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회사에 가고, 여자는 안 가는데 이모는 왜 회사에 가요?"
오랜만에 만난 조카 가은이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맙소사, 깜짝 놀랄만한 사건이었습니다. “회사를 왜 남자들만 가니. 여자들도 회사에 다녀.” "아니에요." 올해 여섯 살이 된 조카가 여자들은 회사에 다니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니, 정말 충격적이더군요. 마음을 가다듬고 이 참에 제대로 얘기를 해줘야겠다 싶었습니다. “가은이 할머니도 회사 다니셨어." "언제요?" "가은이 태어나기 전까지. 그리고 가은이 엄마도 회사 갈 거야. 너희 낳느라고 잠시 쉬고 있는 거지. 가은이도 커서 직장에 다닐 거야." 가은이는 자기가 커서 직장에 다닐 거라는 말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아이의 놀란 표정을 보고 있자니 속이 다 쓰려왔습니다. 태어나서 5년 동안 직장 다니는 여성들을 접할 기회가 그리도 없었단 말인지, 각종 TV 유아프로그램과 어린이집 교육프로그램에선 애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 모르겠더군요. 상황이 이렇게 되니 생각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울산에 사는 조카들과 자주 만날 기회는 없지만, 그래도 가끔 찾아갈 때마다 짬짬이 같이 놀기도 하고 책을 읽어주기도 했는데요. 그림책들 중에는 조카들에게 읽어주다가 중간에 포기한 책들도 있습니다. 앞부분은 신선해 보여도 결국 주인공을 전형적인 공주님으로 만들어버리거나, 여자는 어때야 하고, 남자는 어때야 한다는 진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그러했죠. 그런가 하면 나이에 맞춰 아이들이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각종 교육자료들도 있었는데, 조카들과 신이 나서 함께하다 보면 ‘이건 아닌데’ 싶은 것들이 수시로 보이는 것입니다. 가령, 물건들과 가족 구성원을 연결시키는 게임에서 ‘정답’은 청소도구와 엄마, 서류가방과 아빠, 그리고 축구공과 남자아이, 치마와 여자아이의 연결이죠. ‘아직도’ 말입니다. 아이 키우는 친구들은 “여자애와 남자애는 정말 다른 것 같다”는 얘길 종종 합니다. 아들과 딸을 성별 구분 없이 키우고 싶었지만, 아이들이 클수록 여자아이는 예쁜 옷 입고 싶어하고 남자아이는 근사한 로봇이나 장난감차를 갖고 싶어한다는 것이죠. 애기 때부터 유독 딱지치기며 팽이 돌리기와 같은 놀이를 좋아했던 조카 가은이가 어린이집 들어가고 나이 한 살씩 더 먹으면서 여느 ‘여자아이처럼’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나로서, 착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것은 또 단순히 여자답다, 남자답다 문제만도 아니지요. 아이들뿐 아니라 청소년, 성인들 중에서도 부모를 ‘엄마아버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머니에겐 반말을, 아버지에겐 존댓말을 쓰죠. 그것은 친밀감의 차이라고만 할 순 없습니다. 최근에 언니가 “우리는 말 배울 때 안 그랬는데, 왜 애들이 나(엄마)에게만 반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옆에 계시던 어머니는 그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존대를 해야 아이들이 엄마에게 존대를 하는 거다.” 자, 과연 남녀가 ‘평등’하다는 걸 아이들이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자신들 옆에서 꼬박 붙어서 돌보아주는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고, 매일 밥하고 빨래하고 장보는 사람들 역시 ‘여성’이며, 그런 여성들이 자신들 눈에 자주 보이지 않는 ‘남성’들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다는 걸 아이들이 직감적으로 아는데 말입니다. 사회는 급격하게 변한다 해도 차별은 여전히 대물림 되는 것이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해 보입니다. 차별을 없애는 것, 인권감수성을 갖는 것의 가장 좋은 약은 ‘교육’입니다. 그 어떤 인권 이슈도 가장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대안은 ‘교육’으로 귀결됩니다. 그런데 그 교육이란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평등을 가르치고, 인권을 가르친다기 보다는 이미 배워 익숙해져 버린 것들을 ‘비워내는’ 과정이 필요한 현실이니 말입니다. 태어난 지 5년 되는 아이에게도 그러할진대 사회화 과정을 거친 사람들에겐 말할 것도 없겠지요. 교육에 열을 올리는 한국사회에서 부디 그 교육의 내용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인권이며, 평등이라는 것을 인식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한글을 배우고, 영어로 노래를 부를 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아야만 하겠죠. 특정 연령대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평생 배워도 모자란 데다가 매 순간 몸으로 실천해야 하는 내용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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