세례이자 문명의 길로 안내하는 복음과도 같았다. 19세기 말엽부터 이미 천문학, 지리학을 필두로,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자연과학이 크게 조명을 받았으며, 20세기 들어서는 세계적으로 시대를 풍미했던 사회 생물학(사회 진화론)과 의학, 심리학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과학의 창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또 건설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다(당시의 소설들 가운데는, 새 시대를 이끌어갈 주인공으로 생물학자나 의학자 등 과학자가 등장하는 경우가 꽤 많다).

과학적 검증 방법 혹은 과학적 태도가 대상을 파악하는 가장 유력하고 훌륭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역시 ‘과학적’이라 할 수 있는 영역이 열리게 되었다. 여성의 몸과 여성의 상태, 그리고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대해 과학이라는 이름 하에 다양한 주장과 해석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 물론 생물학, 의학, 심리학 등의 이름이 붙은 당시의 갖가지 작업들은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엉성하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하며 또한 위험하기도 하다. 방법적 엄밀성이나 정합성을 따지는 것이 넌센스로 보일 정도로 과학과 거리가 먼 이야기들이나 ‘과학’의 외피를 두른 사이비 과학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시도들은 당대인들이 ‘과학’에 기대어 얻고자 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우월하다

<신여성> 1925년 2월호에는 “여존남비냐 남존여비냐?”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다. ‘지상강좌’라는 형식을 빌리고 있는 이 글에서 필자는 ‘남존여비’를 정당화하는 현재의 사회 조직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를 묻고, 이 문제를 ‘공평무사하게’ 판단하는 것이 생물학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는 주장을 첫머리에 제기하고 있다. 그러면 남녀관계에 있어서 필자가 보여주는 공평무사한 생물학적 분석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생식의 불어군이[부엌]에 맨 처음 불을 땐 이는 수놈입니다. 그러나 최후에 훌륭한 산 물건[活物]을 만들어낸 이는 암놈입니다. 생물의 제일 큰 사명인 생식의 무대에서 근본이 되고 두목(頭目)이 되는 것은 언제든지 암놈이었고 수놈은 다만 여졸가리가 되고 심부름꾼이 되는데 지나지 못합니다.”

“웅성(雄性, 수컷)이 함부로 만든 산물이라는 것은 다른 방면으로부터도 논급할 수 있습니다. (…) 예를 들어 털이 많은 피부, 모양이 뾰족한 이각(耳殼, 귓바퀴), 크게 발달된 송곳니, 근육을 갖춘 궁둥이 같은 것은 다 여자보다도 훨씬 많이 남자에게 볼 수 있는 이상상태(異常狀態)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상태의 대부분은 소위 원시적 조선(祖先, 선조)에 닮음입니다. 백치 같은 사람도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현저히 더 많은 것도 사실이며 또는 색맹과 혈관병 같은 유전적 병도 남자에게 많고 여자에게는 적습니다.”

생물계에서 생식의 완성자는 수컷이 아닌 암컷이라는 점, 그리고 남성에게서 원시적 형태의 신체적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필자는 강조하고 있다. 즉 결론적으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연의 이치에 따를 때 그리고 생물학적 특성으로 볼 때 암컷(여성)이 우월하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월하고 존귀한 존재로서의 남성’이라는 명제를 ‘생물학’이라는 과학적 권위를 빌려 뒤집고자 한 것이다. 물론 이 글은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제 논에 물대기 식의 과도한 정당화를 꾀한 혐의를 피할 수 없다. ‘백치, 색맹, 유전병’까지 언급하며 우생학적인 태도마저 보이고 있는 것은 그 의도가 지나친 결과라고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만큼이나 ‘남존여비’라는 견고한 사회조직(관념)을 비판하고자 하는 필자의 의지가 강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성 교육론의 과학적 근거

이와 유사한 접근 태도는 김승식의 “인류 정력의 성적 차이”(<신여성>, 1925년 5월호)라는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여자는 어느 면에서든지 남자만 못하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근대과학심리학’의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미국 위스콘신주립대학에서 수백명 남녀 학생의 정력(精力)을 감정(鑑定)한 결과를 보면 여자 정력이 남자의 것에 비해 백분의 칠 가량 우승(優勝)하다. (…) 여자의 정력이 남자의 것에 열하(劣下)하다는 것은 우리의 편견과 의견에 지나지 못함이오 결코 사실(事實)은 아니다. 여자의 사회적 지위 및 직업문제―남녀공동교육문제-이러한 중대 문제 등을 해결하는 데 먼저 잊지 못할 것은 이상의 심리학적 사실이다.”

위의 글들보다는 조금 더 ‘과학적인’ 분석에 충실한 것으로 보이는 유영준의 “여자는 과연 약자인가-의학상으로 본 관찰”(<신여성>, 26년 9월호)이라는 글을 보자. 이 글은 남녀간의 전반적인 생리적 구조의 차이를 개괄한 뒤, 남녀 뇌의 차이에 대해 설명한다. 해부학적으로 볼 때 여자의 대뇌가 남자보다 적고 가벼우며 뇌신경도 남자보다 가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차이가 여성의 정신작용이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뇌 속에는 회백질이니 회색두부와 같은 것이 가장 중요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고로 뇌의 중량이 적고 회전(廻轉) 발달이 적을지라도 회색질만 비교적 많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지능을 가질 수 있다. (…) 부인의 뇌가 도리어 남자보다 많은 회색질을 가지고 있는 예가 실로 적지 아니하고, 또는 부인의 뇌가 그 전신체량과 비하여 도리어 남자보다 큰 것이다. 그러니 다만 뇌의 평균 중량이 크다고 남자는 부인보다 지능이 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요, (…)”

이 글에서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지능의 문제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교육 여하에 달린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 여자가 몇 천 년을 두고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온 오늘에도 오히려 남자보다도 초월한 자가 있거든 하물며 교육에 자유를 얻는 장래에랴”라는 필자의 진술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글에서 행하고 있는 의학적 검토의 목적은 ‘여성교육’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역설하기 위한 것이었던 셈이다. 물론 이 글에서도 ‘여성이 많은 출혈에도 남자보다 참을성이 많은 것은 월경과 분만 같은 생리적 출혈이 습관화된 까닭’이라는 식의 ‘비과학적’인 주장이 엿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뒤집은 것에 불과한 ‘여성 우월론’을 넘어서서, 여성교육의 필요성과 가치를 ‘과학’에 기대어 입증하고자 했다는 점에 이 글의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과학, 의학의 권위와 이데올로기

과학 또는 의학적 접근이 대상을 바라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제시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 혹은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여지고 그에 힘입어 모종의 ‘음모’(혹은 이데올로기)에 가담하게 된다면, 그건 분명 위험한 일일 터이다. 예컨대, ‘패스트푸드가 비만과 무관하다’는 의학적 실험 결과의 배후에 거대 다국적 기업이 있다든지 하는 것처럼, 그러한 ‘불순한’ 움직임들은 언제나 있을 수 있다. 과학적 접근이라는 외형을 갖추고 있지만 그 발상과 의도가 의심스러운. 물론 위에 소개한 글들 역시 여성주의적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어느 정도 빤한 의도와 목적을 내포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이 억압적이라거나 폭력적이라고 볼 수 있는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의학사 모씨가 쓴 “만혼 유해론”(<신여성>, 1924년 5월호)을 보자. 필자는 이십 칠, 팔세가 넘도록 미혼으로 있는 남녀가 많아지는 만혼의 경향을 지적하며 그것이 낳는 폐해를 밝히고 있다. 그는 독신생활 속에서 괴롭게 성욕과 싸워 나가야 한다는 점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그가 말하는 독신 남녀 각각의 해악은 이러하다.

“남자측의 해(害) - 부정불결한 성교로 정력 허비와 품성 타락의 손실이 크고 화류병으로 자기와 아내의 일신을 망치고 자손에까지 악질(惡疾)의 유전을 시키게 된다. 또한 부자연한 수정(遂情, 자위행위를 일컫는 듯-인용자)이라는 악습은 기억력 감퇴, 성적(학습능력) 저하, 시력 손실, 신경 쇠약, 심하게는 생식기 파멸(破滅) 등을 야기하게 된다.”

“여자측의 해(害) - 남자와 같은 부정한 성교로 인한 화류병은 없지만, 부자연한 수정(遂情)의 악습이 끼치는 해악은 남자보다 심하여 위의 해악 이외에 탄력 손실과 불감증을 낳을 수 있어 결혼생활이 도저히 불가능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해악은, 생식기관이 퇴화하기 시작하여 생식능력도 쇠퇴한다는 점이다.”

필자가 말하는 만혼의 폐해는 주로 자위행위와 출산연령의 고령화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자위행위가 죄악이라는 편견 혹은 여성의 출산을 의무화하는 고정관념에 ‘의학’의 권위를 덧씌워 일종의 ‘협박’을 가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는 처녀와 비처녀의 구별에 관한 논의들도 있었다. 한 번 남성을 접한 여성은 체형 자체가 처녀 때와 달리 변한다거나, 그 남성의 피가 신체 어디엔가 섞여든다거나 하는 속설들이 생물학의 입을 빌려 횡행했던 것이다.(“만혼 타개 좌담회”, <삼천리>, 1930년 6월호). 물론 당시의 산부인과 의사들은 “여러 가지 속설들은 많아도 과학적으로 볼 때 처녀 비처녀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없다”(“성 문제를 중심으로 한 부인과 의사 좌담회”, <신여성>, 33년 5월호)고 말하고 있긴 하지만, 속설이 ‘과학’으로 둔갑하여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예들은 이밖에도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근대 과학은 여성의 현실적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한 원군(援軍)이 되기보다는, 또 다른 교묘하고 은밀한 제약으로 존재하기 십상이었다. 리타 펠스키의 지적대로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은 근대화 과정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 여성 문제가 근대의 지배적인 개념과 아무런 문제없이 결합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지배적인 개념의 바깥에 놓일 수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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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아 2004/10/18 [09:49] 수정 | 삭제
  • 식민지 시기에 유입된 과학과..
    남녀 우위론 같은 거..
    그 시기에 그런 얘기가 오갔다는 게 재밌게 느껴져요.
    좀 웃기게 생각되기도 하지만요.
  • isobel 2004/10/18 [04:20] 수정 | 삭제
  • 생물학 등의 소위 '자연과학'이라는 것들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 이른바 '상식'의 오류를 증명해 내는것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애초에 사회구조가 과학에 의거해서 구성된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거기다가 더 복잡한 것은, '자연과학'의 언어들이 '자연'에 의거한것이 아니고 '공평무사'하지는 더더욱 않다는 점입니다. 먼 예로, 16~7세기의 해부학 교과서를 보면 여성의 자궁등 생식관련 장기엔 전부 남성의 그것들과 같은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당시의 여성에 대한 관점-여성은 불완전한 남성에 불과한, 자체로서 존재가치가 없는 열등한 자들-을 그대로 반영한거죠. 남성이 될 수 있을만큼 생명의 열기가 충분치 못했던 태아들이, 남근을 밀어낼 만큼 충분한 생명열기가 없어서, 남근이 뒤집어진 형태의 생식기를 가지게 된다고 생각했다는군요. 좀 가까운 예로는 프로이트가 있을 수 있겠군요. 프로이트는 거세공포를 여성에게도 억지로 끼워맞추기 위해 여자아이가 남근을 갖고 싶어 한다고 했다죠. 요즘도 그런식인진 모르겠지만 한 10여년 전만 해도, 초등학생등을 대상으로 하는 아주 기초적인 과학서적에서 임신-수정을 설명하는 방식은 아주 정자중심적이었습니다. 난자는 그냥 가마안히 있고 정자가 열라 달려가서, 난자의 표피를 녹여서 들어가서, 그게 수정이다. 이런식으로.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오히려 결정적으로 움직이는 쪽은 난자고, 정자는 한참 가서 난자가 올때까지 기다린다고 하네요. 이런식의 관점들도 잘 들여다보면 결국 과학도 남근중심적으로 구성되어져 있고, 그렇게 움직여 간다는걸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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