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의 세계와 여성

여성문학 시리즈-1

김윤은미 | 기사입력 2005/03/01 [03:33]

추리소설의 세계와 여성

여성문학 시리즈-1

김윤은미 | 입력 : 2005/03/01 [03:33]
추리소설의 세계는 확실히 일상과는 거리가 멀다. 일반인들이 추리소설에 나오는 쇼킹한 범죄들을 겪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게다가 미국의 여성추리소설 작가 P.D.제임스(James)의 소설제목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An Unsuitable Job for a Woman)'처럼, 걸핏하면 경찰과 싸워야 하고 까다로운 의뢰인들을 달래야 하며 범인과의 결투도 불사해야 하는 이 거친 세계에서 여자들이 살아남기란 꽤 힘들어 보인다.

▲ 고전 추리소설의 대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그러나 추리소설이 전적으로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적은 결코 없었다. 세태의 변화를 소재로 흡수하기 쉬운 대중문학의 특성상, 추리소설은 여성들의 변화하는 삶과 생각을 관찰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장르이기도 하다. 고전적인 추리소설의 대가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부터 시작해서 ‘리플리 시리즈’의 패트리샤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까지 유명한 여성추리소설가들이 줄줄이 포진해있는가 하면, 탐정과 형사들의 세계가 여성들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꽤 유용하게 사용된 경우도 상당하다.

추리소설은 익히 알려진 대로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가 등장하면서 대표적인 대중문학장르로 성립되었다. 추리소설의 붐에는 대중교육의 민주화로 인해 기본적인 소설독자층이 늘어났다는 것 외에도 개인의 재산권을 침범하는 위협적인 범죄를 통제하고자 하는 성숙한 부르주아 사회 특유의 공포가 큰 역할을 담당했다.

최초의 ‘셜로키안’(홈즈 시리즈의 연구가이자 매니아)이자 직접 탐정소설을 쓰기도 했던 로널드 녹스(Ronald Knox) 신부는 1928년 당대 급격하게 늘어나는 추리소설이 공정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독자들에게 지켜야 할 몇 가지 법칙을 제시한 바 있는데, 이는 정전 ‘홈즈’에 기반한다. 법칙은 범죄자는 소설 전반부에 등장할 것, 초자연적인 사건을 이용하지 말 것, 범행 동기가 사적이고 합리적일 것 등이다. 이처럼 모든 단서가 주어진 가운데 탐정과 독자가 벌이는 추리게임은 당대의 교양 있는 중산층에게 지적인 퍼즐로 수용되었다. 또한 추리를 통해 범인을 체포하는 과정은 범죄를 통제하고자 하는 독자들의 욕망을 만족시켜주었다.

▲ 도로시 세이어스의 <나인 테일러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1939년은 추리소설의 황금기이자 여성 추리소설가들이 맹활약한 시대다. 영국의 펭귄 출판사가 ‘범죄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선사한 두 명의 소설가 애거서 크리스티와 도로시 세이어스(Dorothy Sayers)도 모두 이때 활약한 여성작가들이었다. 풍속소설을 능가할 법한 크리스티의 당대의 세태묘사나, 피터 윔지경이라는 매력적인 상류층 캐릭터를 창조한 도로시 세이어스는 오늘날에도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소설은 비현실적인 탐정 캐릭터와 지나치게 세밀하여 기계적으로 느껴지는 설정 탓에 진부해졌다. 대중문학은 세태의 변화를 빠르게 흡수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추리물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자의식이 상당했던 도로시 세이어스는 ‘대중이 모든 트릭을 배우게 되면 고전적인 추리소설의 양식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예견한 바 있다.

그래서 1930년대 등장한 대쉴 해미트(Dashiell Hammett)와 레이몬드 챈들러(Raymond Chandler)등이 이끈 하드보일드 추리소설들은 현실의 비정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이들은 탐정 또한 돈에 좌우되는 현실적인 인물이며 범죄가 해결된다고 해서 사회가 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스파이물과 범죄물이 득세하기 시작했는데 1950년대를 휩쓴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대표적인 예다. 1960년대에는 P.D.제임스나 루스 렌델(Ruth Rendell)처럼 경찰들의 세계에 보다 현실적으로 접근하는 한편 선과 악의 문제를 밀도 높은 심리묘사로 다루는 무게 있는 여성추리소설 작가들이 등장했다.

조이스 포터(Joyce Porter)와 도버(Dover) 시리즈

현대추리소설계를 휩쓴 1960년~1970년대의 영미권 여성작가들은 그 자체로 묘한 매력을 풍기는 캐릭터다. 영화 <스위밍 풀>에 등장한 까다롭고 보수적이면서도 예민한 감각을 통해 재치 있는 상상력을 선보이는 중년의 여성추리소설가 ‘사라 모튼’은 감독 프랑소와 오종이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나 루스 렌델과 같은 작가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 조이스 포터의 <도버 4/절단>  
조이스 포터도 이 계열에 속할 수 있을 성 싶다. 마흔 살이 넘어서 추리소설계에 뛰어든 그녀가 창조한 도버 경감은 추리소설 사상 가장 음험하고 천박하며 비열한 캐릭터다. 그는 사건 수사에는 별 관심이 없고 늘 자거나 먹기를 좋아하는 게으른 성격이다. 자료를 수집해야 하는 일은 착한 부하 매글레거에게 모두 떠맡겨 버리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저 없이 “저 녀석을 유치장에 처넣어 버려!”라고 고함친다. 또한 ‘남편 살해의 범인은 아내인 법이야’라는 식으로 사건을 얼렁뚱땅 넘기려고 하다가 욕 얻어먹기 일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버 경감 시리즈가 유쾌한 것은, 도버 경감 캐릭터가 빚어내는 좌충우돌 스토리를 재치 있게 유머로 승화해 내기 때문이다. 고집스럽고 심지어 마초적인 도버 경감의 억지와 그에 대한 주변인들의 대처는 웃지 않고 넘어가기 힘들다. 도버 시리즈 중에 가장 명작으로 꼽히는 <도버 4/절단>(Dover and The Unkindest Cut of All)에서 도버경감과 그의 아내는 휴가 여행길에 올랐는데, 우연히 절벽에서 떨어진 남자를 목격하게 된다. 도버경감은 평소 성격대로 별일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정의감 넘치는 그녀의 아내는 근처 경찰에 신고한다. 결국 도버경감은 꼼짝도 못하고 그 마을에 죽치고 앉아서 사건을 수사하게 된다.

그런데 도버가 머무른 이 작고 조용한 월라튼 마을에서는 거친 성미의 남자들이 1주일 정도 사라졌다가 양처럼 순해져서 돌아오는 특이한 현상이 발생한다. 이 남자들의 공통점은 젊은 여자가 접대하는 마을의 클럽에 자주 드나들었다는 것. 그러나 그들은 그 1주일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도버는 마을의 거의 모든 여성들이 가입한 부인위원회의 지극히 건전한 사고방식에서 영감을 얻는다. 즉 이 남자들은 소위 ‘성기간수를 잘 못한다’는 이유로 부인위원회에 의해 강제로 거세 당했던 것인데, 자존심 때문에 차마 신고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이스 포터의 간단하면서도 허를 찌르는 설정은 원제 ‘Unkindest Cut'을 떠올리면 웃지 않을 수 없다. 바바리맨에게 “얘야, 가위 좀 가져와!”라며 비웃음을 날렸던 여성주의 밴드 무슨 연구소의 노래 ‘변선생’을 떠오르게 하는, 성기절단이라는 설정은 꽤 짓궂고 즉물적인 유머다. 물론 이 소설에서 성기절단은 성기가 절단된 사실을 절대로 말하지 못하는 남성들의 행색을 비웃는 블랙코미디적인 소재인 동시에 부인위원회로 대표되는 건전함을 강조하는 사회 자체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수 그라프튼(Sue Grafton)과 여탐정 킨지 밀혼

▲ 수 그라프튼의 <여형사 K>     © 일다
1980년대는 추리소설계에서 여성탐정의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한 시기다. 이는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인데, 최근에는 “탐정=독신이거나 이성애자”라는 공식을 깨고 여러 명의 게이, 레즈비언 탐정이 등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 수 그라프튼은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모두 아는 예민하고 냉담한 성격의 여성사립탐정 킨시 밀혼을 창조해서 눈길을 끌었다. 킨시 밀혼은 서른 두 살이고, 부모님이 어릴 적에 살해당했고,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으며, 젊은 나이에 경찰관이 되었지만 “여경관에게 쏟아지는 호기심과 조롱들을 감당해야”하는 그 일이 재앙처럼 느껴져서 그만두고 사립 탐정을 하게 됐다고 담담하게 고백한다.

현대추리물이 으레 그렇듯 킨시 밀혼 시리즈 역시 세상에 대한 섣부른 환상이 없으며 선악의 구분이 분명치 않은 하드 보일드한 성격이 강하다. 그녀는 범죄가 해결된다고 해서 세상에 정의가 구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오히려 내막을 알고 보면 범죄는 누구를 탓하기 어려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저질러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건이 끝나면 킨시는 “이 죽음의 춤이 언제 끝날까”라며 허무감에 빠진다. 자기 방어를 위해 순간적으로 사람을 죽인 후 자신이 정말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또한 슬픔에 빠진 증언자들을 만나면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백과사전세트를 사라고 영업하는 사람”같다며 자괴감을 털어놓기도 한다.

여기에 지은이는 쉽게 어긋나기 쉬운 불완전한 남녀관계의 풍속도를 그려 넣었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연애와 결혼은 치정극에 가까울 정도로 애증어린 상태에 처하거나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킨시조차도 사건을 맡을 때 마다 호감 가는 남자를 만나는데, 알고 보면 극히 잔인한 사람이었거나 이혼한 부인과 자식에게 매어있어서 킨시가 접근하기 어려운 남자라는 설정이다.

<여형사 K>(‘A’ is Allibi)에서 킨시는 바람둥이 남편을 죽였다는 죄목을 받고 감옥살이를 했던 여자를 위해 일한다. <두 얼굴의 여자>(‘B’ is for Burglar)에서는 표면적으로 유산 문제 때문에 언니를 찾지만, 실은 남편과 관계를 맺은 자기중심적인 언니를 미워하는 여자 고객이 등장한다. 이미 이혼을 두 번이나 겪은 킨시는, 매력적이지만 거칠고 자기중심적인 남자에게 매여 사는 여자들을 만날 때마다 빨리 관계를 정리하라고 냉정하게 충고한다. 이 여자들의 사연과 더불어 킨시가 정보 수집을 위해 만나는 여자들에 대한 세태 묘사는 크리스티만큼 세밀하면서도 그 비정한 맛으로 인해 더욱 감칠맛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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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rk 2005/03/04 [11:37] 수정 | 삭제
  •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여성작가들의 예리한 인물 스케치 방식 -도버의 캐릭터처럼요. 비열한 인간상. 선과악 구분을 넘어선-이 그런 분위기를 잘 끌어간다고 보거든요..
    기사 흥미롭게 봤어요. 다음 기사로 이어지는 것 같은데 기대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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